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어딘가 아귀가 들어맞지 않았다. 지난 11월28일 광주 남구에 자리잡은 광주향교 유림회관은 “종북세력을 척결하자”는 구호로 가득 찼다. 일찍이 보수적인 유림들조차 권위주의 시대 군부독재에 희생당한 이들의 진상을 밝혀내라고 요구했던 곳이 광주향교다. 그 유림들의 땅에서마저 다시 ‘반국가행위자 척결’이라는 마녀사냥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반어적이었다.
“하나,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세력을 척결하자. 하나, 우리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주적은 북한이다. 하나, 북방한계선(NLL)은 우리의 생명선, 목숨을 바쳐 사수하자.”
참석자 200여 명이 한목소리로 ‘종북세력 척결’을 결의했다. 대부분 40~60대인 참석자들은 한국자유총연맹 회원들이었다. 자유총연맹의 ‘종북세력 척결 및 바른 역사 알리기 전국투어(시국강연회)’의 광주 지역 행사에서 총구는 지난 11월22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를 진행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사제단) 전주교구를 향해 있었다. 논란의 당사자인 박창신 신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려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다리를 다친 일을 참석자들은 알지 못했다.
‘전향 주사파’ “종북세력 몰락했어요”“(사제단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당선된 박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면서 반국가적이고 국론 분열을 초래하는 망동을 저지르고 있다. (중략) 북한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비열한 이들의 행위는 국가 안보를 위해 순직한 영령, 유가족의 슬픔을 모독하고 국군 장병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심각한 반국가행위다. 이처럼 편향된 태도로 국가 몰락과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우리는 결코 좌시해선 안 될 것이다.” 김명환 자유총연맹 총재의 연설은 ‘종북세력’ 때문에 답답한 회원들의 심정을 속 시원히 뚫어주는 듯했다.
누군가는 사제들의 ‘소행’이 자신의 일처럼 괘씸하다. “어떻게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한테 사퇴하라고 할 수가 있대요? 누가 시켜도 그렇게 못하지.” 강연회에 참석한 임아무개(52)씨는 기자를 만나자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도 정도껏이지. 종북이지, 종북이야.” 김아무개(59)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데 오지 말고 종북세력들이나 취재해요.”
자유총연맹의 ‘종북세력 척결 및 바른 역사 알리기 전국투어’는 지난 11월5일 경기·인천에 이어 충남·대전·울산·경남·강원·서울 등에서 차례로 개최됐다. 지난해 자유경선으로 당선된 김명환 총재의 ‘순시’ 성격을 갖는 한편, 전문 강사의 시국강연, 참가자들의 결의문 낭독을 통해 보수세력 결집 효과를 노린다.
앞서 11월27일에도 자유총연맹은 서울 동작 문화복지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밝혔다. “우리 한국자유총연맹은 북한의 통일전선·전술 마수가 종교계 등 사회 곳곳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내며 종북 좌파세력을 완전히 척결하는 데 더욱 적극적으로 앞장설 것을 굳게 다짐한다.” “북의 대남 선동 전략에 맞춰 우리 사회 내 반정부 여론을 확산하고, 이를 통해 남한 체제를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적을 가려내는 혜안이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자유총연맹은 지난해 ‘애국심 고취사업’ 등의 명목으로 13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았다. 관변단체들 중 가장 많은 금액이다. 안전행정부 특별감사 및 국정감사로 보조금 횡령·유용 사실이 드러났으나, 정부는 2014년도 예산으로 11억2천만원을 다시 배정했다.
‘내부의 적’을 식별하는 눈을 갖기 위해 자유총연맹이 광주에 초대한 연사는 스스로 ‘전향 주사파’라고 소개하는 이광백 자유조선방송 대표였다. 이 대표는 이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RO는 무슨 일을 하고 언제 만들어졌는지” 강의했다. “종북세력은 사실 몰락했습니다. 주사파 학생운동 하는 학생들 요샌 없습니다. 그러니 과대평가하거나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문제는 북의 세습정권이지, 종북세력에 에너지 쏟을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종북세력’ 안팎의 실체를 깊이 알고 있다고 공언하는 연사조차 ‘종북세력’이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 영역이 아님을 조언한 셈이다.
그럼에도 보수단체들은 실체도 분명치 않은 종북세력 척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내보인 인사들에게 ‘종북, 반국가행위, 악의 축’ 등의 말로 극단적 낙인찍기에 거리낌이 없다.
아래로부터의 애국주의지난 11월2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제단 규탄 기자회견을 연 기독교 단체 ‘선민네트워크’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그동안 북한 독재정권을 옹호하며 종북세력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사제복 뒤에 숨어서 북한 3대 세습 독재자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대변함으로써 철저하게 북한 동포들의 인권을 짓밟아왔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종북세력을 두둔하는 행태는 선거 부정보다 더 무서운 반국가 범죄행위”라며 사제단을 “북한 독재의 하수인”으로 규정지었다.
‘아래로부터의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위로부터의 애국주의’로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들 단체는 사제단을 향한 박근혜 대통령의 “묵과하지 않겠다”는 발언 이후 ‘묵과하지 않는 행동’의 행위자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위·아래 ‘애국주의자들’의 신호 교류는 순조로운 듯하다. 보수 성향의 천주교 평신도 모임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은 11월28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사제단의 시국미사를 비난한 뒤 주한 교황청대사관(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박창신 신부의 ‘파문’을 건의하는 고발장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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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동성당과 군산 수송동성당 앞도 보수단체들의 연이은 집회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자유총연맹의 종북 척결 외침은 강연장에서만 울려퍼진 게 아니었다. 한국자유총연맹 군산지회, 재향군인회 군산지부 등이 꾸린 ‘군산시 안보단체협의회’는 지난 11월25일 수송동성당을 찾아 성당 외벽에 달걀을 던지며 집회를 벌였다. 이들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전사자 및 희생자들을 욕보였다. 박창신 신부 및 사제단을 국민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결의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주 남노송동 천주교 전주교구 앞에서도 자유총연맹 회원 등이 모여들어 ‘종북사제단 사형’이라는 팻말을 단 허수아비에 불 지르는 화형식을 치렀다. 정부·여당이 ‘찍으면’ 보수단체가 나서 고소·고발로 존재를 위축시키고 집회로 일상을 가로막는 모양새다.
수송동성당 연이은 집회로 몸살재향군인회 전북지부 관계자는 “상황을 지켜보고 12월 초순께 다시 행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무슨 상황을 어떻게 지켜본다는 것인지는 설명을 아꼈다. 이런 가운데 성당을 드나드는 평신도들마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성당 안에서는 일상적으로 미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성당 밖에서 집회가 이어지니 신도들의 불편이 크죠. 법적으로 대응하고 싶지만 아직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전준형 사제단 전주교구 사무국장)
광주=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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