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반대파들이 쓰던 ‘사기꾼’이란 단어를 쓴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에서 프레임의 덫에 걸린 대표적 사례로 이 말을 꼽았다. 프레임은 ‘생각의 틀’이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머리 속에는 그 말과 결부된 프레임이 작동한다. ‘세금 폭탄’이라는 프레임이 형성되면 세금은 나쁜 것으로 인식된다. 프레임의 덫에 걸리면 사실이나 정의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나간다.”
불복은 무조건 나쁜 말, 승복은 좋은 말‘대선 불복 프레임’은 힘이 세다. 1년 전 치러진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거나,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할 때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대선 불복’이라고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대통령을 향한 비판 앞에는 “대선에 불복하는 게 아니지만” “선거를 다시 치르자는 게 아니고” 따위의 전제가 달렸다. 부정선거였다면 당선자가 사퇴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당연한 질문’은 프레임 속에 갇혔다. 지난 12월8일 “나, 국회의원 장하나는 ‘부정선거 대선 결과 불복’을 선언한다”라고 시작하는 성명이 발표됐다. 새누리당은 어김없이 ‘대선 불복 프레임’을 들이댔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반민주적 진보를 가장한 외부 대선 불복 세력의 국회 교두보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 의원은 이틀 뒤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선 불복이라고 하지 말고, 부정선거에 불복한다, 이렇게 사태를 명확히 규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인터넷에서 그의 연관 검색어에 ‘장하나 대선 불복’이 나오는 지경이 됐다. 프레임에 갇히면,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대선 불복 프레임’이 전가의 보도가 된 것은 ‘불복’이란 단어가 갖는 정치적 경험 탓이 크다. 불복의 사전적 뜻은 ‘남의 명령·결정 따위에 대하여 복종·항복·복죄(服罪) 따위를 하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선거 불복’이라고 쓰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직선거법의 목적(제1조)은 “선거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공정히 행해지도록 하고, 선거와 관련한 부정을 방지함으로써 민주정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게 불복이다. 1997년 이인제 경선 불복이 대표적이다. 그는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 밀려 낙선했으나 탈당한 뒤 다른 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했다. 대중의 뇌리에 ‘선거 불복’은 부정적 의미로 각인돼 있다.
‘승복’은 무조건 좋은 말로 여겨진다. 불복 행태가 끊이지 않았던 선거 문화 탓에 사전적 뜻보다도 더 긍정적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단어로 가장 덕을 많이 본 정치인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에 패한 뒤 ‘깨끗한 승복’으로 점수를 땄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선 불복 프레임’에 이를 활용한다. ‘박근혜처럼 승복하라’는 식이다. 이 수석은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최근 펴낸 에서 “정치에 품격이 없다”고 한 데 대해 “박 대통령이 경선에서 깨끗하게 승복했던 모습에서 국민들은 지도자로서의 신뢰를 보내줬다. 선거 불복이 품격이냐”(12월1일)고 공격했다. 승복의 전제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공정히 행해진’ 선거라는 점은 ‘대선 불복 프레임’ 밖으로 튕겨나간다. 이 수석은 지난해 대선 당일 “문재인 명의의 불법 선거운동 문자가 전국적으로 뿌려지고 있다. 설령 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당선 무효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복’의 전제가 불공정한 또는 부정한 선거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과격한 발언과 왕조시대 용어야당과 국민을 ‘대선 불복 프레임’으로 윽박지르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행태는 장하나 의원의 ‘부정선거 불복’ 발언과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의 ‘박정희 전철’ 발언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박 대통령은 “국론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도를 넘는 과격한 발언을 하는 것은 결코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정쟁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과 청와대 참모들은 두 의원을 ‘반역자’ 취급하고 나섰다. 양 의원이 ‘암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부적절한 측면이 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대통령에 대한 위해를 선동·조장하는 무서운 테러”라는 청와대 홍보수석의 울먹거림과 국회 국정원개혁특위 무기한 연기 선언으로 나타났다. “반역을 자행하고 있다”(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며 왕조시대 용어를 쓰기도 했다. 발끈한 민주당이 국정원개혁특위와 예산결산특위 연계 방침으로 맞불을 놓자 다음날 의사일정이 다시 정상화하긴 했지만, 집권 여당이 국회를 파행시킨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새누리당의 일사불란함은 섬뜩할 정도다. 12월9일 세 차례의 최고위원회의와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국회 로텐더홀에 모여 결의문을 발표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 일동’은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고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대선 불복 발언과 현직 대통령 저주 발언을 강력 규탄한다”며 두 의원의 의원직 사퇴, 민주당의 공식 사과와 두 의원에 대한 출당·제명 조처, ‘대선 불복’에 대한 당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다음날에는 ‘새누리당 소속 의원 155명 전원’이 국회 윤리특위에 제명안을 제출했다. 1979년 야당 총재 김영삼이 여당의 날치기로 국회에서 제명당했던 ‘유신의 추억’이 회자되고 있다. 12월12일부터는 양승조 의원의 지역구인 충남 천안을 시작으로 전국 17개 시·도당에서 ‘민주당 대선 불복 망언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반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이 참모진과 새누리당에 의해 증폭되면서 ‘전체주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양새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북한이 웃긴 이유는, 다른 논의는 항상 자기들 마음대로 파기하고 일정 지연시키고, 알맹이 빼놓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모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매우 빠르고 강력하게 대응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북한만의 이야기인지는 미지수”(12월10일 페이스북)라고 말했다. “155명 의원이 만장일치로 그걸 신속하게 제출했는데,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의원이 없었다면 그것도 이상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의원들이 있었는데 그걸 표출하지 못했다면 그건 더 이상하다”(12월12일 라디오 인터뷰)는 것이다.
프레임의 확대 그리고 억압의 내면화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대선 불복 프레임’은 ‘공격 대상’에 따라 다른 프레임과 결합돼 변주된다. 천주교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의 11월22일 박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는 ‘종북구현사제단’이라는 종북 프레임과 결합시켰다. 대선 불복 세력은 종북 세력이 된다. 야당 의원들의 사퇴 요구와 비판에는 ‘정쟁’이라는 정치 혐오 프레임을 동원했다. 대선 불복 세력은 과거로 발목 잡는 정쟁 세력이 된다. 청와대는 이런 인식 아래 사제단에 “조국이 어디냐”고, 야당에 “어느 나라 국회의원이냐”고 따지고 있다.
이렇게 ‘대선 불복 프레임’이 야당과 국민에게 ‘공포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억압의 내면화’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표현의 자유, 정치적 소신을 말할 권리가 질식당하는 데 대한 우려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장 의원의 성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선 불복 프레임’이 예전만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초강경 대응에 나선 것은 그만큼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다. 사제단의 사퇴 요구와 장하나 의원의 성명 발표 사이에 여권 입장에선 악재가 잇따랐다. 사제단의 사퇴 요구는 개신교·불교·원불교·천도교 등 이웃 종교의 대통령 퇴진 요구 또는 시국선언으로 확대됐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설과 관련한 초등생의 가족관계등록부 불법 유출에 청와대 조오영 행정관이 연루된 사실도 밝혀졌다(12월2일). 청와대는 “개인적 일탈”이라고 주장했지만, 조 행정관이 김아무개 안전행정부 국장을 거짓으로 지목하는 등 ‘윗선’을 숨기고 있다는 수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윗선’이 청와대 관련자로 드러날 경우 파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고, 그렇지 않다 해도 김 국장을 지목한 청와대의 조사 결과는 꼬리 자르기와 덮어씌우기 시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국정원개혁특위도 여야 합의로 꾸려졌다(12월3일). 야당이 위원장을 맡았고(정세균 민주당 의원), 특위로서는 처음으로 입법권을 갖고 있다. 국정원특위와 예결산특위가 두 바퀴로 함께 굴러가게 되면서 여당이 국정원에 대한 ‘대수술’을 막무가내로 거부하기 쉽지 않다. 애초 5만2천 건에서 121만여 건으로 늘어났던 국정원의 대선 개입 트위터 글이 실제로 2200만여 건에 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12월5일). 윤희웅 민정치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은 “불공정·부정 선거라는 말과 불복이라는 말은 사실상 연계돼 있어 여권이 이를 논리적으로는 방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대선 불복 프레임’을 부각시켜 즉각적이고 강경한 대응으로 ‘불복 여론’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대선 불복’ 주장이 지금은 큰 호응을 받지 못하지만, 다른 악재와 결합할 경우 힘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는 선거대로 문제가 있다는 시각과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시각이 분리돼 나타나고 있다. 대중은 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하느냐는 현실적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답은 박 대통령이 해야다시 프레임 얘기다. 레이코프는 “프레임은 조작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염을 가중하는 법안을 일컬어 ‘깨끗한 하늘 법안’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조작적인 프레임이다. 여론 조작 프레임은 뭔가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거나 폭로되었을 때, 거기에 결백한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대선 불복 프레임’은 부정선거에 승복할 수 없다는 주장에, 공정선거에 불복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조작 프레임이다. 그러므로 “대선에 불복하는 거냐”는 질문에는 답할 필요가 없다.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지난 대선이 공정했다고 생각하는가? 공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박 대통령이 해야 한다. 대책을 마련하는 일도 박 대통령 몫이다. 그것이 사과든 사퇴든, ‘이대로 계속’이든.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