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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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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삼킨 재판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대선 개입 무죄판결
재판부가 검찰 수사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경찰 내부 의혹은 나서서
등록 2014-02-12 14:17 수정 2020-05-03 04:27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2월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2월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한겨레 박종식

사실을 외면하는 진실은 존재하는가.

범죄의 사실과 범죄의 진실과 범죄의 의도가 하나의 법정에서 숨바꼭질을 벌였다. 2월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피고 김용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의도가 없다”는 말로 법원은 그의 범죄(선거법 위반·직권남용) 혐의를 방면했다. 지난해 6월14일 검찰이 그를 불구속 기소한 뒤 8개월여 만에 나온 선고였다. 피고는 법정을 나서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며 웃었다. 명백한 사실에 눈감은 판결이 진실의 숨결까지 질식시켰다. 2012년 대선 이후 한국 사회를 거센 격랑으로 몰아넣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의 실체도 자물쇠를 채운 법정 안에 갇혀버렸다.

권 과장은 ‘엄청난 거짓말쟁이’

‘의도’는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범죄 여부를 판가름짓는 핵심 쟁점이었다. 법원은 그가 국정원의 2012년 대선 개입 사실을 은폐할 의도가 없었다고 판결했다. 증거분석 결과의 수서경찰서 회신 거부 및 지연 의사도 없었다고 봤다. ‘사실은 있는데 의도는 없는’ 일들이 유독 김 전 청장한테 집중적으로 발생한 셈이다.

법원 판결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완벽하게 배척했다. 재판부는 “검사의 주장과 논리가 우연적이고 지엽적인 사실의 조각들로 성글게 엮여 그 안에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이 있음에도 피고인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전제로 피고인의 변소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김 전 청장의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도 모조리 부정당했다. 재판 결과 권 과장은 ‘엄청난 거짓말쟁이’가 됐다.

반면 김 전 청장의 주장은 대부분 수용됐다.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재판부가 검찰 수사 결과를 하나하나 반박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김하영씨 범죄 증거가 다수 확보된 현재의 시각으로 혐의가 불분명했던 수사 초기의 분석팀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주문까지 재판부는 내놨다. 공판 과정에서 꾸준히 제기돼온 경찰 내부의 말맞추기 의혹도 재판부는 깨끗이 불식시켰다.


김 전 청장은 재판에서 검찰이 확인한 핵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선거 개입 은폐라는 의도는 모두 부인했다. 그는 서울경찰청 디지털증거분석팀과 간부들로부터 김하영씨의 노트북과 데스크톱에서 다수의 아이디와 닉네임이 발견된 점을 보고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회 직후인 지난해 12월16일 밤 11시에 ‘혐의 사실 없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도록 지시한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선거 사건을 지도·감독하는 서울경찰청장으로서 소임을 다한다는 원칙에 따른 ‘사실 그대로의 발표’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의도 없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법원은 핵심 ‘사실들’을 간과했다. 서울경찰청 분석팀이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노트북에서 인터넷 여론 조작에 사용한 아이디와 닉네임 등을 찾아내고도 분석보고서에서 뺀 사실에 면죄부를 줬다. 후보 지지·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대선 이틀 전 심야의 긴급 발표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재판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댓글의 흔적은 노트북 하드디스크가 아닌 인터넷에 남는다. 김씨의 노트북을 조사한 것도 김씨가 인터넷에 흘린 증거를 찾을 목적이었다. ‘하드디스크에서 댓글을 찾지 못했다’는 당연한 말로 수사 결과를 감춘 경찰을 법원은 감쌌다.

재판부는 수사 은폐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에 주목하는 대신 김 전 청장이 결백한 이유를 하나하나 따져 설명했다.

초기 분석팀의 ‘미인지’도 이해해달라

재판부는 “대선 3개월 전 문재인·박근혜 후보 지지·비방 글에만 한정해달라”는 김씨의 ‘분석범위 제한’ 요청을 경찰이 수용한 행위가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김 전 청장의 지시 없이 실무자들 “나름의 고민과 토의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란 주장도 받아들였다. 법원은 “임의제출자(김하영)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압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도 덧붙였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받은 사람이 지정한 분석범위를 수사기관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법원은 합당한 조처라고 평가했다. ‘분석범위 제한’은 김 전 청장이 국정원 선거 개입 사실을 축소한 언론 발표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만든 논리라고 검찰은 주장해왔다.

김하영씨 범죄 증거가 다수 확보된 현재의 시각으로 혐의가 불분명했던 수사 초기의 분석팀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주문까지 재판부는 내놨다. 지난해 12월16일의 언론 발표에 문제가 있더라도 당시엔 그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재판부는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여부가 불분명한 시기여서 분석의 대상은 ‘김하영이 게시글을 작성하였는지’에 한정되어 있었고 ‘찬반 클릭’ 자체는 전혀 문제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설정한 분석의 범위에 의하더라도 게시글만 포함되므로 분석관들은 찬반 클릭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변호했다. 국정원 선거 개입 활동의 중요 증거인 인터넷 아이디와 닉네임 등을 두고서도 재판부는 서울경찰청 편에 섰다. “당시 분석관들은 김하영이 선거 개입 혹은 정치 관여를 했다는 단서가 아니라 국가정보원의 대북 업무를 수행하는 자료라고 생각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선을 며칠 앞둔 당시는 국정원 선거 개입 여부를 놓고 여야가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이던 때였다.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던 민감한 사건에 대한 경찰의 증거 은폐 혹은 축소 행위를 재판부는 ‘있음직한 착오’로 돌변시켰다.

법원은 피고인이 수서경찰서를 증거분석 과정에서 배제하도록 지시한 것도 고의적 은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보안을 철저히 하라는 일반적인 지침을 강조한 것일 뿐”이란 얘기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해소하는 언론 발표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는 검찰 공소사실은 “증거 없다”고 못박았다. 김 전 청장의 지시가 증거분석 과정에서 찾아낸 김하영씨의 메모장(아이디 40여 개와 닉네임 등 포함)과 인터넷 접속 기록이 수서서에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검찰은 봤다.

서울중앙지법의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한 무죄 선고에 분노한 시민들이 2월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해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한겨레 이종근

서울중앙지법의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한 무죄 선고에 분노한 시민들이 2월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해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한겨레 이종근

서울경찰청의 검색 키워드 축소 요구(100개→4개)도 ‘수서서가 증거분석 의뢰 절차와 키워드의 의의를 정확하게 숙지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으로 규정했다. “수서서가 요청한 키워드는 불필요하게 수가 많거나 혐의 사실 관련성이 적다는 디지털증거분석팀 나름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공판 과정에서 꾸준히 제기돼온 경찰 내부의 말맞추기 의혹도 재판부는 깨끗이 불식시켰다. 재판부 자신이 “경찰들이 똘똘 뭉쳐 말을 맞춘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했으나, 선고 공판에선 “의심을 가질 만한 사정도 전혀 안 보인다”고 단언했다. 김 전 청장이 증거분석 과정을 영상 녹화하고 선관위 직원과 수서서 직원을 참여시켜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했다는 진단도 내놨다.

“불필요한 오해” 불식 못한 게 다만 “아쉬움”

재판부는 다만 ‘아쉬움’을 표했다. “경찰의 보도자료와 언론 브리핑이 최선의 것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라며 “분석의 범위와 관련한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1년 이상 전 국민의 의혹이 집중됐던 사건을 재판부는 ‘아쉬움’과 ‘불필요한 오해’로 정리했다. 법원은 김 전 청장뿐 아니라 그의 공모자로 지목된 경찰관 누구의 혐의도 거론하지 않았다.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는데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는 ‘분열적 세계’가 됐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정의가 사라졌다”며 강력 반발했다. 새누리당은 “당연한 결과”라고 반겼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공판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 전 청장의 의도 없음을 강조하는 재판부의 의도’에 의구심이 쏠리면서 진실은 한 꺼풀 더 덮였다. 채동욱·윤석열을 찍어내며 수사팀을 공중분해시킨 박근혜 정부의 전략이 결실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실을 부정하는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상사회’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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