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호통보다 재발방지 약속을

기업인 200명 국감 증인 채택에 재계 노골적 불만…
호통에 그치지 말고 불법·편법 따져 재발 방지 약속 받는 기회 돼야
등록 2013-10-23 18:02 수정 2020-05-03 04:27

기업인의 증인 채택 문제로 국정감사가 떠들썩하다. 올해 유독 많은 기업인이 국감 증인석에 앉게 된 탓이다. 지금까지 정무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등 주요 상임위원회의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경제단체인 포함)은 200명 정도다. 역대 가장 많다. 2011년엔 80명, 2012년엔 164명이었다(한국경영자총협회). 현재 추가로 증인 신청 요구를 하고 있는 기업인도 수십 명에 이른다. 경총은 국정감사가 ‘기업감사’로 변질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급변하는 대내외 경제환경 속에서 촌각을 다투어 대응해야 하는 기업 대표들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될 경우 경영에 전념할 수 없어 경쟁력 하락이 우려된다.”(10월7일 보도자료)

이건희·정몽구 증인 채택, 새누리당 거부

그러나 기업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국감장에 불려나오는 건 아니다. 일감 몰아주기, 비정규직 불법파견, 산업재해, 골목상권 침해, 갑의 횡포 등 기업에 따져물어야 할 경제·산업 현안이 산적한 까닭이다. 기업을 책임지고 있는 주요 경영진에게 국회가 이같은 불법·편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국정조사나 청문회를 제외하면 국감이 거의 유일하다. 기업이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불법을 저지르거나 꼼수를 부릴수록 그 경영진이 국감 증인 명단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김충호 현대자동차 사장이 지난 10월15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김충호 현대자동차 사장이 지난 10월15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김충호 현대자동차 사장(국내 소비자 역차별), 배영호 배상면주가 대표(제품 밀어내기), 백남육 삼성전자 부사장(조달청 입찰가격 담합 의혹), 박기홍 포스코 사장(공정거래협약 이행자료 허위 제출), 도성환 홈플러스 대표(대형마트의 불공정행위), 구자은 LS전선 대표(원전 부품 인증 비리),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불산 누출 사고) 등이 여야 합의로 증인이 된 데는 모두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물의를 일으킨 기업의 모든 경영진이 국감에서 민망함과 수모를 감당하는 것도 아니다.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은 대부분 전문경영인이다. 재벌 총수 일가나 거물급 인사는 거의 열외다. 환노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지난 10월17일 국감에서 최근 공개된 삼성의 노조 와해 전략 문건과 관련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대법원에서도 판결이 난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자고 요구했다가 새누리당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새누리당은 “증인 채택은 최소화돼야 한다” “노사 문제는 기업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전날 기재위에서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일감 몰아주기)과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경제민주화 정책 반대) 등에 대한 증인 채택이 새누리당의 반대로 불발됐다.

지금까지 증인석에 선 재벌 총수는 동양 사태에 책임이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정도다. 그는 10월18일 국감에서 “사재를 다 내놓기로 했다”며 사과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11월1일 증인 출석 명령을 받았다. 골목상권을 침해하는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개선 의지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신 회장과 정 부회장은 지난해 국감 때 증인 출석을 거부했다가 벌금형까지 선고받은 터라 이번에도 불출석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경제가 한 명으로 돌아가는 거 아냐

최정표 건국대 교수(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의 지적이다. “재벌 총수나 경영진이 하루 국감에 나오면 경제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데, 그룹과 경제가 한 명의 힘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현안이 있다면 국회가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다만 무더기로 불러서 한 명당 1~2분 호통을 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최고경영진에게 불법·편법 행위를 따져묻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낼 수 있도록 국회의원이 준비도 제대로 하고 기업인에 답변 시간도 충분히 줘야 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