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소송이 줄을 잇는다고 호들갑이다. 하지만 내가 매일 접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용하다. 그들이 내게 통상임금 관련상담이나 문의를 해온 적도 없다. 정기상여금이 없는 탓일까?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상여금을 받는 비정규직도 꽤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최저임금 오르면 상여금 또 깎이겠네”
“최저임금이 내년에 350원 오른다고 한다. 예전에 상여금 600% 받던 것이, 그동안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제 430%까지 떨어졌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또 상여금을 삭감할 게 뻔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접한 어느 비정규직의 목소리다. 이 글을 읽고서 “어째 이런 일이!”라고 반응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분노는 참으로 반갑지만, 비정규직의 삶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여금이란 걸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의 다수가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비정규직에게 상여금이란 최저임금 인상 때마다 깎이는 임금이다. 법정 최저임금이 올라도 이들의 임금은 그대로다. 사장님들은 상여금을 줄이고 기본급을 올려 법 위반을 피한다.
노동자들이 통상임금 줄소송을 걸면 사장님들이 부담할 돈이 38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엄살도 이 정도면 사기꾼 수준이다. 극심한 고용 불안을 겪고 있는 비정규직이 소송을 걸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나마 있던 상여금을 모조리 없애는 것은 기본이고, 해고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돈 많은 사장님들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대법원까지 가자고 할 게 틀림없다.
대한민국 비정규직의 평균 근속연수는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줄잡아 3~5년은 걸릴 대법원의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버틸 재간이 없다. 다시 말해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노동자는, 기나긴 소송 기간과 비용을 견뎌낼 수 있는 이들뿐이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비정규직조차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새벽 5시30분 출근, 오후 4시30분 퇴근. 이렇게 한 달 일하고 받는 돈 117만2천원. 회사 주장에 따르면 117만2천원 안에는 상여금 400%와 식대 8만원도 포함돼 있단다.” 영세기업의 얘기가 아니다. 거대 공기업 한국전력공사의 서울 삼성동 본사 건물에서 청소하는 노동자들이 얼마 전까지 겪어온 현실이다. 회사 설명대로라면 상여금을 빼고 기본시급은 3820원 수준이다. 법정 최저시급(4860원)보다 1천원이나 적다.
최저임금법 위반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사장님들은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 대법원 판결대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계산하면 통상시급이 5200원대가 되어 법 위반이 아니라고 말이다(현행 최저임금은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농담이 아니다. 통상임금 논란이 벌어지자, 상당수 사업장에서 상여금과 제수당을 뭉뚱그려 월급에 다 포함돼 있다는 식의 ‘포괄임금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소송을 건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이 나야 체불임금이라도 받겠지만, 소송을 걸지도 않은 비정규직은 당장 임금 삭감 위기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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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리무진의 대법원 판결로 정규직 노동자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노조를 갖지 못한 밑바닥 노동자들은 사장에게 더 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박근혜 정부가 노린 지점이 바로 이거다. 통상임금 소송이라도 걸 수 있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를 갈라치는 것! 대니얼 애커슨 제너럴모터스(GM) 회장 앞에서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약속한 발언이 삼권분립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난이 일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다. 통상임금 소송을 걸 수 있는 노동자층이 소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빈곤층·저소득층에는 복지를 얘기하며 적극적인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내년 법정 최저임금은 전년 대비 350원 오른 시급 5210원으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의 평균인상률(5%)을 상회하는 7.2% 인상이 결정됐다. 물론 보여주기·생색내기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박근혜 정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려운 경제 여건으로 인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빈곤층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개선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통상임금 문제는,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논의합시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이제는 양보를 고민해야만 국민 대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목표는 단순히 통상임금 문제 해결이 아니다. 한국의 임금체계가 너무 복잡하다며 내친김에 아예 임금제도를 뜯어고치자고 나섰다. 최근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임금체계 전반을 성과급·직무급 연봉제로 전환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임금의 경우 이미 최저임금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되거나, 특수고용직처럼 100% 성과급제가 도입돼 있어서 더 뜯어먹을 방법이 없다. 즉,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이 노리는 것은 정규직 노동자다. ‘통상임금 논란’은 정규직 임금체계를 공격하기 위한 소재로 선택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처지에서는 압도적 다수의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와 정규직을 분열시킬 수 있는 참으로 좋은 소재 아닌가.
판결 강조할수록 고립되는 정규직금아리무진 판결만 믿고 “떼인 돈 받아낼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면 이제 그 꿈을 깨야 한다. 대법원 판결을 강조할수록 고립되는 쪽은 정부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다. 설사 재판을 통해 체불임금을 받아내더라도 저임금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는 더 커진다. 이 격차는 다시 부메랑이 돼 정규직 고립화를 위한 정권과 자본의 공격 수단으로 활용되고, 끝내 성과급·직무급 연봉제 도입까지 밀릴지 모른다.
그렇다면 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통상임금 논란을 꺼내든 정권의 의도가 ‘노동자 갈라치기’에 있다면, 정반대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저임금 미조직층과의 연대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직무급제? 동일한 직무에는 같은 임금을 주자는 것 아닌가! 그럼 먼저 우리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임금을 정규직과 동일하게 지급하라!” “올해 임금 인상분의 10%를 저임금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기금으로 적립하자!” “내년에는 정규직이 앞장서서 최저임금 대폭 인상투쟁에 나서자!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는 총파업 한번 해보자!”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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