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렇게라도 아니면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7월15일 오후 5시20분~16일 오후 3시30분,
단원고~국회의사당 앞까지 걸은 단원고 생존자 학생들 동행기
등록 2014-07-22 15:53 수정 2020-05-03 04:27
지난 7월16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 앞까지 걸어온 생존 학생들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지난 7월16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 앞까지 걸어온 생존 학생들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71일 만에 돌아가는 길은 두려움이었다.

“교복, 2학년 이름표, 체육복 등 내가 단원고 학생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들이 싫어요. 사람들이 내가 단원고 학생이라는 걸 알아볼까봐 자꾸 숨게 돼요. 기자들이 주변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웃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할까봐 웃지 못하겠어요.”(6월25일 학교 복귀를 앞둔 학생들의 글)

그렇게 싫다던 교복을 입고

그렇게 싫다던 교복을 단정히 입었다. 이름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업을 마친 7월15일 오후 5시20분.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 친구 가족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간청하고 있는 서울 여의도 국회까지 걷기로 했다. 1박2일 약 37km의 여정. 기자를 맞닥뜨릴 수도, 마음대로 웃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이다. 이날로부터 일주일 전. 승현이 아버지 이호진(56)씨와 누나 이아름(25)씨, 웅기 아버지 김학일(52)씨는 이곳, 단원고에서 머나먼 도보 순례를 시작했다. 교문 앞으로 배웅을 나온 학생들은 아버지가 홀로 짊어진 십자가에 노란 리본을 매주었다.

“저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저희들은 법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친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행진에 앞서 학생대표가 읽은 편지)

아이들 가슴엔 또 다른 이름이 숨쉰다. 한 학생이 둘러멘 책가방 위에는 9명의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 돌아간 뒤, 제 손으로 하나하나 새긴 친구들의 이름표다. 단원고에서 약 6km 떨어진 곳에는 안산하늘공원이 있다. 100명이 넘는 친구들이 잠들어 있다. 저녁 7시, 가던 길을 멈추고 친구들에게 향했다.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재잘거리며 웃는 아이들은, 쉽사리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낯선 사람, 특히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취재진이 사진을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이가 많았다. 지옥에서 막 돌아온 아이들에게, 인터뷰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언론사가 있었다고 했다. 모포를 덮은 얼굴 위로 쏟아져내린 플래시 세례도 공포였다. 그날 이후, 언론은 곧 세상이고 어른이었다. 인터넷 악성 댓글에도 마음을 다쳤다. “저희도 아이들 마음을 잘 몰라요. 90% 이상이 이야기를 안 한다고 봐요. ‘학교에서 뭐했니?’ 물어보면 그저 ‘잘했어’ 해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걸 물어보면 짜증을 많이 냈죠.” 학부모가 말했다. 아이들의 신뢰를 받는 건 어른들이 아니라 학생대표로 보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닌 ‘불신’을 잘 알고 있다. 되도록 확인된 사실만 말하려 한다. 학부모 회의 결과를 아이들과 모두 공유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아이들이 도보 행진을 하면서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물었을 때, 사실 저희도 모르니까 ‘1시간30분 갈 것 같다’고 하면 ‘못 믿겠다’고 해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내심 신경이 쓰인다.

돌아온 지 한 달이 안 됐지만…

이런 학생들이 처음 학교 밖으로 나가겠노라 선언했다. 부모들의 고민은 깊어졌다. 어렵게 학교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과 불안이 뒤엉켰다. 차마 ‘가만히 있으라’ 할 순 없었다. 사람 마음이 모두 같을 수 없다. 세상이 여전히 무서운 아이들이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했다. 교사와 학부모들은 혹시나 다른 선택을 원하는 아이들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우려했다. ‘행진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 아이들의 결론이었다. 37명은 무거운 발걸음을 뗄 때마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에게 카카오톡으로 바깥 상황을 전했다.


아이들 가슴엔 또 다른 이름이 숨쉰다. 한 학생이 둘러멘 책가방 위에는 9명의 친구가 있었다. 학교에 돌아간 뒤, 제 손으로 하나하나 새긴 친구들의 이름표다.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도보행진을 하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 뒤로 시민들이 함께 걷고 있다.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며 도보행진을 하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 뒤로 시민들이 함께 걷고 있다.

또다시 상처받기를 감수하고 떠난 길목길목엔, 응원을 보내면서도 미안해하는 시민이 많았다. 첫날 자정이 가까운 시각. 안산을 넘어 안양·시흥을 거쳐, 광명에 도착했다. 어느새 시민 30여 명이 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다음날 각자 일터로 향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학생들이 다 먹고도 남을 빵과 과일, 양말이나 칫솔을 챙겨들고 나온 이도 줄을 이었다. 시민들로부터 받은 먹을거리는 다음날 또 다른 시민들과 나누어 먹었다. 물품을 밤새 보관해주고, 다음날 여의도까지 운반해준 시민도 있었다. 어느 시민들은 단원고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피자를 보내기도 했다.

“언니들·오빠들…. 세월호 사건 때문에 많이 힘드셨죠? 저도 세월호를 생각하면서 언니·오빠들처럼 가슴이 아팠어요. (중략) 걸어서 국회의사당까지 가신다는 소식에 엄마가 만들어준 식빵을 가지고 이렇게 응원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먼 길 조심해서 가시고, 끝까지 힘내세요.”(7월15일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보낸 편지)

새벽 1시30분이 되어서야 하룻밤 묵어갈 광명시 하안동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에 닿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선생님들이 마련해준 숙소였다. 앞서 안양에서 했던 저녁 식사는 안양YMCA, 아이쿱생협, 대안과나눔 등 여러 지역단체가 준비했다. 7월16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한 건 광명 지역 단체들이었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발달장애청소년 대안학교 ‘사람사랑 나눔학교’가 도보 행진의 마지막 식사를 맡았다. 이 학교 학생 30여 명은 1시간가량 여의도 국회까지 함께 걸었다.

“저희를 도와주시고 숙소까지 제공해주셔서 정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시민 여러분들이 틈틈이 힘을 주셔서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에 아직 대한민국은 살 만한 것 같습니다.”(7월16일 오전, 단원고 학생이 쓴 편지)

여의도 가까워지자 노란 우산 활짝

이튿날 새벽 3시가 넘어선 시각. 잠들지 못한 몇몇 아이들의 목소리가 복지관 3층 복도에 낮게 울렸다. 그 위로 눈이 시큰거리는 파스 냄새가 자욱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아이들 발엔 물집이 잡혔다. 절뚝거리는 학생도 여럿이었다. 아이들 5명이 추가로 행진에 합류했다. 그즈음, 복지관 앞으로 취재진과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직장인 조동현(28)씨도 그들 중 하나다. “세월호 관련 행사엔 처음 참석했습니다. 혼자 왔어요.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구호가 있잖아요. 잊지 않으려면 행동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게 된 거고. 이렇게 오게 되면 몇 년이 지나서도 이날이 기억나고, 그러면 세월호도 기억할 테니까.”

복지관 건물 앞에서 정문으로 나가는 길목까지 학생들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시민들이 길을 만들었다. 오전 10시50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어제보다 가벼워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시민들은 500여 명까지 늘었다. 여의도가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노란 우산을 폈다. 우산 위엔 하고 싶은 말이 적혔다. 얼굴 노출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노란 우산 행렬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10시간여를 꼬박 걸어온 길이다. 오후 3시께 아이들은 국회 앞 담벼락에 멈춰섰다. 학교에서부터 지니고 온 노란 깃대를 꽂았다. 전명선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학생들을 맞았다. 학생대표가 편지 꾸러미를 내밀었다. 둘쨋날 여정을 시작하기 전, 아이들은 편지를 썼다. 국회에 있는 친구 가족들에게 혹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 더운 여름에 진상 규명을 하기 위해 많은 고생 하시네요! 이 일이 잊혀지기 전에 꼭 사실이 밝혀져야 됩니다. 항상 힘내고, 무엇보다 이 일을 해내시려면 체력이 중요합니다!” “항상 고맙게 살게요. 아이들의 내 친구들 우리의 분노를 표하는 게 이런 거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힘내셔야 합니다. 같이 있을게요.” “억울하게 죽은 제 친구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독 어른스러워 보였던 학생대표가 울음을 터뜨렸다. 전 부위원장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떠나간 아이들 이름이 적힌 2학년 6반 혹은 3반 티셔츠를 입은 가족들도 어깨를 들썩였다.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쏟아내는 아이도, 슬픔을 꾹꾹 참아내는 아이도 있었다. 생존 학생 부모도 눈시울을 붉혔다. 시민들과 취재진이 세월호 피해자들을 에워싼 그 자리엔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평범한 고2로 봐주세요”

학생들이 떠나가고 30여 분 뒤. 경찰은 단식을 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국회 출입을 막아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일부 시민들은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며 국회 문을 열라고 항의했다. “세월호 사건은 그저 선박 사고이며,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고 한 목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성난 시민들은 “당신이 과연 목사가 맞느냐”며 들고 있던 피켓을 빼앗았다. ‘세월호 특별법’이 언제쯤 만들어질 수 있을지, 그 법이 피해자들의 염원을 품어 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단원고 학생들을 만나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여고생 3명이 조심스럽게 노란 깃대를 보고 있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깃대에 쓰인 문장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버스 두 대에 몸을 실은 아이들은 다시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있던 친구들은, 무사히 돌아온 아이들을 환영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잔혹한 갈림길에서 돌아온 학생은 겨우 75명뿐이다.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바라봐주세요. 그리고 ‘세월호 사고’를 잊지 말아주세요.”(학교 복귀를 앞둔 학생들의 글)

100일을 넘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소박한 여정은 시작될 수 있을까.

글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장슬기 인턴기자 kingka8789@hanmail.net·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