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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야경. 한겨레 정용일 기자
문진목(54)씨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충격 때문인지 정신이 한데 모이지 않았다. 불타고 있는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장갑을 낀 손으로 정신없이 불을 껐다. 펑 하는 폭발음을 들은 뒤부터 기억이 없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10분이었다. 의식을 잃고 20분쯤 흐른 뒤였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30m 높이의 철골 구조물 위였다. 그는 저녁 8시50분께까지 여수국가산업단지 대림산업 2공장 폴리에틸렌 저장탑 꼭대기에서 발판을 설치하고 있었다. 동료 7명과 함께였다.
“대광아, 이 형님 얼굴 다 타버렸냐”무엇인가 터진 것 같았다. 폭발은 그가 발 딛고 선 저장탑의 아래쪽(높이 7.9m)에서 시작된 듯했다. 그곳에선 저장탑 내부 검사를 위한 맨홀(구멍)을 만드느라 용접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중만아! 종태야! 재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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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아래쪽에선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계속 울렸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살아야 했다. 다급하게 119 버튼을 2차례 눌렀다. 전화기 너머 소리는 아득했다. 소방차가 출동했다는 답만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봤다. 저장탑의 찬란한 은빛을 시커먼 그을음이 삼킨 뒤였다. 서인철(47)씨가 살아 있었다. 김경춘(52)씨도 중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었다. 대림산업의 하청업체 유한기술 계약직인 그는 현장 안전관리 일을 하고 있었다.
‘계호가 없다.’
분명 두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던 조계호(38·사망)씨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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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탑 아래엔 여전히 불길이 거셌다. 문진목·서인철·김경춘씨 세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한곳에 모였다. 일단 땅을 밟아야 했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추위와 함께 공포가 밀려들었다. 살려달라며 악다구니를 썼다. 불탄 장갑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50여 분이 지났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탑승설비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동료 비계공들이 타고 있었다. 나대광(38)씨 눈에 화염에 그을린 문진목씨의 얼굴이 들어왔다. 누워 있는 경춘 형님 너머로 진목 형님이 그에게 물었다.
“대광아, 이 형님 얼굴 다 타버렸냐.”
3월14일은 대림산업이 ‘셧다운’(공장가동을 완전히 멈추는 것)과 대정비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이었다. 대정비 기간은 여수산단 주변 노동자들에겐 ‘대목’이다. 산단 기업들은 1년에 한 번거의 동시에 공장을 멈추고 시설 보수작업에 들어간다. 인력 수요가 많아지는 반면, 사고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도급이 기승을 부리는 때이기도 하다.
956호 대림산업 폭발사고 당시 저장탑과 상부 비계공들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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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은 유한기술에 저장탑 보수일을 하청했다. 유한기술은 다시 현장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1개월짜리 단기 근로계약을 맺었다. 대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2만여 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청과 재하청을 무한 반복하는 여수산단에 삶을 의탁하고 있다. 1년 내내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20%에 불과하다. 60% 정도가 5~6개월 노동의 대가로 1년을 버티고 있다(정기명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여수지부 비계분회장). ‘모작’(‘재하도급’을 일컫는 은어)이 거듭되고, 기업들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공기를 단축한다. 노동자들은 야간작업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악순환이다. 종종 구두로도 하청-재하청이 이뤄진다. 그들 중에 백중만(42·사망) 반장이 이끄는 비계팀(모두 15명)과 김정수(39) 반장이 이끄는 배관팀도 있었다. 대림의 하청업체인 유한기술과 근로계약을 맺고 작업 현장에 투입됐다. 비계팀원들은 누구에게도 저장탑 내부 물질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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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일인 3월14일, 비계반 일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이재석(41)씨 등 7명은 아침 6시30분에 출근해 새 저장탑 설치 작업을 했다. 폭발 저장탑 위 발판 설치 작업은 아침 8시부터 시작됐다. 이날 작업은 밤 10시까지로 예정돼 있었다. 총반장이자 배관반장인 김정수씨는 비계반장 백중만씨와 10여 년을 함께 일했다. 배관반은 아침 7시30분께 출근했다. 8시가 지나자 대림 직원이 화기 작업허가서를 들고 왔다. 배관반원들은 각자 허가서에 사인을 하고 8시20분께 작업 현장에 투입됐다. 김정수씨는 그날 폭발한 저장탑 맨홀(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내부 상황을 살폈다. 물청소로 내부를 비웠던 지난해와는 저장탑 상태가 달랐다. 내부에 잔여 물질이 있을 경우 폭발 위험이 높아 그는 신경이 쓰였다.
“이번엔 물청소가 안 됐네요.”
대림 직원은 “깨끗하게 비웠다”고 답했다. 작업팀은 대림의 말을 믿고 일을 시작했다. 대림 생산팀과 안전팀 직원들이 현장을 지키며 작업을 지시했다.
저녁 8시부터 8시30분까지는 휴식시간이었다. 한숨 돌린 뒤 8시35분께 김정수씨는 맨홀 용접 장소를 점검했다. 대림 직원이 작업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조심해서 하라’고 지시한 뒤 8시40분께 저장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다음날(3월15일) 예정된 새 저장탑 설치에 대해 백 반장과 상의했다.
“형님, 안전벨트 튼튼히 매고 일해요.”
최근 여수산단 내 제일모직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추락·사망 사고를 상기시켰다. 백중만씨는 웃으면서 답했다.
“걱정 마. 공단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김경춘씨도 거들었다.
“모두 일 잘하는 친구들 아닌가. 자네나 조심해.”
김정수씨는 그들을 뒤로하고 건너편 저장탑으로 넘어가는 발판 위에 올랐다. 백중만씨의 웃는 얼굴이 시신경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때다. 뒤에서 우르릉쾅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는 순간 파란 불꽃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한 ‘화마’였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상체를 숙였다. 정신을 차리자 장갑과 옷에 불이 붙어 있었다. 급하게 불을 끈 뒤 앞으로 뛰었다.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엄청났다. 뒤를 돌아봤을 땐 자신을 건네준 발판은 날아가고 없었다. 9명이 있던 저장탑 꼭대기에서 그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2명뿐이었다.
지난 3월19일 대림산업 폭발사고 희생자 합동 영결식이 엄수된 전남 여수의 장례식장에서 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비계공 박석희(36)씨는 김정수씨가 몸을 피한 맞은편 저장탑 주변에 있었다. 그와 함께 발판 해체 작업 중이던 동료들은 무사했다. 2차 폭발이 있던 4~5초 동안 그에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와 동료들을 찾는 크레인 기사의 무전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고막이 터지는 것 같았다. 크레인 기사는 그들의 무응답을 사망으로 받아들였다.
꼭꼭 싸맨 안전벨트 탓에 불길 못 피해사람들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 박석희씨 눈앞에 ‘지옥’이 펼쳐졌다. 저장탑 아래 설치해둔 그물망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재득이 형님이었다. 20분 전쯤 서재득(54·사망)씨는 “작업 끝나고 소주 한잔하자”며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문진목씨 눈앞에서 사라진 조계호씨는 사고 지점에서 약 40m 떨어진 땅 위에서 발견됐다. 동료들은 급한 대로 그의 주검을 비계 발판에 뉘어 날랐다. 계호씨의 동생 조계춘(34)씨는 사고 당일 전남 순천에 있었다. 폭발 2시간여 전인 저녁 7시께 그는 형과 전화 통화를 했다. 모처럼 동생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형에게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 야근이야.” 계춘씨가 들은 형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계호씨는 백중만 비계팀의 새 멤버였다. 다른 팀원이 펑크를 내면서 그에게 자리가 생겼다. 지난해 공사 현장에서 만난 팀원의 소개로 사고 전날인 3월13일부터 현장에 출근했다. 계호씨는 동생이 다니던 회사의 협력업체에서 비계공으로 근무하다 구조조정으로 일을 그만뒀다. 공사 현장으로 오기 전 간판 제작·설치 일을 10년 넘게 했다. 횟감을 실어나르는 활어차 운전도 했다. 가족과 떨어져 객지로 떠돌며 힘들어하는 형에게 동생은 건설 현장일을 소개했다. 사고 당일 계호씨는 자기 일을 끝낸 뒤 형님들 일을 돕겠다며 저장탑에 올라갔다가 생을 달리했다.
이승필(41·사망)씨도 당일 아침 새로 설치한 저장탑 인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추락을 막으려 몸을 감싼 안전벨트 탓에 불길을 피하지 못한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북한 이탈주민 이주영(46·가명)씨는 사고 당시 현장 주변에서 화재감시 일을 하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불길을 보고 그는 오줌을 지렸다. 그의 옆으로 유리 조각과 공구가 날아다녔다. “밖으로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는데도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10여 년 전 어린아이를 둘러업고 북한을 떠나올 때만큼이나 요동쳤다.
비계(飛階·건설 현장에서 쓰는 가설 발판 구조)는 건설 현장의 ‘최전선’이다. 비계공들은 하늘에 길을 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놓는 철골 발판은 현장 노동자들의 작업 공간이자, 이동 통로이며, 모든 공사를 가능하게 하는 ‘실핏줄’이다. 비계공들이 사고를 당할 위험이 특히 높은 이유다.
백중만씨는 12년간 비계일을 하며 차근차근 기능을 다졌다. 조력공·중기공·기능공을 거쳐 5~6년 전부터 반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팀원은 그가 찾을 때 언제나 달려올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 중심으로 구성됐다. 백구만(38·중상)씨는 그의 친동생이다. 14년 전 동생과 1년간 PC방을 운영했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중만씨는 수줍고 말 없는 구만씨와 건설 현장일을 배워나갔다. 조카 이철희(40)씨도 대구에서 내려와 10년 전부터 일에 합류했다. 이재석·이승필·백중만, 세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승필씨는 대학 졸업 뒤 대기업에 입사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정리해고까지 버텨냈던 그도 8년 전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사무직이었던 그가 생활을 위해 망치를 들었다.
“그래도 실력 많이 늘었는디. 이제 겨우 먹고살 만허고 자리잡아가는 시기였는디. 시간을 되돌리면 좋겠구만 그럴 수도 없는 기고….”
956호 비계팀 15명 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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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했던 이종사촌 동생 김광진(40)씨가 한숨을 쉬었다. 통신사로부터 일감을 받아 기지국을 설치하던 그도 공사 물량이 줄어들자 건설 현장일에 나섰다. 이재석씨는 운영하던 사업체가 어려워지자 5년 전부터 공사장을 찾았다. 현장엔 그처럼 사업에 실패하고 오는 사람이 많았다. 비계반 15명은 서로에게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다. 일은 고정적이지 못했다. 대부분 여수나 인근 지역 출신이지만 일감을 찾아 충남 서산이나 울산 석유화학단지로도 일을 나갔다.
가족·친구와 구두계약 뒤 현장에 투입되는 작업 형태는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내려가는 ‘최말단 고용’의 상징적 단면이다. 현장 건설노동자들이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안전망과 거리가 먼 이유이기도하다.
사고 뒤 며칠이 지난 뒤였다. 광주 굿모닝병원에 입원 중인 문진목씨 꿈에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 서재득·김종태씨가 다녀갔다. 알고 지낸 지 8년이 넘은 이들은 일이 끝나면 늘 소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꿈에서 본 친구들은 평소처럼 소주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진목씨 눈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아침 종태씨와 신발을 바꿔 신었다. 자신의 비싼 신발을 내주고 친구의 싼 신발에 발을 넣었다. “친구가 내 신발을 신고 마지막 길을 갔다”며 그는 고개를 떨궜다. 재득씨는 여수에서 홀로 살았다. 명절만 되면 두 배는 외로워하던 친구에게 진목씨는 음식을 싸다 주곤 했다.
숨진 계약직 노동자들의 품속 어디에도 신분증은 없었다. 대림산업 공장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경비실에 맡겨야 했다. 안전 규칙이라며 휴대전화 소지도 금지당했다. 주검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살아남은 동료들의 몫이 돼버렸다.
사고 다음날 새벽 2시께, 비계공 7명은 여수 시내 병원을 헤매고 다녔다. 나대광씨에게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주검 주인을 알려준 건 목걸이였다. 생전에 중만이 형이 항상 자랑하던 목걸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고 이후 박선근(34)씨는 목걸이를 하기 시작했다.
3월15일 새벽 5시가 돼서야 비계공들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꿈같은 하루였다. 살짝 잠이 든 나대광씨 전화기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아침 뉴스를 보고 놀란 지인들이 걸어온 전화였다. “대광아, 다 죽어부렀냐?” 누군가의 말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멈추질 않았다.
외상이 없는 생존자 7명도 깊은 내상을 입었다. 여수에 위치한 여천전남병원에서 만난 생존자들은 휴대전화를 눈에서 내내 떼지 못했다. 무엇인가 몰두할 것을 찾고 있었다. 병원을 찾는 방문자들에게 애써 농을 건네기도 했다.
하루라도 놀면 안 돼 비슷한 현장으로여수산단 폭발사고로 화상을 입고 광주 굿모닝병원에 입원 중인 비계공 문진목씨가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석희씨의 아내 김은화(30·가명)씨는 사고 뒤 남편이 우는 걸 처음 봤다고 했다. 빚 독촉에 시달려도 되레 아내를 안심시키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눈은 퀭했다. 여전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다시 공사 현장에 돌아가야 한다. 그는 건설 하도급 업체를 운영하다 공사 대금을 못 받고 빚을 졌다.
“하루라도 놀면 안 되는 상황이라….”
6살과 4살 두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고 빚을 갚으려면 적잖은 돈이 필요하다. 다시 현장에 나가겠다는 남편을 지켜보는 아내도 마음이 아프다.
“잠이 안 와서 수면제를 먹어요. 수면제를 먹고도 잠이 깬다면서 술을 먹어요. 얼마나 괴로울까 싶어서 말리지를 못해요. 지금도 (사고 당시를) 생각하면 울컥울컥한다는데…. 석유화학단지 현장이 비슷해요. 남편을 공사 현장에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너무 속상해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아요.”
아내는 남편 몰래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있다. 이재석씨도 곧 건설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어요. 살아 있는 것도 미안하고…. 늦둥이를 하나 봤는데 이제 돌이 지났어요. 그래도 저놈이 시집갈 때까지는 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겨내야죠.”
7명의 비계공은 4월5일 퇴원했다. 그들은 먼저 광주와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료들부터 만나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문진목씨는 높은 곳을 쳐다보기가 힘들다. 엘리베이터 앞에만 서 있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사고 뒤 이명 현상이 심해졌다.
1967년 조성된 여수산단 주변에선 이제 마을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환경오염과 안전사고를 두려워하며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끊임없이 불안과 동거해야 하는 이곳에서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지탱되고 있다.
여수·광주=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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