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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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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벽 솟은, 여긴 노동의 벼랑

저임금·고노동, 굴뚝과 첨단, 폐업과 이전, 격변과 이주를 압축한
‘드라마틱한 공간’ 구로공단에서 펼쳐진, 9명 노동자의 50년 모자이크
등록 2014-09-18 14:59 수정 2020-05-03 04:27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야경. 마리오아울렛 등 패션상가들이 밀집한 2공단사거리와 고층의 아파트형 공장들이 밝은 빛을 발하는 데 비해, 가리봉시장과 옌볜거리(도로명 우마길) 등이 포함된 반대편은 어둠이 짙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야경. 마리오아울렛 등 패션상가들이 밀집한 2공단사거리와 고층의 아파트형 공장들이 밝은 빛을 발하는 데 비해, 가리봉시장과 옌볜거리(도로명 우마길) 등이 포함된 반대편은 어둠이 짙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이 쉰 살이 됐다.
9월14일이 ‘그날’이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구로공단 조성의 근거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개발조성법’ 제정일(1964년 9월14일)을 기준으로 50번째 생일잔치를 치른다. 한국산업단지공단(KICOX·옛 이름 ‘한국수출산업공단’)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역사’와 ‘창조경제의 거점’이라 자평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했다. 기념식은 9월17일 연다.
서울 구로구·금천구 도처에 플래카드를 걸고 홍보해온 기념행사를 노동계는 보이콧한다. ‘2014년 9월14일은 공단조성법과 KICOX의 50주년일 뿐’이라고 노동계는 보고 있다. 기념식 직전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는 KICOX 앞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노동 배제의 역사’와 지난해부터 추진되고 있는 ‘2차 구조 고도화’ 정책을 비판할 계획이다. 노동계는 올해를 구로공단 50주년으로 보는 셈법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 기업이 입주해 노동이 시작된 시점이 1965년 5월이란 이유다. 노동계는 내년에 구로공단 50주년과 구로동맹파업(1985년 6월24일) 30주년 행사를 함께 치른다는 계획(구자현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장)이다.
기륭은 구로공단에서 이름을 얻었다. 공단조성법 제정 2년 만에 훼어챠일드쎄미코어주식회사(1966년 10월 설립)는 구로공단 2단지에 자리했다. 사명 ‘기륭전자’는 1990년에 가졌다. 공단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개명(2000년)하고 ‘G밸리’(구로·금천·가산의 이니셜이 모두 G로 시작하는 데서 따온 표현)란 애칭으로 불리는 사이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1895일(2005년 4월~2010년 11월)을 싸웠다. 사회적 합의(2010년 11월1일·1년6개월 유예 뒤 복직) 뒤 기륭전자는 다시 ‘기륭이앤이’(2012년 3월)가 됐다. 최동열 회장은 2007년 자신이 주주로 있는 자본금 12억원짜리 회사의 가치를 부풀려 기륭전자가 395억원에 인수토록 했다. 기륭의 고정자산도 순차적으로 매각했다. 최 회장은 1단지 인근 동작구 신대방동(2단지에서 2008년 이전) 사옥 집기를 철수(2013년 12월30일)시키며 잠적했다. 사회적 합의도 폐기됐다.
기륭의 시간과 구로공단 50년의 명암은 정확하게 포개진다. 노동자가 권리를 요구하면 고용주는 회사를 이전·폐업했다. 부동산을 매각해 시세차익을 남겼다. 땅값 상승에 올라탔다. ‘청산해서 남기는 장사’는 50년 동안 디지털단지에서 익숙하다.
기륭전자 노동자들과 그들이 접속한 사람들의 궤적을 좇아 구로공단 50년을 살폈다. 모두 15명을 인터뷰해 여성노동자 9명의 이야기를 추렸다. 공단의 역사는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역사다. 그들의 서사 속에서 저임금·고노동, 굴뚝과 첨단, 폐업과 이전, 격변과 이주를 압축한 ‘드라마틱한 공간’의 단면이 읽힌다. 시간 순서를 버리고 접속 경로를 따라 이야기를 펼쳤다. _편집자


찬란은 빈곤을 품되 묻어 감춘다.

고층의 빌딩이 첨단으로 깎아지르는 동안 가난한 삶은 수직으로 가팔라졌다. 거칠한 ‘공단’이 매끈한 얼굴로 성형해도 메마른 노동은 ‘디지털’로 진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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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50번째 인물을 비워놓은 까닭은 우리의 50인 선정 작업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50주년을 기념해 50인을 인터뷰·저작권자 금천구청)는 책 서문에서 썼다. 김문수·박영선·박원순·심상정·원희룡·이목희·인명진 등이 49명을 채웠다. 이름 하나가 목차에서 빠졌다. 김소연(44·전 기륭전자 분회장)은 ‘50번째 인물’이 돼달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김문수 같은 인물”과 한데 이름을 올리기 싫었다. 핸드프린팅 동판 제작에도 손을 내주지 않았다.

숯검정 굴뚝이 철거되고 반짝이는 유리벽이 솟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구로공단의 새 이름)가 노동을 다루는 문법은 바뀌지 않았다.

1974년 학원이 50명을 ‘벌집촌’에 부려놨다

“좋은 데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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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려 두리번거리는 김소연에게 낯선 말(言)이 따라붙었다. 공단 게시판과 전봇대마다 구인광고가 흐드러졌다. 말의 주인이 그를 봉고차에 태웠다. 인신매매 당하는 게 아닐까 겁도 났다. 사람이 다급한 시절이었다. 직원들이 역 앞에 나와 직접 구인했다. 회사에 사람을 소개하면 3만원씩 소개비를 받았다. 봉고차는 김소연을 갑을전자로 데려갔다. 직원이 1천여 명인 큰 회사였으나 1997년 구제금융 때 부도났다. 그는 민주노조 위원장이 됐다. 회사가 사옥을 팔고 경기도 김포로 이전했다. 폐업 반대 싸움을 벌이며 그룹 빌딩에서 155일간 점거농성했다. 그는 아직 정규직이었다.


휴먼닷컴은 디지털단지에 인력을 공급하는 첫 파견회사였고, 기륭전자는 공세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쓴 1호 회사였다. 대부분 기륭과 휴먼닷컴을 같은 회사라고 믿었다. 회식 때 정규직들이 마시는 백세주를 파견직은 주문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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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공장 이름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큰오빠는 동남전기주식회사(현재 1단지 에이스테크노타워 2차 자리)라고 써진 곳에 동그라마를 쳐준다. “전자회사가 그래도 일이 깨끗할 거야.” 동그라미를 쳐준 종이를 받아들며 열여섯의 내가 큰오빠를 쳐다본다. “나는 나이가 어려서 서류를 다른 사람 것으로 해야 한대.” “니 나이가 몇이지?” “열여섯.”(신경숙 )

1976년 세진전자(계산기 제조) 회사 게시판에 공지글이 붙었다. A(56)의 머릿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었다.

“남의 서류로 입사한 사람은 스스로 그만두기 바람. 자진 퇴사하면 3개월치 월급 지급.”

A는 갑을전자가 폐업할 때까지 김소연과 함께 일했다. 그는 1974년 열일곱 나이에 구로공단에 왔다. 갑을 입사(1995년) 21년 전이었다. A는 전남 영광의 가난한 소작농 맏딸이었다. 자기 공부를 포기하고 여동생 셋의 배움을 책임졌다. 광주의 취업알선학원이 그와 동기생 50여 명을 한 기차에 태워 가리봉시장 쪽 ‘벌집촌’에 부려놨다. 한 건물에 30개의 방이 있었고, 한 층마다 10개의 방이 있었으며, 2~3평 한 방마다 3~4명씩 들어가 살았다. 건물에 남녀 공동화장실이 한 개씩 있었다.

상경 이튿날 학원 관계자가 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회사마다 면접을 보게 했다. A는 세진전자(노조가 1985년 구로동맹파업 참여)에서 ‘1분에 1부터 100까지 쓰는 면접’에 합격해 사흘째부터 일을 시작했다. 1년6개월간 일했을 때 공고가 떴다. 회사가 어려워져 감원해야 한다며 남의 신분을 이용해 입사한 사람들의 ‘자수’를 독촉했다. 수강생이 18살이 안 될 경우 학원은 다른 학생의 개인정보로 이름과 나이를 바꿔 취업시켰다. A는 출생신고까지 3년 늦어 취업 당시 호적 나이는 14살이었다. 그 사실에 눈감고 어린 여공들을 채용했던 회사가 필요할 땐 감원의 꼬투리로 활용했다.

A는 세진을 그만두고 1976년 보성운수 120번(당시 번호) 버스 안내양이 됐다. 새벽 4시 첫차에 올라 밤 10시까지 하루 18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손님에게 받은 차비 중 얼마를 몰래 ‘삥땅’ 쳤고, 삥땅 친 돈 중 일부를 버스기사에게 상납했다. 1983년 결혼 뒤엔 식당에서 일했다.

2002년 정규직을 뽑는 회사는 찾을 수 없었다

갑을전자에 취업해 구로공단으로 돌아왔을 때 A의 나이는 37살이었다. 저임금 노동력의 원천이던 10대 후반~20대 초반 ‘여공’의 공급이 줄어들자 1990년대 초부터 구로공단 기업들은 30대 후반~40대 기혼 여성들에게서 대체 노동력을 찾았다(박준도 노동자의미래 정책기획팀장). 저임금 노동력의 ‘새 원천’은 지금까지 디지털산업단지 제조업 일손의 근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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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전자 폐업 뒤 A는 1단지에 위치한 팬택계열 하청업체에서 휴대전화 키패드에 나사를 박았다(2002~2008년). 회사 폐업으로 일을 잃었다. 세진과 갑을까지 그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3개 회사 모두 문을 닫았다. 그는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했다. 청소에도 ‘급’이 있다. 용역회사들은 디지털단지 퇴직 여성노동자 중 50대는 강남 대형 건물로, 60대는 디지털단지 쪽으로 보냈다. 수당을 빼서 기본급을 올리는 임금체계에 항의하다 A는 최근 실직했다. 고용의 질이 비상 없이 추락 일로를 걷는 구로공단 생산직 여성들의 전형적 경로다.

“청소라면 아직 희망이 있지. 예순이 안 넘었으니까. 게다가….” 그의 호적상 나이는 53살이다.

“기륭으로 가세요.”

2002년 김소연은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 10년 사이 풍경은 격변했다. 공단 게시판에 취업공고는 나붙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파견노동자가 돼 있었다. 정규직을 뽑는 회사는 찾을 수 없었다. 지역 생활정보지에서 휴먼닷컴의 구인광고를 봤다. 휴먼닷컴에 입사하는 줄 알았으나 휴먼닷컴은 면접도 보지 않고 그를 기륭전자로 보냈다. 휴먼닷컴은 디지털단지에 인력을 공급하는 첫 파견회사였고, 기륭전자는 공세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쓴 1호 회사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기륭과 휴먼닷컴을 같은 회사라고 믿고 있던 동료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식 때 정규직들이 마시는 백세주를 파견직은 주문조차 할 수 없었다. 월급은 최저임금보다 ‘딱 10원’ 많았다. 월급 명세서에 100만원을 찍으려면 잔업을 100시간은 해야 했다. 파견을 처음 경험한 노동자들이 서러움에 치 떨며 줄줄이 사직했다. 사 쪽은 계약직 전환을 제시하며 달랬다. 파견직을 고용하는 회사들이 한지에 뿌린 먹물처럼 번졌다. 당근은 6개월 만에 폐기됐다.

‘물갈이 해고’가 빈번했다. 회사는 밀물 넣듯 뽑았다가 썰물 빼듯 해고했다. 거의 매주 해고자 명단이 경영진에 올라갔고,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한 달에 한두 번씩 쫓아냈다(이미영·34). 2005년 4월 잡담을 이유로 ‘문자 해고’가 시작됐다. 정규직의 기억을 잊지 않은 파견직들의 설움을 모았다. 김소연은 기륭전자에 사상 첫 노조를 만들었다. 복직투쟁을 하며 다시 10년이 지났다. 디지털단지는 파견으로 꽉 찼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절망으로 공단은 나른하다.

2005년 4월 잡담을 이유로 ‘문자 해고’가 시작됐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미련일까 회한일까.

B(53)는 기륭전자 작업복을 10여 년째 옷장에 간직하고 있다. 버리려고 꺼냈다가도 다시 서랍 한켠을 내준다. “노예같이 일했던” 시간(2003년 11월~2005년 11월)이었지만 그는 정년을 기륭에서 마칠 수 있길 소망했었다.

기륭 입사 뒤부터 B는 정규직이었던 때가 없다. 2006년 10월 가산디지털단지 아파트형 공장의 작은 제조업체에서 파견직으로 일했다. 전자제품 회로기판에 부품을 끼었다. “11명의 직원 중 10명이 40~50대 아줌마”였다. 디지털단지의 제조업은 자기 몸을 혹사해서라도 일정 금액 이상을 벌어야 하는 ‘아줌마 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다.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는 콜센터나 대형마트에선 월 100만원을 벌기 어렵다. ‘월수입 얼마를 보장한다’는 파견업체의 자랑스런 홍보문구는 그만큼 잔업을 많이 시키는 회사로 보내주겠다는 뜻이다. 하청을 준 원청이 일감을 회수하면서 회사는 일거리를 찾아 구로를 떠났다.

디지털단지 아파트형 공장의 중앙은 인간의 길이 아닌 ‘화물의 길’이 차지한다. 대형 화물엘리베이터 통로가 아파트형 공장마다 척추뼈처럼 뚫려 있다. 쪼개는 것이 핵심이다. 공단의 업체들이 아파트형 공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필연적으로 소규모화됐다. 라인 하나가 하나의 회사가 되기도 했다. ‘생산 없는 생산공장’도 있다. 중국 등지에서 생산한 제품을 창고에 쌓아두고 상표 부착과 포장만 해서 자사 생산제품으로 내보냈다. 아파트형 공장 건물마다 문을 걸어 잠근 빈 사무실도 눈에 띈다. 공단이 주는 세제 혜택만 누리고 나가는 업체도 있다. 굴뚝형 회사 부지를 시세차익을 얻고 팔거나 매각한 돈으로 자신이 아파트형 공장을 건설해 임대업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사업 가능성을 타진하되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는 구조로 5인 이하의 법인을 만들었다 없애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그때마다 노동자도 썰리고 정리된다.

2010년 3월부터 B는 공단 외곽의 아파트형 공장으로 ‘5개월 단기직’이 돼 출근했다. 휴대전화 배터리 조립업체였다. 물량이 있을 때 뽑아 쓰고 물량이 해소되면 자르는 디지털단지 제조업의 ‘특별하지 않은’ 채용 방식이다. 월급은 시간당 최저시급으로 계산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때와 변함없는 잔업 수준이다. B의 쉬는 시간은 오전 10분, 오후 10분이 전부였다. 퇴근시간인 오후 5시30분에 10분 동안 김밥 한 줄을 먹고 잔업을 시작했다. 구로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가 없다. 모두 최저임금이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차이보다 기업 규모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 B에게 ‘노동의 벼랑’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아니라 구로의 영세사업장이다(구자현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장).

배터리가 라인을 타고 5cm 간격으로 밀려왔다. 고개 들 틈이 없이 배터리를 끼우다가 손톱 두 개가 새까맣게 죽어 빠졌다. 팔에 마비가 와도 라인을 비울 수 없었다. 시커먼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배터리가 라인 옆에 쌓였다. 동료들은 애처로워하면서도 서로를 탓했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아파트형 공장 안에서 B는 “기륭에서보다 더 추락한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5개월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는 라인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옮겨갔다.

B의 최근 직장은 ‘호출형’이었다. 한 달에 120여 시간 잔업을 시키다가도 작업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집으로 돌려보냈다. 라인마다 돌아가며 쉬다가 문자로 호출하면 출근했다. 오전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오후에도 자재가 안 들어오면 퇴근했다. 호출형일 땐 한 달 살림도, 시간 활용도, 자신의 삶도, B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호출형의 월급은 두 토막 세 토막이 났다.

2014년 D는 “대기업은 한국 IT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다 죽었다.”

B가 공단과 공단 외곽에서 거쳐온 회사 중 남아 있는 업체가 없다. 그가 회사를 저주한 것인지, 회사가 그의 삶을 저주한 것인지 헷갈렸다. 기륭 입사 전에 일한 문구류 하청업체부터 디지털단지 안에서 근무한 모든 직장이 폐업하거나 지방·해외로 이전했다. 경영 악화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노조를 깨기 위한 전략으로 폐업을 선택하는 회사들이 과거부터 있었다. 삼경복장, 대성전기, KDK 등이 그랬다.

B는 구로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가정을 꾸린 여성노동자들은 공단을 떠나는 회사를 쫓아갈 수 없었다. B는 공단 인근에서 일자리를 얻고 잃기를 반복했다. B의 걸음에 공단을 의지해 살아온 여성노동자들의 인생 행로가 겹쳐 있다. B는 현재 주말마다 집 근처 결혼식장에서 피로연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가산디지털단지역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 아파트형 공장은 사람의 물결을 토해냈다. 2000년대 초 벤처 붐이 빠지면서 임대료 압박을 피해 강남을 떠난 테헤란밸리의 업체들은 1단지 쪽에 주로 입주했다.

저곳은 ‘IT 막장’….

D(36)는 한 아파트형 공장을 보며 생각했다. ‘퍼포먼스가 가장 좋을 때’(실력과 경력에서 시장 수요가 좋은 상태를 뜻하는 정보기술(IT) 업계 은어)인 그는 자신을 ‘IT 노가다’라며 자조한다. 디지털단지 내 IT 산업은 대기업 하청기지의 성격을 띤다. LG나 삼성 쪽 일을 많이 한다. 그는 ‘월화수목금금금’ 일한다. 대기업이 짜둔 제작 일정을 받아드는 순간 소프트웨어는 독자성을 띤 프로그램이 아니다. 공장 가동 기일에 반드시 납품해야 하는 ‘부품’이 된다. 자기 제품을 스스로의 일정에 맞춰 개발하는 강남의 IT 업체들과 작업 방식에서 큰 차이를 띤다. 프로그램의 버그는 근본을 해결해야 하는데 ‘버그 잡는 업체’를 동원한 원청의 독촉 속에 땜질 처방이 남발된다.

“쉬는 게 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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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프로젝트가 ‘빡세게’ 돌아갈 때마다 그는 몇 개월씩 찜질방을 전전하며 한탄했다. 프로젝트를 마치면 쉼없이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지역 개발자들의 퇴사가 잦은 덴 이유가 있다. 근속연수가 쌓이지 않으니 개발 역량이 축적될 리도 없다. ‘2년 다니면 평균, 3년 다니면 과하고, 5년 다니면 미쳤다’는 말이 업계에 회자된다.

첨단을 다루는 디지털단지 IT 업계는 불안정 노동도 첨단으로 양산하고 있다. 대기업은 프로젝트 일정을 확정하면 아파트형 공장 내에 작업 공간을 마련해 개발자들의 파견을 요구한다. 하청업체를 불법 파견업체로 만드는 구조다. 프로젝트에 관계된 모든 공정의 하청업체 직원들이 한 공간에 모여 원청의 지시를 받는다. D의 회사는 아예 작업 공간으로 출근하는 직원을 현장에서 면접 봐 뽑기도 했다. 같은 회사 직원이지만 그는 D의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서로 얼굴도 모른다. D는 통신 대기업이 서울 명동에 마련한 공간으로 파견 간 일이 있었다. D의 회사가 재하청을 준 업체도 들어왔다. 갑-을-병-정(4차)에 프리랜서까지 붙는 구조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대기업의 하청 시스템에서 익힌 대로 D의 회사도 하청업체 직원들을 사무실로 불러들여 일을 시켰다.

경력을 뻥튀기해주는 ‘IT 보도방’이 성행하는 걸 보면서 그는 절망스럽다. 구로의 IT 업체들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직원을 선호한다. ‘퍼포먼스가 좋은’ 경력으로 꾸며 파견을 보내는 변종 파견업체들이 ‘장사가 되는’ 이유다.

1982년 ‘날라리 언니’는 한 달에 120시간을 야근했다

휘황한 디지털단지의 뒷골목엔 첨단화·고도화된 불안정 노동이 웅크리고 있다. 공간과 업무 내용은 첨단으로 바뀌었지만 운영 방식과 마인드는 굴뚝에 갇혀 있는 탓이다. 한 기업의 프로젝트 종료 직후 퇴사한 팀장은 그에게 말했다. “대기업은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게 아니라 골을 빨아먹는다.” D는 진심으로 “대기업은 한국 IT의 적”이라고 생각한다.

2단지 마리오아울렛 인근의 아파트형 공장에선 C(48)의 아들이 IT 일을 하고 있다. 공단에서 밥을 벌어온 여성노동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아파트형 공장 안에서 삶과 맞서고 있다.

여고 시절 C는 산업체특별학급 학생으로 낮엔 구로공단 전자회사에서 일하고 밤엔 공부했다. 결혼 뒤 남편과 하청 가내봉제업을 했다. 그는 1997년 구제금융 당시 하청의 최말단인 영세 가내봉제업을 했다. 기업들이 작업 물량을 외국으로 빼면서 하청 일감이 줄어드는 걸 피부로 느꼈다. 2005년 가게를 지탱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 그해 기륭전자에 파견직으로 입사하며 공단 땅을 다시 밟았다. ‘기능’은 그의 마지막 자원이었다. 2006년 기륭을 그만둔 뒤 ‘객공’(작업 물량을 개별적으로 받아 처리·납품하는 일종의 1인 봉제하청)으로 다시 미싱을 타고 있다. 객공은 자본 없는 봉제 숙련기술자의 ‘마지막 비빌 언덕’이다.

“큰길에서 ‘오다’(오더) 따면 골목으로 뿌려진다.”

강명자(52)는 ‘독산동 객공’이다. 94일 단식 등 극한 투쟁이 한창일 때 그는 기륭전자를 찾아 말없이 응원했다.

독산동 봉제골목은 유명 브랜드의 최전선이자 최말단 생산지로 한국 의류산업을 떠받치고 있다. 독산동 ‘20m 도로’(독산 3동과 4동을 가르는 대로)의 큰 공장들이 주문을 따면 부분봉제나 특수봉제는 봉제골목 소규모 공장에 하청을 뿌린다. 젊어서 구로공단 2단지에서 실밥에 묻혀 살던 봉제노동자들은 세월을 타고 독산동에 스며들어 ‘특종’(특수봉제 가공)과 ‘정닥꼬’(고무줄을 넣는 봉제가공)를 한다.

강명자는 ‘날라리 언니’였다. 1982년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대우어패럴에 취업했을 때 어린 동료들은 배꼽티 입고 조리 신고 고고장을 즐기는 그를 ‘날라리’라고 불렀다.

대우어패럴? 대우어퍼저라!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인 2공단사거리에서 마리오아울렛(오른쪽·옛 효성물산)과 W몰(왼쪽·옛 서울통상)이 불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 가로등엔 구로공단 50주년을 기념하는 홍보 걸개가 걸려 있다(왼쪽). 구로공단의 한 의류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미싱 작업을 하고 있다(오른쪽).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인 2공단사거리에서 마리오아울렛(오른쪽·옛 효성물산)과 W몰(왼쪽·옛 서울통상)이 불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 가로등엔 구로공단 50주년을 기념하는 홍보 걸개가 걸려 있다(왼쪽). 구로공단의 한 의류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미싱 작업을 하고 있다(오른쪽).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장미넝쿨 담장 너머에선 천국 같아 보였던 회사의 실제는 전혀 달랐다. “산업역군이란 지랄염병 같은 독려”를 받으며 타이밍(각성제)과 커피가루를 입에 털어넣고 새벽 4시까지 철야를 했다. 한 달에 120시간을 야근하면 다리에 쥐가 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선풍기가 없어 큰 고무대야에 얼음을 넣어 찬 공기를 쏘였다. 기숙사는 군대처럼 밤 10시면 점호를 했고, 점호에 한 명이라도 빠지면 방 전체가 벌청소를 했다. 1984년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 그는 사무장이 됐다. 남자 직원들에게 머리를 잡히고 옷이 찢어져 가슴이 드러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85년 6월22일 그를 포함한 노조 간부 3명을 경찰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연행했다. 그들의 구속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구로동맹파업)을 불렀다.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1986년 4월에 출소했다. 1988년 공단 내 의류업체 취업 면접을 봤다. 면접관이 책상 서랍에서 어떤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블랙리스트’였다.

2013년 E는 중국 지린성에서 왔다

초봄의 차가운 바람에 마음이 베였다. 수출의 다리를 건너다 주저앉아 울며 다짐했다. “다시는 구로공단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다.”

그는 “하청공장과 지하공장으로” 떠돌았다. “외곽으로, 퇴직금과 보너스도 없는 곳으로, 그렇게 몰락해갔다.”

그가 객공이 되는 과정은 한국 봉제산업이 ‘꼬리를 무는 하청’으로 재편되는 시기와 같았다. 자체 생산하는 유명 브랜드는 거의 없다. 저임금 국가로 생산공장을 내보내고 국내 생산은 싼 임금의 객공을 활용한다. 독산동 봉제공장과 객공이 만든 옷들이 마리오아울렛에서 유명 상표를 달고 팔린다.

강명자는 독산동에서 “노동자들이 몰락해가는 시간”을 읽는다. 그의 구속이 만들어낸 ‘동맹’과 ‘연대’의 공간이 화려해진 디지털단지엔 없다.

강명자는 최근에야 구로공단에 다시 발을 들였다. 신혼 시절 살았던 가리봉시장 인근 벌집촌은 그대로였다. 그의 ‘외딴방’엔 중국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D(36)는 한 아파트형 공장을 보며 생각했다. ‘퍼포먼스가 가장 좋을 때’인 그는 자신을 ‘IT 노가다’라며 자조한다. 디지털단지 내 IT 산업은 대기업 하청기지의 성격을 띤다. LG나 삼성 쪽 일을 많이 한다.


환영니또우 자리웨이쟈스/ 쉰멍라이또우 자리웨이쟈스(가리베가스로 오세요/ 꿈을 찾아 모두 오세요)… 싱쑤완떠 워칭춘/ 짜여우빠 짜여우빠(가난한 내 청춘아/ 힘을 내 힘을 내). -헤라

중국동포 E(21)가 계단을 내려온 2층 건물엔 창문이 11개 있다. 창문 하나마다 방 하나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5만원인 2평 남짓의 방에 그가 산다. 아버지·어머니와 셋이서 한방을 쓴다. 누구 한 사람 야간일을 나가면 조금 넉넉하게 잘 수 있다. 비좁다고 느껴질 땐 잠깐 옆집(옆방)에 다녀오기도 한다. 가리봉시장 인근 지역 재개발이 추진(현재 해제)되면서 전보다 방값이 뛰었다. 독산동과 대림동 쪽으로 옮겨간 중국동포가 많다.

옆집 이웃 중 한 명은 E의 아버지 친구의 동창생이다. 인사하다보니 알게 됐다. 흔한 우연이다. E는 지난해 중국 지린성에서 왔다. 최근 대림역 쪽을 걷다 같은 고등학교 졸업반 친구를 만났다. 인사를 하고 밥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던 중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그날 길을 가면서 약속 없이 만난 학교 친구가 15명이었다. 60명이던 같은 학년 전체가 한국에 있다. 학교 선생님도 20여 명 중 5명이 들어왔다. 지린성 고향 마을에 조선족은 남아 있지 않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E와 친구들에게 졸업 뒤 한국행은 ‘그냥 당연한 과정’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에 진학하듯 ‘그런 것’이다. E는 가족 모두가 한국에 정착하길 꿈꾼다.

그는 C3 비자를 갖고 있다. 3개월 단기비자가 만료된 뒤 중국에 돌아갔다 다시 나왔다. 어머니의 ‘초청’으로 1년 체류기한을 얻었다. 기술자격증을 따려고 미용을 배우고 있다. 자격증을 따면 F4 비자(재외동포비자)를 받을 수 있다.

가리봉동은 한국을 찾는 중국동포들이 ‘일단 오는 곳’이다. 가리봉동에 오면 일자리와 값싼 방을 구할 수 있다. 일정 기간 머무를 수 있는 쉼터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가리봉동이 세련돼질수록 가리베가스(가리봉동+라스베이거스)의 길도 점점 미끄러워지고 있다.

요즘 구로에선 영주권자나 결혼이주자가 아닌 경우 일자리를 얻기 쉽지 않다. 아파트형 공장이 디지털단지를 덮으면서 하나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의 지방 소도시로의 분산정책(인구 40만 명 이하 도시에서 2년간 일하면 F4 비자 부여·5년 뒤엔 영주권)도 한몫했다.

디지털오거리(옛 가리봉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옌볜거리(정식 도로명 ‘우마길’)와 마리오사거리(2공단사거리)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지난 추석 직전 중국동포들이 목구멍 밑으로 눌러둔 목청을 되찾는 옌볜거리 앞에서 경찰 10여 명이 ‘아동성폭력 대처법’ 전단지를 돌렸다.

2014년 9월27일 윤종희는 고발인대회를 연다

E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은 2단지의 한 인쇄공장이다. 취업이 불가능한 비자여서 ‘몰래 하는 일’이다. 야간조 10명 중 한국인은 2명뿐이다. 중국동포와 몽골인이 7명과 1명 있다. 대부분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일한다. E는 영주권에 목마르다.

E가 일한 인쇄소 정문 맞은편 몇백m 앞엔 에이스테크노타워 1차 건물이 있다. 구로공단 벤처형 아파트형 공장 1호(1998년 12월 준공·공단 첫 아파트형 공장은 1995년 9월 준공한 동일테크노타운 1차)로 알려져 있다. 옛 대성전기 사옥을 허물고 지은 건물이다.

대성전기는 구로공단에서 노조 탄압으로 유명했던 사업장이다. 노조를 깨기 위해 공장 폐쇄를 거쳐 경기도 안산으로 사업체를 이전했다.

대성전기 출신 윤종희(44)는 2005년 기륭에 입사했다. 그는 기륭전자 신대방동 사옥에서 이것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최동열 기륭 회장이 지난해 말 회사 집기를 철수하며 잠적한 뒤부터 조합원들은 빈 사무실을 돌아가며 지키고 있다.

“최동열 회장 사기죄 고발인 대회를 준비 중인데요….”

윤종희는 시민사회단체에 취지를 설명하며 협조를 구했다.

기륭전자 노조는 9월27일 오후 2시 검찰청 앞에서 사회적 합의를 파기한 최 회장을 상대로 고발인대회를 연다. 기자회견 뒤엔 고발장도 접수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구로공단 50년 ‘미싱밥 청춘아’ [21의생각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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