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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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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실종자를 기다리는 진도 팽목항과 진도체육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지낸 100일의 지난한 구도
등록 2014-07-24 14:37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사고 뒤 100일이 흘렀지만 아직 10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실종된 단원고 2학년 남현철군의 기타와 박영인군의 운동화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원회 사진기록단 제공

세월호 사고 뒤 100일이 흘렀지만 아직 10명의 실종자가 돌아오지 못했다. 실종된 단원고 2학년 남현철군의 기타와 박영인군의 운동화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호 사고 가족대책위원회 사진기록단 제공

안개 낀 항구에 별들이 반짝인다. 잔잔한 바다 위로 바람이 지날 때마다 달그락거리며 노란 별들이 울음소리를 낸다. “우리 11명 어서 나오세요.” “언능 집에 가자, 다윤아.” “사랑하는 지현. 내일은 집에 가자. 미안하고 사랑한다.” “영인아, 현철아.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양승진 선생님, 사랑해요.” “권재근님, 혁규군.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못한 11명을 부르는 말들이 플라스틱 모빌에 적혀 있다. 7월16일, 세월호 참사 90여 일이 흘렀지만 전남 진도 팽목항엔 아직 산산이 부서진 이름들을 부르는 ‘초혼’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노래방 번호를 외우고 다닌 남편

슬픔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울화가 쌓여 분을 터뜨리고, 누군가는 눌러 담아 추억한다. 매양 비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슬픔 가운데에도 웃음이 있고 웃음 가운데서도 슬픔이 자꾸 떠오른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지내는 전남 진도 실내체육관에 전에 없던 음악 소리가 퍼진다. 가족들을 돕기 위해 진도에 파견 중인 단원고 ‘영어 선생님’ 정성신씨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미친 여자들인 줄 알겠다.” 영어 선생님의 너스레에, 축 처져 있던 양승진(57·실종) 선생님의 아내가 오랜만에 킥킥 웃음을 보인다. 이내 그도 목소리를 보탠다. 노랫말이 공교롭다. 괜히 울적해질까 실종자 가족대책위의 배의철 변호사도 곁에서 흥을 돋운다. “이런 게 트라우마 치료예요.” 2개월여간 진도의 실종자 가족들의 법률 대리를 맡아온 배 변호사는 이들에게 가족처럼 살가운 존재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거든요. 잠시라도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싶고, 가족들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남아 있어요.” -영어 교사 정성신


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자꾸 잃어버린 이들에게로 달려간다. 중년의 부부는 곧잘 함께 노래방에 갔다. 남편의 애창곡은 조용필의 이었다. “우리 남편 18번이에요. 오로지 그것만 불러. 자기가 (노래방 곡) 번호를 외우고 다녀.” 양 선생님의 아내가 나직하게 말한다.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노랫말마다 모두 아프다. 영어 선생님이 기분 전환을 위해 틀어달라는 곡도 결국은 떠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 장미여관과 노홍철이 부른 흥겨운 곡이지만, 이번엔 자꾸 아이들 생각이 난다. “현철(단원고 2학년·실종)이 그룹사운드가 이 노래 진짜 잘 불러. 축제할 때 이거 부르면 내가 맨 앞에 나가서 환호하는 거야. 우리 애들 너무 잘해. 재능이 진짜 많아.” 아직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가족, 동료, 제자들이 마치 잠시 어딘가에 떠나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한 눈치다.

가족을 먼저 찾은 이들이 떠난 실내체육관엔 20여 명의 가족들만이 드문드문 섬처럼 앉아 있다. 피붙이가 돌아올 때까지 슬픔마저 유보된 실내체육관을 채운 것은 밀도 높은 침묵이다.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가족들은 다른 이들과 그다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나마도 가족들이 바지선으로, 세월호 재판으로 흩어진 낮 시간엔 피로에 지친 2~3명의 가족만 남아 체육관을 지킨다.

“잠시라도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실종자 가족들의 버팀목은 아직 실내체육관을 지키는 이들이다. 영어 선생님 정성신씨도 사고 이후 줄곧 체육관을 지켜왔다. 100명이 넘는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함께 울며 위로하기보다, 너스레로 가족들의 기운을 북돋는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거든요. 잠시라도 웃을 수 있게 해주고 싶고, 가족들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남아 있어요.” 사고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직위해제된 단원고 교장 김진명씨도 일상의 대부분을 진도에서 보낸다. “여기 오기도 하고 절에 가서 우리 아이들, 선생님들 명복을 빌기도 하고요.” 불교 신자인 그는 실내체육관 옆에 설치된 불교 부스를 지킨다. 아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스승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듯, 김씨는 말을 아꼈다.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려는 시민들의 발길은 아직 꾸준하다. 경남 진주에서 약국을 운영해온 정영숙(64)씨는 지난 6월 약국 문을 닫았다. 40년 약사 생활을 접은 뒤 그가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휴가보단 진도행이었다. 대한약사회의 ‘봉사약국’을 일주일간 맡기로 했다. 진작 오고 싶었지만 길이 멀어 오지 못했다. 남편도 함께 와서 실내체육관 청소를 돕고 있다. 그는 가족들의 건강을 크게 염려했다. “빨리 일이 수습돼야 할 텐데…. 몸도 마음도 다들 아파서 큰일입니다.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아닙니까. 진도에 살면 매일 올 건데 참 아쉽습니다.”

가족들도 마냥 앉아 진실을,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루가 빠듯하다. 아침 8~9시면 각자의 일을 나누어 흩어진다. 몇몇 가족은 진도군청에서 열리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다. 영인(단원고 2학년·실종)이 삼촌을 비롯해 남자들 몇몇은 수색·구조 작업을 참관하기 위해 바지선에 오른다. 가족대책위 시민기록위원회의 기록단으로 참여하는 독립PD·사진작가도 날마다 수색 작업을 기록하기 위해 동행한다. 세월호 선원과 선사 직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 지난 6월부터 일부 가족은 매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공판에 참석한다.

저녁이 되면 하나둘 모여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공기가 팽팽해진다. 가족마다 의견도,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지내며 이 지난한 구도를 100일 가까이 해왔다. 재판을 지켜본 가족들이 먼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박아무개는 그새 얼굴이 좋아졌더라고요. 아주 밥도 잘 먹고 그러나봐요.” 영인 엄마가 한숨을 내쉰다. 볕에 그을린데다 간신히 세수만 하고 다니는 가족들에 견줘 선원들의 밝아진 낯빛이 원망스러운 표정이다. 국회 앞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은 재판에 오지 못했다. 아이들을 두고 도망친 선원들에게 화라도 제대로 내주고 싶은데, 엄마·숙모들 몇 명이서 법정에 다녀온 게 속상하다.

분노도 슬픔도 허탈도 임계점에

이야길 나누다가도 체육관 내 대형 TV에서 ‘세월호’ 관련 소식이 들려오면 가족들의 눈길은 일제히 화면으로 향한다. 서울에서 단식 중인 유가족들 이야기와 경기도 안산에서 걷고 있는 생존자 아이들의 소식이 계속 들려온다. “아이들 어디 도착했대요?” 아이들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실종자 가족들이 물어오기도 한다. 소란스러운 뉴스 모니터 바로 옆에 붙은 모니터에선 어둠 속의 맹골수도가 침묵을 지킨다. “물결이 아까보다 괜찮네.” 누군가에겐 그저 바다 위 바지선 풍경일 뿐일 텐데 가족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챙긴다. “전문가가 다 됐어. 원하지도 않는 전문가가 됐어.”


“물결이 아까보다 괜찮네.” 누군가에겐 그저 바다 위 바지선 풍경일 뿐일 텐데 가족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챙긴다. “전문가가 다 됐어. 원하지도 않은 전문가가 됐어.”


쳇바퀴 돌듯 공무원들과 진전 없는 회의를 마치고 온 이들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또렷하다. 그래도 가족들은 그들이 실낱같은 희망인 것을 안다. 모두가 기억해도 그들이 돌아서면 아이들을 영영 찾지 못할 것이고, 모두가 잊어도 그들이 곁에 있으면 아이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을 안다.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서 너무 목소리를 높이면 안 돼요.” “만날 목소리를 높이면 우리 의견을 듣지 않지.” 수중 기록 방식을 두고 벌어진 이날의 회의 결과가 탐탁지 않은 듯 다들 한마디씩 보탠다.

의견이 엇갈려도 목소리를 높이는 이는 없다. 서로가 인내의 마지노선에 이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분노도, 슬픔도, 허탈도 모두 임계점에 이른 이들이다. “이렇게 가다가 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요. 참고 참고 가다가 한번 걸리면 가족들 다 끝나버려요. 그러니 서로 조심해야 돼.” 현철의 이모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현지 상황도 가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진도군의 지역경제가 파탄 지경이다. 정부가 진도와 경기도 안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지원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피해를 본 어민들 외의 지역 주민들은 지원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진도 지역에서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윤아무개씨는 “여름 성수기에 들어서는데 주말에도 펜션 예약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실종자 가족대책위와 진도군민대책위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협의하고 있지만, 금전적 지원 없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기란 어렵다. 이날 팽목항에서도 해경과 부두 관리를 맡은 업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3개월 피해 줬으면 됐지.” 팽목항에 주차된 차량과 천막들을 수거해달라는 요청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추가적인 지원은 없는 가운데 현장의 갈등을 진도 주민들과 가족, 해경 실무자들이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하는 모양새다.

건강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가족들이 조립식 주택에 들어갈 땐 주로 기력이 떨어져 링거를 맞을 때다. 며칠 전에는 실종 학생의 아빠가 밤중에 실신해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아들 혁규(6·실종)와 함께 실종된 권재근(51)씨의 형 권오복씨도 건강한 체질이었지만 100일 상주 노릇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는 사고 이후 내내 실내체육관을 지켜왔다. “여기를 떠날 수가 없어요. 잊혀질까봐 그러는 거죠. 이제 잠수사들도 바뀌고 수색 방식이 바뀌었으니까 다시 희망을 걸어보는 거죠. 많이 지쳐도 찾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있는 거니까….” 기침을 쿨럭거리며 권씨가 다시 담배를 빼 물었다. 권씨 가족은 지난 7월16일 권재근씨의 베트남인 아내 한윤지(29)씨 가족들의 요청으로 인천에서 한씨의 장례를 치렀다.

부디 어서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어요

기적 같은 희망을 놓지 않는 가족들의 간절함 덕분일까. 지난 7월18일 새벽 6시께 세월호 3층 주방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희생자 1명이 발견됐다. 18일 저녁 현재 아직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남은 실종자 10명이 모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팽목항의 달그락거리는 별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단원고 2학년 남현철·박영인·조은화·허다윤·황지현, 고창석·양승진 선생님, 승객 권재근씨와 혁규군, 이영숙씨, 승무원 이묘희씨…. 부디 어서 돌아오세요. 모두 기다리고 있어요.

진도=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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