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KBS 공사 창립 이래, 아마도 최악이 되었을 그날 밤을요. 그날 밤은 KBS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터져나온 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왔던 곪은 상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번에 터지는 것 같았어요.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는 곳국가적 대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항의하기 위해 KBS 앞을 가득 채운 광경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가슴에 묻은 자녀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KBS를 향해 “사과하라”고 외치는 모습을, 과연 이전까지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요? 특정 진영도, 특정 단체도 아닌 말 그대로 ‘약자 중의 약자’, 우리가 보호하고 위로하고 대변해야 할 피해자들이 우리로 인해 상처받고 우리를 원망하며 거칠게 항의하는 모습을 말이에요.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고 국민에게 항의받는 ‘국민의 방송’, 그 모습이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 저는 그만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이 전해졌습니다. 한달음에 달려나가 사과하고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로해도 모자랄 판에, 회사는 도리어 유족들을 문전박대하고 말더군요. 김시곤 보도국장은 물론, 사장님에 대한 면담 요구도 회사는 매몰차게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회사는 보도국 간부들에 대한 일부 유가족들의 폭력 행사를 문제 삼아 공격하는 공식 입장을 급히 만들어 배포까지 했지요.
비슷한 시각, 보도국에서는 아침 뉴스에 마찬가지로, 유족들의 폭행과 감금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리포트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재고를 요청하고 꼭지 수를 조정해서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톤 다운된 리포트가 나가긴 했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희생자 유가족들과 싸우자고 덤비던 회사의 대응 방식에 전 또한 그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KBS에 대한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자 유족들은 KBS에 대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압박의 대상을 돌연 청와대로 바꿨더랬죠. KBS가 온전한 공영방송이 아니라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는 곳이라는 ‘공공연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습니다. 애써 ‘국영방송’이 아닌 ‘공영방송’의 기자가 되고자 했던 저는, 유족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KBS 문제 해결을 청와대에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맥이 풀려버렸습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시선이, 우리의 독립성과 공정성 정도를 바라보는 국민의 일반적인 생각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하니, 온몸에 기운이 없어졌습니다.
유족들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입증됐습니다. 다름 아닌, 사장님 스스로 몸소 입증해주셨죠. 유가족들이 KBS 앞까지 찾아와 그렇게 만나려고 했던 사장님이, 일이 그 지경이 돼서야, 청와대 앞으로 직접 찾아가 사과를 했으니 말입니다. 혹여 그 사과가 사장님의 독자적인 결단일지도 모른다는 다른 해석(?)이 나올까 걱정했는지,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은 “내가 KBS에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고 밝혀 ‘KBS에 대한 청와대 개입설’을 친히 뒷받침해주기까지 했지요.
백운기 보도국장, 임명되기 직전 청와대행그에 앞서, 훨씬 더 명료한 얘기도 나왔어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자진 사퇴를 알리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사장님이 그간 청와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KBS의 독립성을 무너뜨려왔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으니까요.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신념도 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온 길환영 KBS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말이죠. 김 전 국장은 이어 다른 언론을 통해 사장님이 “평소에도 끊임없이 보도를 통제했”으며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추가로 밝히기도 했지요. “윤창중 사건을 톱으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까지 언급하면서요.
너무 적나라하게 KBS 보도의 위상이 드러난 발언이라, 사실 액면 그대로 믿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김시곤 전 국장이기에 더욱 그랬고요. 하지만 또다시 사장님이 입증해주셨죠. 김 전 국장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보도국장 자리에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고등학교 동문인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을 앉힘으로써, 사장님 스스로 김 전 국장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한껏 높여주었습니다.
하필 ‘백운기’라니요. KBS에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존경과 신망이 두터운 능력 있고 성품 좋은 선배가 여럿 있습니다. 물론 보도국장감으로도 손색없는 분들입니다. 그들을 제치고 백운기라니요. 이미 2009년 김인규 전 사장이 물리력을 동원해 사장실에 진입하던 그날, 후배들의 저항을 온몸으로 앞서 뚫으며 사장을 호위하던 모습을 또렷이 사진으로까지 남겨, 후배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인물을 보도국의 수장으로 앉히다니요.
백운기 국장의 청와대 커넥션은 이미 단순 의혹 제기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백 국장 본인이, 친절하게도, 관용차를 사용하며 투명하게 남긴 ‘기록’으로 확인해주셨죠. 보도국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지난 5월11일 오후 3시쯤 행선지 “청와대”로 회사 차량을 타고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온 ‘사실’을 말이죠. 이렇게 구체적인 정황증거마저 있는 마당에, 그를 국장으로 임명한 배경을 어떻게 보는 게 이치에 맞을까요? 청와대의 요구를 국장에게 전달하다 사달이 났으니, 아예 청와대와 직접 끈이 있는 보도국장을 임명해 ‘폭로’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는 게 상식적이지 않을까요? 아니, 그보다는 이번 인사 역시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집행했다고 보는 편이 사장님의 행동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쪽이겠군요.
“후배라면 참 좋았을 사람”사장님이 제20대 KBS 사장으로 결정될 즈음, 일선에 있던 아는 PD에게 사장님이 어떤 분이신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PD는 한마디로 “내 후배라면 참 좋았을 사람”이라고 평하더군요. 리더로서의 자질에는 물음표가 생기지만, 아랫사람으로서는 선배나 윗사람의 말을 참 충직하게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평가였지요. 지금에 와서 그 평가를 곱씹어보니, 저는 왜 권력이 사장님을 선호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 자신의 뜻을 잘 관철하는 사람으로 사장님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바꿔 말하면, 사장님이 KBS호의 선장이 된 순간, ‘언론사 KBS’로서는 그 자체로 그만큼 불행한 일도 없었던 셈입니다.
희생자 유족들 앞에서 사과하신 뒤 맞이한 월요일 보도국 회의에 사장님이 참석해 현 난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셨단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수십 년간 쌓아온 KBS 뉴스의 신뢰가 실추돼 유감스럽다”고 하셨다지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셨고요. “중립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보도국 내부적으로 마련하면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고 나름대로 비전도 제시하셨다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평소 같으면 설레었을지 모를 사장님의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의 능력이나 재량이 어떨지, 사장님이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나갈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냥, 사장님의 ‘존재’ 자체가 공영방송 KBS에 짐이 되고 독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에게는 ‘다시는’ ‘앞으로’ 이런 표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그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KBS는 언론사 취급을 받을 수 없어요. KBS 기자들은 공보처 직원과 다름없게 되고요. 누구도 우리의 취재를 순수하게 보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우리의 보도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를 먹고 사는 언론사로서 온전히 기능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KBS 사장이 권력의 눈치만을 본다고 온 세상 만천하에 알려진 이상, 오롯이 사장님의 존재만으로 말이에요. 기자협회가 긴급비상총회를 열어 94.3%의 찬성률로 사장님과 보도본부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제작 거부에 나서겠다고 결의하게 된 절박한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장님이 있는 회사에서는 일할 수 없다는 단호한 뜻입니다.
저희는 세월호 참사 30일을 맞아 5월15일 KBS 에서 우리의 지난 보도 태도를 반성하고 스스로 비판했습니다. 방송이 나가는 순간까지, 역시나, 쉽지 않은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시청자들을 바라보며 이번만큼은 반성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다짐으로 많은 선후배가 지혜를 모았고, 마침내 시청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KBS에 없던 작지만 큰 변화였고, 이를 통해 우린 KBS 뉴스가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비로소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급기야 보도국 부장들도 사장님께 “당장 사퇴하라”고 요구하며 후배 기자들과 뜻을 함께했습니다. 그동안 보도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며 전원 보직 사퇴도 했지요. 보도본부장도 결국 우리의 요구를 받아 스스로 물러났고요. 이제 사장님만 결단하시면 됩니다.
청와대 지시 없이 할 마지막 결단사장님께서는 취임사에서 유난히 KBS 출신으로서 내부 승진을 거쳐 사장이 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을 강조하셨지요. 낙하산 논란과 함께 청와대 사전 낙점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그래, 그 점 하나는 상징성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가져본 적도 있습니다. 그때 사장님께서 하셨던 약속도 새록새록 기억이 나네요. 이렇게 강조하셨죠.
“그동안 KBS로부터 받은 많은 사랑을 모두 돌려드린다는 각오로 KBS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고자 합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겠습니다.”
사장님,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을 지키실 때입니다.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사장님 스스로 행동할 마지막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될 겁니다. 물러나십시오. 그리고 보도국장도 함께 데리고 가주세요. 거듭나야 하는 공영방송에, 사장님과 청와대 하수인들이 있을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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