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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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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자들을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소시민 근성, 부정에 고개 돌린 비겁함, 이웃에 눈물 흘릴 뿐이었던 무심함…
이제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살리라
등록 2014-05-10 17:51 수정 2020-05-03 04:27
5월1일 오후 안산에서 출발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위로한 뒤 정부 대처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5월1일 오후 안산에서 출발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위로한 뒤 정부 대처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그립고 또 그리운 임들이시여. 그간 반도에 범람했던 온갖 말의 성찬들이 혹시 역겹지는 않으셨는지요. 그저 말없이 무릎 꿇고 당신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데도 이렇게 구차한 단어를 감히 입에 올리는 저의 무례함에 노엽지는 않으셨는지요. 어쩌면 지금쯤 협잡과 탐욕으로 가득한 속세의 모든 기억을 잊을 터이지만, 여전히 당신들 앞에 부끄럽고 염치없기만 합니다. 어이없이 죄 많은 세상을 떠나버리신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름다운 꽃과 나비와 새로 가득한 서천 꽃밭에 계십니까. 아귀도 축생도 모두 용서받은 극락에 가셨습니까. 자리도, 금은보화도, 명예도 모두 부질없이 오로지 사랑으로만 가득하다는 천국에 가셨습니까. 저 하늘의 아름다운 별이 되셨습니까. 6·25 전쟁으로, 4·19와 광주의거로, 익산역 폭발과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참사와 대구 지하철, 수학여행 버스, 태안의 갯벌과 경주 리조트에서 어이없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당신들을 따뜻하게 반겨주고 계십니까. 제발 우리들은 저세상에서 다 평안하니 이젠 그만 울라고, 그리고 의연하게 각자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쩌면 이제는 집착도, 분노와 슬픔도 없는 저세상에서 아름다운 별이 되어 우리를 내려보고 계시나요.

“용감한 친구들은 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

아무 죄도 없이 그 평화로운 시간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야 했던 당신들에게, 참사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일이 터진 뒤에도 속수무책으로 울기만 했던 제가 무슨 염치로 어떤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관행이라며 계속된 과적과 무책임한 구조 변경, 무리한 운행과 엉터리 검사를 해가면서 그 많은 검은돈이 오고 간 일을 왜 그동안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을까요. 능력이 없어도 떵떵거리며 노후를 보내게 하는 정경유착과, 로비는 하면서 임금 절감을 위해 형편없는 고용 조건으로 일하게 만드는 기업 관행에, 돈이 생기면 외국으로 빼돌리면서 정말 필요한 기업의 관리는 소홀히 하는 한국의 현실에 이리 무심했을까요. 아니, 사실은 조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어차피 세상은 그런 거니까, 내가 뭐라 말해봤자 바뀌지 않을 테니까, 하는 패배주의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요. 설마 나에게만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위험한 일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일상을 보낸 것은 아닐까요. 현실을 듣고 보면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해 짐짓 눈감았던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그래서 더욱 분노하고 원망하고 자책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바라는 올바른 세상을 위해 보잘것없는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요. 속절없이 더 좋은 저세상으로 그냥 총총히 가시지 말고, 더 오래 제 곁에 머물며 저를 감시하고 격려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들이 세상을 떠난 그 나이쯤, 6·25 전쟁과 좌우익의 갈등을 겪었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씀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똑똑하고 용감한 친구들은 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 우리처럼 비겁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만 구차하게 살아남은 것이지”라고 말이지요.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저는 세상이 이처럼 부조리와 모순, 불평등으로 가득한 곳이란 사실도 절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크고 작은 집안의 갈등과 학교에서 겪는 고달픔 따위에 불평불만만 할 줄 알았을 뿐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진 못했지요. 사는 게 힘들다는 핑계로 아름다운 윤동주 시인이, 선한 전태일 열사가, 순수하게 국가를 사랑했던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가, 그리고 또 많은 이름 없는 민초가 광주에서 부산에서 마산에서 서울에서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숙제를 남겼는지 참 잘도 잊고 살았습니다. 한동안 세상은 바뀐 듯 보였지요. 하지만 정말 바뀌었을까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 어이없는 일로 억울한 죽음이 계속되는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렇게 편하게만 살아온 저의 원죄를 대신 안고 어여쁘고 어여쁘신 당신들이 그 차가운 물에서 힘들게 죽어간 것은 아닐까요.

그대들의 몫까지 똑바로 산다면

부패와 탐욕, 염치없음으로 가득한 세상의 잘못으로 아무 죄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속절없이 떠나야 했던 희생자들만큼이나 남은 가족의 생살을 찢는 아픔에 더 면구스럽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잃고 난 뒤, 어떻게 삶 전체가 무너져내리는지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간 사람들을 절대 잊지 않고 가슴에 품는다면, 남은 이들의 슬픔을 내 마음에도 담는다면, 그래서 그들의 몫까지 더욱 똑바로 산다면, 그나마 저의 죄가 조금 덜해질까요.

사랑하는 임들이여. 이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먼 나라로 떠난 임들이여. 관례라는 이름으로 불의와 부패가 판치게 놔둔 저의 소시민 근성이 부끄럽습니다. 부정한 권력과 관료들이 정의를 욕보일 때 큰소리 한 번 못 내고 고개를 돌린 저의 비겁함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억울한 이웃의 아픔을 그저 영화 보듯 눈물 몇 번 흘리곤 덮어두었던 저의 무심함이 창피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두 눈 똑바로 뜨겠습니다. 미력하나마 무엇을 해야 당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수 있을지 찾고 또 찾아보렵니다. 미욱하고 어리석은 저이지만, 이제는 당신들의 차분하고 해맑은 마지막을 망각의 강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들이 바라는 올바른 세상을 위해 보잘것없는 제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요. 속절없이 더 좋은 저세상으로 그냥 총총히 가시지 말고, 더 오래 제 곁에 머물며 저를 감시하고 격려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아. 사랑하는 임들이시여. 꿈속에서라도 당신들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준엄한 꾸중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만약 또다시 당신들 같은 억울한 희생이 되풀이될 기미가 보인다면 저라도 혹독하고 또 혹독하게 꾸짖어주십시오. 그래서 저처럼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겁한 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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