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진보정당이 걸어온 길은 줄곧 내리막에 가까웠다. 과거 당 집행부를 맡았던 이들이나 전문가들도 이 해묵은 패배에 대해 명징한 분석을 내놓지 못한다. 지난 10년 동안 ‘위기’에 대해선 너무나 많이 말했기 때문이다. 은 차라리 누구보다 질기게 당의 앞날을 고민하는 당원들에게 6·4 지방선거의 패인과 향후 전망을 들어보기로 했다. 노동당·녹색당·정의당·통합진보당에서 지역을 안배해 모은 평당원 44명에게 설문지를 돌린 뒤 개별 인터뷰를 병행했다. 각 정당을 넘나드는 솔직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 이름을 밝혀 적지 않는다.
“참패다.”(녹색당 ㅎ당원) “비참하다.”(통합진보당 ㄱ당원) “절망적이다.”(정의당 ㅇ당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도 없다.”(노동당 ㄱ당원)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의견을 묻자 4개 정당 평당원들의 반응은, 일부를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숨, 또는 울분.
중대선거구제로 편향된 룰을 바꾸자처참한 선거 결과에 각 정당의 집행부는 말을 삼가고 있다. 일단 7·30 재보선을 묵묵히 준비하는 분위기다. “녹색당의 힘은 여전히 미약했습니다. 6·4 지방선거의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6월5일 녹색당) “지방선거 결과에서 우리의 이상과 전망은 노동자 민중에게 아직 선택받지 못했으며, 대안적 정치세력으로서 노동당은 더 많은 역량의 강화와 준비가 필요함을 확인했습니다.”(6월17일 노동당) “정의당의 이름으로 처음 치르는 선거에서 정의당이 어떤 정당인지조차 충분히 알려지지 못했지만 그 또한 저희들의 부족함 탓입니다.”(6월5일 천호선 정의당 대표)
질 때 지더라도 스코어는 중요하다. 그나마 ‘희망을 봤다’고 할 만한 대목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선전을 점쳤던 후보들마저 줄줄이 나가떨어질 때 절망은 짙어졌다. ‘첫 녹색당 출신 시장’에 성큼 다가섰던 서형원 경기도 과천시장 후보는 19.3%를 얻어 3위에 그쳤고, 울산시장 후보로 나섰던 조승수 정의당 울산시당위원장은 김기현 새누리당 후보의 절반도 득표하지 못했다. 기초의회에서 활발한 의정을 펼쳐왔던 오진아(마포 아·정의당) 후보나 나경채(관악 사·노동당) 후보 등의 낙선도 예상 밖의 결과였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
‘오른쪽 허리가 약했다’ ‘세대 교체에 실패했다’ ‘골 결정력이 부족했다’ ‘조직력의 한계였다’…. 경기가 끝나면, 쏟아지는 말들이 패자를 향한다. 승자가 이기는 덴 이유가 많지 않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배의 이유는 모두 다르다. 가치 지향과 의사 결정 구조가 모두 다른 진보정당들의 부진을 하나의 이유로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통합진보당은 자기만 잘났다는 식으로 진보정당과 공조 없이 선거를 치렀고, 정의당은 뚜렷한 정책 공약이 보이지 않았고, 노동당은 가장 진보적인 정책을 내세웠으나 당의 성찰이 부족한 듯 보이고, 녹색당은 생명정책과 재밌는 선거운동 전략을 내세웠지만 인지도가 부족했다.” 어느 녹색당원의 평가다. 레프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을 응용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기는 팀은 거개가 비슷하지만 지는 팀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패배한다.”
태생적 어려움에 대한 지적이 제일 먼저 나온다. 승자독식의 한국 정치판에서 진보정당의 도전이 달걀로 바위 치는 싸움이란 건 오래된 진리다. 설문조사에 응한 4개 진보정당의 당원들은 ‘진보정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결 과제’로 ‘중대선거구제 확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등 정치제도 개혁’(45%)을 첫손에 꼽았다. 선거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만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와 달리 중대선거구제는 득표순으로 다수가 당선될 수 있어 다수만이 아닌 소수도 대표한다는 강점이 있다. 녹색당원 ㅎ(52)씨는 “선거 시기를 돌파할 전략이 부재하고, 기존 선거 룰이 기울어진 편향된 룰이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평가했다. 정의당원 ㅇ(48)씨 역시 “대통령 결선투표제, 중선거구제, 비례대표 확대 등이 없다면 진보정당은 줄곧 소수정당으로 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45%, 위기 원인은 내부 성찰과 혁신 부족제도에 모든 한탄을 떠넘길 순 없다. 제도의 한계 안에서 진보정치가 거둬왔던 결실이 이미 명백하다. “보수 양당 중심의 선거 구도를 감안하더라도 초라한 성적”(노동당원 ㄱ씨·43)을 설명해야 나아갈 길을 구할 수 있다. ‘낡은 것은 죽고 새로운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위기의 명제는 이번에도 유효하다. “과거의 투쟁 일변도, 저항세력으로서의 자기 정체화로는 더 이상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의제를 선도하고도 거대 양당에 주도권을 빼앗겨버리는 거다.”(정의당원 ㅁ씨·47)
노동당원 ㅇ(40)씨의 문제의식도 비슷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들이 과연 대중정당을 할 준비가 돼 있는가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패러다임이 경제로 옮겨진 지 15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열사’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NL(민족해방 계열)은 해묵은 민족이나 통일 타령을 아직도 계속하고, PD(민중민주 계열)는 노동자의 계급성에만 집착한다.” 진보정당이 좀처럼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번 선거가 끝난 뒤 탈당을 고민 중이라는 통합진보당원도 있다. “선거 뒤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많은 당직자들이 종북 프레임과 정부의 탄압에만 패인을 집중시키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대중의 마음이 떠났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종북 프레임을 깰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치열했는지 고민스럽기도 하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6%는 “진보정당이 겪고 있는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진보정당 내부의 성찰과 혁신 부족에 있다”고 지적했다.
당원들은 특히 ‘통합진보당 사태’부터 이어진 진보의 진흙탕 싸움이 유권자들을 떠나게 했다고 믿는다. 투명성을 생명으로 하는 진보적 가치 자체에 유권자들이 의심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 2년 새 갈등은 봉합되기보다 더 짓무르는 모양새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5%는 “한국의 진보정당은 당파성 또는 정파성으로 인해 내부 갈등을 겪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각각의 응답자들이 꼽는 ‘갈등의 주범’은 엇갈린다. 분열의 책임 소재를 묻는 것에 대부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통합진보당을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다른 누군가는 ‘통합진보당을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이들’이 분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직접적으로는 통합진보당 사태가 (선거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이며 이는 경기동부뿐만 아닌, 진보정당 전반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다.”(정의당원 ㅇ씨) 노동당원 중 일부는 통합진보당을 진보정당의 일부로 언급하는 것에도 불편한 기색을 나타냈다. “몇 년째 이어진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운동은 설 자리를 잃었어요. 진보운동이 완전 똥값이 됐지요. 이름이 다른 진보정당도 도매금으로 넘어갔고요.”(노동당원 ㄱ씨) 공연한 피해의식만은 아니다. 또 다른 노동당원은 “지역에 사는 어머니가 사전투표 과정에서 노동당에 표를 달라고 주위 친구분들께 얘기했더니 ‘이정희 당 아니냐’고 주저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직 일반 국민 사이에 진보정당 간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파적 대립’보단 ‘정책 경쟁’을통합진보당 당원들은 그 반대로 입을 모은다. “진보정당들이 선명성을 경쟁하듯이 다른 정당에 대해 견제를 넘어서 반대를 하고 있다. 통합과 분당을 반복하다보니 그동안 쌓인 앙금이 깊어서 그런 거 같다. 나 같은 평당원이 보기에는 안타까울 뿐이다.”(통합진보당원 ㄴ씨·40) 통합진보당 내부의 처절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드물게 나온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통합진보당은 참패했다고 본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당의 부정적 이미지, 비례경선 부정 사건과 폭력 사태 등 대처 과정,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당의 미래가 정말 암울하다고 본다.”(통합진보당원 ㄱ씨·44)
결국 대중정당으로 다가서려면 ‘정파적 대립’보단 ‘정책 경쟁’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정당들이 다양한 생활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반성도 있다. “2002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가 내걸었던 무상교육·무상의료를 통해 대안으로서의 진보정당을 대중이 확인했지만, 2012년 대선에서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가 보여준 ‘박근혜만 낙선시키러 나왔다’는 모습은 진보정치의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노동당원 ㅂ씨·30)
따져보면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 진영에 의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본격적인 선거전에 접어들기 전 정책 이슈로 떠올랐던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의 무상버스 공약은 그보다 앞서 노동당이 운을 뗀 정책 의제다. 올해 들어 불붙었던 기본소득 논의도 옛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과 녹색당이 이끌어온 의제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민심이 ‘박근혜 구하기’와 ‘박근혜 심판론’을 오가는 가운데 진보정당이 정책 의제를 끌고 갈 여지를 만들지 못했다는 평이 설득력 있다. 좋은 의제를 손에 들고도 중앙당 집행부의 적극적인 의제 설정 능력 부족으로 묻혀버린 것이다.
정책과 의제가 눈에 띄지 않으니 ‘정당’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기만 제각기 나부끼는 모양새다.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대학생 윤이나(24)씨는 “녹색당은 환경·생태에 관심 갖고 활동해온 것을 알겠는데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노동당은 각각의 차이는 물론이고 새정치민주연합과도 무엇이 다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전했다. 정의당의 슬로건이었던 ‘골목까지 행복한 복지국가’는 새누리당의 ‘생애주기형 맞춤 복지 실현’ 공약과 어떻게 다른 걸까. 당원들로서도 차이를 변별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각 정당들만의 고유색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노동당은 노동에, 녹색당은 환경에 집중해야 하는데 각 정당들의 모든 정책이 비슷비슷하다.” 녹색당원 ㅇ(40)씨의 지적이다. 각 정당이 차별화된 전략을 내놓을 수 없다면 통합과 연대를 통해서라도 득표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 이유다.
통합을 해서라도 2% 넘겨야?‘헤쳐 모여’의 부작용을 단단히 겪고도 진보정당의 재통합을 바라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설문조사에 응한 당원 10명 중 4명은 ‘진보정당은 가급적 한 정당 아래 모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통합을 해서라도 2%를 넘겨야 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긴 어렵더라도 지지에 맞는 수준의 득표력은 현실화했어야 한다.” 광역 비례 득표율 1% 선에 그친 노동당의 ㅂ(50) 당원의 항변이다. 정의당 당원인 ㅇ(48)씨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4개나 존재하는 것은 기형적이다. 통합진보당을 제외한 3개 정당은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미 증오의 악순환을 겪고도 ‘통합’은 가당키나 한 것일까. ‘통합’을 바라는 이들과 비슷한 수의 응답자들은 ‘통합’에 반대했다. “선거 결과가 안 좋다고 ‘그럼 합쳐야지’ 해봐야 말짱 도루묵이란 거 아시잖아요. 정치공학적 통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지난 통합진보당의 실패가 그대로 보여주잖아요. 서로 신뢰를 보여주는 게 우선이죠.”(노동당 ㄱ당원) “진보정당의 ‘묻지마’ 통합은 각자 흩어져 있던 진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지금의 모습이라면 차라리 흩어져 있는 진상들이 낫다.”(노동당 ㅇ당원)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참고 문헌남종석, ‘진보정치의 어제와 오늘’, , 2014년 6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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