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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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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사범 신고하여 애국애족 인증받자

국정원 국가보안 관련 신고 건수 2008년 한 해 1천 건에서
2012년 4만 건으로 늘어, 지하철에서는 하루 4500회 ‘좌익사범’ 신고 방송
등록 2013-12-03 15:32 수정 2020-05-03 04:27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 내에 설치된 간첩·좌익사범 등에 대한 신고 전화번호를 알리는 대형 광고판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한겨레 강재훈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 내에 설치된 간첩·좌익사범 등에 대한 신고 전화번호를 알리는 대형 광고판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한겨레 강재훈

올해 봄, 30대 회사원 김정민(가명)씨는 없는 시간을 쪼개 ‘신상털기’에 몰두했다. 국제 해커 집단으로 알려진 ‘어나니머스’가 공개한 북한의 대남 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일명 우민끼) 회원 정보를 인터넷 검색창에 하나하나 넣어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찾았다. ‘사회적으로 빨갛다’ 싶은 글이 남겨진 계정에 대해선 국가정보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간첩·좌익사범으로 신고했다. 누군가와 주고받은 대화로 짐작건대, 계정 주인이 북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빨갛다’의 기준은 모호하다. “‘이건 정부에서 뭔가를 막으려 하는 음모’ ‘빨리 통일이 돼야 한다’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팩트 없이 선동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 그래도 정도가 지나친 경우가 많다.”

“국정원은 멋있는 곳”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이라는 그에게 이런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다. “우리나라는 주적인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간첩이나 무장공비는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즘 누가 총 들고 내려오겠나. 종북세력이 문제다.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뭐든지 싫어하고 반대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하는 건 잘못됐다.”

우민끼 회원을 신고한 뒤, 국정원으로부터 ‘절대시계’를 받았다. 절대시계란, 국정원이 우수 신고자나 일반인에게 기념품으로 지급하는 손목시계로 앞면엔 ‘NIS’, 뒷면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라는 문구가 표시돼 있다. 절대시계를 받은 일부 누리꾼들은 인증 사진을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 등에 올리기도 한다. “매스컴에서 국정원이 멋있는 곳으로 표현되지 않나. 나이가 좀 있으면 거기가 안기부이고 무서운 기관이지만, 10대들에겐 멋진 곳인 거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라고 딱 쓰인 시계를 가지며 좀 으쓱거리는 거다.” 절대시계 외에도 마우스, 손톱깎이 세트, 볼펜 등이 기념품으로 지급된다.

국정원은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접수된 간첩 등 국가안보 관련 신고 건수가 4만7천여 건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기간 동안 신고 건수가 노무현 정부 전체 접수 건의 8배가 넘는다. 이명박 정부 시기 전체 신고 건수의 절반도 앞질렀다. 박근혜 정부의 공안·종북 몰이가 간첩신고 폭증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김씨의 신고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국정원이 2013년 3월호에 제공한 자료를 보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한 해 1천 건 안팎이던 신고 건수는 2009년 3560건을 시작으로 2010년 1만2158건, 2011년 2만9683건, 2012년 4만712건으로 늘어났다.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이들은 2013년 1월부터 9월까지 79명이며 이 가운데 국정원이 검찰에 송치한 수는 15명이다. 입건자 79명 중 기소된 이들은 34명이다. 급격하게 증가한 간첩 신고 건수에 비해 기소자 수는 2008년 27명과 비교해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누리꾼을 향해 국정원 신고로 ‘위협’하는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한 누리꾼은 지난 10월 포털 사이트에 남긴 글에서 “나도 애국보수인데 누가 국정원에 신고를 했다. 신고 처리가 되는지 궁금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임승수(38)씨는 요즘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경희대에서 올해 1학기부터 교양수업 ‘자본주의 똑바로 알기’를 강의해온 그는 지난 9월 학교 대학생위원회로부터 자신이 국정원에 신고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 학교 1학년생으로 알려진 신고자는 교양수업 일부를 개설하는 대학생위원회나 학교 행정실 등에 전자우편을 보내 신고 사실을 알렸다. 반자본주의 및 반미 사상을 갖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에서 간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 임씨를 신고한 이유였다. 그는 2011년 말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 등과 합당할 때 탈당한 이후 당적이 없는 상태다. “신고자가 학교 기관에 떳떳하게 알린 데는 정부기관인 국정원도 ‘말’과 ‘글’만으로 사람을 체포하는데, 자신도 당연히 ‘말’과 ‘글’을 이유로 신고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여긴 듯하다.” 취중에 대통령을 욕했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수사기관에 알려져 처벌까지 받았다는 ‘막걸리 보안법’ 망령이 여전히 떠돌고 있는 것이다.

“좌익사범은 있는데 우익사범은 없나”

국정원이 신고를 독려하는 대상은 사법적 유무죄를 떠나 매우 광범위하다. 직장인 김은주(34·가명)씨는 지난 10월 지하철에서 마음에 걸리는 방송을 들었다. ‘국가정보원은 간첩, 좌익사범, 국제범죄, 테러, 산업스파이, 사이버안보 위협 신고·상담을 위한 111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좌익사범’이란 단어가 께름칙하다. 좌익사범은 있는데 우익사범은 없는 것인지 의구심도 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 지하철 1·2·3·4호선 전동차에서 하루 1300회, 5·6·7·8호선에선 하루 1500회, 국철에선 하루 1700회가량 이런 방송이 나오고 있다. 2000년대 홍보방송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좌익사범’이란 단어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취임 이후인 2010년 2월에 부활했다. ‘111콜센터’ 홈페이지에도 좌익사범 용어가 사용되는데, 좌익사범 의심 유형을 보면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 등을 통해 북한 체제를 찬양하거나 폭력 혁명을 선전·선동하는 불순 내용을 전파하는 사람 △북한이 운영하는 사이트 또는 해외 친북 사이트에 허가 없이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람 △대학 졸업 뒤에도 학생회 활동에 관여해 공산주의 이론이나 주체사상 등 의식화 교육을 지도하는 사람 △반미·반정부 현장 주변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폭력 행사를 유도하는 사람 등도 포함된다.


“신고자가 학교 기관에 떳떳하게 알린 데는 정부기관인 국정원도 ‘말’과 ‘글’만으로 사람을 체포하는데, 자신도 당연히 ‘말’과 ‘글’을 이유로 신고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여긴 듯하다.” -학생으로부터 국정원에 신고된 강사

2010년 신아무개씨는 “좌익사범이란 용어가 국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지하철 방송으로 인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이듬해 6월 인권위는 전원위원회를 열어 해당 진정이 인권침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결정문을 통해 “‘좌익사범’ 용어를 사용한 홍보방송은 사상전향제도와 같이 사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력 행사가 아니며, 이러한 방송을 듣고 시민들이 좌파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법적 처벌을 받을 만하다고 오해할 가능성도 극히 낮다”고 설명했다. 당시 비공개로 진행된 전원위 회의록을 보면 현병철 위원장을 제외한 인권위원 10명 중 4명이 ‘좌익사범’ 용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소수 의견을 통해 “극심한 이념 대립의 영향으로 다양한 사상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용어 사용은 좌파적 가치관을 갖는 것에 대해 범죄시하는 편향적 인식을 줄 우려가 있으므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용어 대신 가치중립적이고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도록 권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논쟁 과정에서 한 위원은 “교통 쪽에 사범이 많이 일어나니까 교통사범이라고 한 것이고, 좌쪽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 중에서 이러한 일(범법)이 생기니까 좌익사범으로 표시한 것이 아니냐”는 상식 밖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소수 의견 “편견 조장 용어 대신 명확한 용어 사용해야”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좌익사범’이라는 애매한 단어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용할 말은 아니다. 특히 범죄인을 집단화하는 경우 매우 좁은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러한 용어 사용은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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