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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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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죽고 새로운 것은 도착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한국 정치의 현재를 묻다… 안철수 신당 지지도가 민주당보다 앞서지만 기대와 희망은 물음표로, 힘겨루기와는 별도로 지역에서 새 정치의 내용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등록 2013-03-23 06:23 수정 2020-05-03 04:27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877015">그저 삭이고 있었다. 실망할 동력조차 소진해버렸다고 했다. 지역의 한 원로 시인은 ‘한 줌 흙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한다고 해도, 한 줌의 흙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괴롭고 고단한 싸움이라는 걸 시인도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이 어려운 건 강한 적보다, 외로움과 고립감 때문이라고 했다. 60대 의료인은 고백했다. “1980년 5월에는 총칼과 탱크에 포위된 섬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정치적 섬이 돼버렸다. 그래도 부끄럼 없는 선택이었으니, 섬사람으로 후회는 없다.”
나날이 커지는 ‘60년 야당’에 대한 염증 속에서, 지역민의 상당수는 한 거물급정치 신인의 복귀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새 정치’를 역설해온 그의 귀환이 낡고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담합 구조를 일거에 뒤흔들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열기도 예전만 못해 보였다. 운명의 날, 도피하듯 홀연히 이국으로 떠난 그에게서 민초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품 너른 지도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이 역시 적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막장에서 돌아서는 것도 하나의 출구라는 돌연한 깨달음 속에서, 작지만 새로운 희망을 일구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민주·인권의 도시라는 걸 입으로만 떠들어왔을 뿐, 이 지역이 그동안 보여준 게 뭔가. 민주·진보라는 가치를 공동체의 삶에 뿌리내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 정권 교체라는 큰 목표에 모든 것을 걸 게 아니라, 지역의 ‘작은 민주주의’부터 실천에 옮겨보자는 제안이었다. 소수자를 품고, 약자를 돌보고, 다름에 관대한 따뜻한 공동체를 ‘고립된 섬’에서 먼저 시작해보자는 것. 그 소박함은 운주사 천불천탑 전설에 깃든 옛 민초들의 좌절된 염원을 자연스레 상기시켰다. “좀처럼 옮겨오지 않는 서울, 바뀌지 않는 중심을 기다리기에 지쳐, 이제 아낙들은 미륵이의 코를 떼어 갉아먹으며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기를 소원했다.”(임동확 ‘운주사 가는 길 3’의 일부)
지난 3월12일부터 이틀간 광주를 찾아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부터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보일 듯 말 듯 길은 여전히 가물거렸다. _편집자
</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무등산은 말이 없었다. 열망이 컸던 만큼 좌절의 깊이는 가늠하기 조차 어려웠다.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득표율은 광주 92%, 전남 89.3%, 전북 86.3%(방송 3사 출구조사 기준)였다. 호남은 모든 것을 걸고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졌다. 민주당에 대한 실망을 넘어선 분노가 팽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지난 3월12일 광주 동구 충장로를 행인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2012년 대선판을 달궜던 열정은 이제 과거형이 됐고,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는 아직 형태를 채 갖추지 못했다. 광주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겨레 김명진 기자

지난 3월12일 광주 동구 충장로를 행인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2012년 대선판을 달궜던 열정은 이제 과거형이 됐고,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는 아직 형태를 채 갖추지 못했다. 광주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겨레 김명진 기자

<font size="3"><font color="#C21A8D">10년 전 망월동에 온 박근혜</font></font>

윤장현 전 YMCA전국연맹 이사장은 “민주당은 대선 과정에서, 그리고 패배 이후 지역민들이 아프고 힘들어한 만큼의 진정성과 절박함도 보여주지 못했다. 위기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지리멸렬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의 민주당과 ‘차떼기’ 파문, 탄핵 정국 이후 전면에 나섰던 ‘정치인 박근혜’를 비교했다. “‘차떼기 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을 박근혜 당시 대표가 접수한 뒤 천막당사를 차리고 의원들을 데리고 광주에 와서 망월동을 참배했다. 그렇게 10년을 준비한 박근혜는 대통령이 됐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어떤가. 책임 공방이나 벌이는 행태가 이 지역 사람들을 더 속상하고 힘들게 한다. 대선이야 어쨌든, 지역 유권자야 아프건 말건 자신들이 국회의원 신분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으니 그렇다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광주가 고향인 민주당의 한 당직자(34)는 “여의도 정치판은 대선 패배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는데 호남에선 민주당 때문이라고 본다. 수권 능력이 없음을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라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민주당은 해당 수순을 밟을지도 모르겠다”고까지 했다.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호남 정치의 위기 징후는 대체로 일치한다. 민주 대 반민주 패러다임의 약화에 따른 정치 구도의 변화, 쇄신과 혁신이 실종된 민주당 독점 체제에 대한 피로감, 중량감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지속적인 인구 감소로 인한 득표력 약화 등이 그 징후다. 오승용 전남대 교수의 진단은 더 근본적인 지점을 향했다. 지난 2월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이낙연 민주당 의원실 주최로 열린 ‘한국 정치에서 호남의 역할’ 토론회에서 오 교수는 “호남의 진정한 정치적 영향력은 리더십도 득표율도 아닌, 의제 설정 능력이었다. 다른 지역이 생각하지 못하고 결단하지도 못한 의제를 먼저 생각하고 결단했던 것이 진정한 호남의 영향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랬다. 상대적으로 기반이 취약했던 ‘정치인 김대중’을 지켜냈고, 끝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민주당 후보로 키운 동력은 첫 경선 지역인 광주에서의 승리였다. 탄핵 정국 직후 치른 총선에선 광주의 모든 지역구 의석을 민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이 차지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호남의 열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오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호남의 이런 민첩한 모습은 더 이상 관찰하기 힘들다”며 “호남이 보여줬던 의제 설정 능력의 순도가 감소한 것이 가장 위험한 징후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광주에서 만난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진단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고, 지금은 광주의 현역 구의원인 그는 “광주는 20여 년 동안 한국 정치의 생산지였다. 모든 담론과 정치운동의 방향이 광주에서 모색됐다. 하지만 이제 광주는 정치의 소비지가 돼버렸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이 독식하는 구조이긴 하지만 새누리당을 찍을 수는 없으니까 계속 민주당에 몰아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열린우리당과 당시 집권 세력의 하자, 잘못, 패착이 컸다. 그런데 이번 대선과 그 뒤의 흐름을 보면 광주가 정치의 생산지로서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바뀌면, 대한민국 정치가 바뀔 것이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1153A4">광주 사람들은 ‘안철수’라는 아이콘을 언급하며 여전히 ‘~했더라면’ ‘~아니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곤 했다. 그 과정에서 ‘안철수 현상’에 투영된 기대와 희망은 물음표로 바뀌어갔다.</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font size="3"><font color="#C21A8D">‘민주당 자강론’과 ‘안철수 대안론’</font></font>

변화는 과연 가능한가.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누가’(주체)와 ‘어떻게’(경로)다.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귀국과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 선언이 기폭제가 됐다. 안 전 교수 쪽의 시간표는 4월 재보선과 ‘국회의원 안철수’의 탄생→10월 재보선과 맞물린 신당 창당 본격화→2014년 지방선거를 통한 본격적인 세력화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뜻이 맞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과 단체장, 개혁적 성향의 새누리당 인사들을 규합해 제1야당으로 발돋움한다는 게 이른바 ‘안철수발 정계 개편’ 시나리오의 요지다. 반면 민주당 쪽에선 대선 이후에도 “문전옥답이 벼랑 끝 텃밭보다 낫다”(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는 유의 ‘안철수 입당론’이 거론됐다.

실제 야권 전반은 ‘민주당 자강론’과 ‘안철수 대안론’ 사이에서 요동치는 조짐을 보인다. 자강론을 주장하는 쪽에선 민주당의 쇄신과 변화를 먼저 제기한다. 오승용 교수는 “제3당(안철수 신당)의 가능성에 회의적”이라며 “1960년대 이후 한국 야당 정치의 역사를 보면한 번도 제3당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던 적이 없다. 민주당의 쇄신을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목표”라고 했다. 반면 ‘안철수 대안론’을 제기하는 쪽에선 민주당의 쇄신 가능성에 또다시 기대를 거는 것은 공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안철수 캠프에서 민원팀장을 지냈고, 지금도 지역에서 안 전 교수를 돕는 이상갑(45) 변호사는 “호남, 특히 광주에서 안철수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무능도 무능이지만 지역 정치의 타락상이 상상 이상이다. 지역의 기득권 구조와 유착한 지방의원들이 국회의원의 수족처럼 돼버렸다.” 안 전 교수에 대한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 쪽에서도 강고한 ‘민주당 1당 체제’가 호남 정치의 쇠락을 불러왔다는 진단에는 이견이 없었다.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준태(65) 조선대 초빙교수는 “호남의 지방정치를 보면 암담하다. 국회의원, 단체장, 지방의원 할 것 없이 모두 고려시대 호족처럼 돼버렸다”고 짚었다.

‘안철수 신당’의 탄생이 민주당의 쇄신을 위해서라도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민주당은 이대로는 안 된다. 민주당이 좋은 정당으로 바뀌려면 야권에서, 특히 호남에서 경쟁 구도로 가야 한다”며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해야 나중에 통합하더라도 민주당이 달라진다. 지금 이대로, 민주당 스스로 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대선 이후 야권의 질서 재편 국면에서 ‘정치인 안철수’의 존재가 상수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 바닥 민심은 어떨까. 광주에서 자영업을 하는 ㄱ(52)씨는 후보 단일화 직전까지는 안 전 교수를 지지했지만 대선 과정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대선당일에 출국만 하지 않았더라도 2~3%의 차이는 커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문재인이 반드시 돼야 한다는 절박감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이번 귀국 기자회견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은 없더라”라고 말했다. 물론 안 전 교수의 ‘당일 출국’이 대선 결과에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안철수가 후보가 됐다면 이겼을 것’이라는 가정이나 ‘안철수 때문에 졌다’는 탄식 모두 무망하긴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하지만 광주 사람들은 ‘안철수’라는 아이콘을 언급하며 여전히 ‘~했더라면’ ‘~아니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곤 했다. 그 과정에서 ‘안철수 현상’에 투영된 기대와 희망은 물음표로 바뀌어갔다.

2012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진단과 대안의 방향은 달랐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호남의 변화’라는 동일한 과제로 수렴됐다. 윤장현 전 YMCA전국연맹 이사장, 이상갑 변호사, 윤난실 지혜학교 이사장(왼쪽부터).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12년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진단과 대안의 방향은 달랐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호남의 변화’라는 동일한 과제로 수렴됐다. 윤장현 전 YMCA전국연맹 이사장, 이상갑 변호사, 윤난실 지혜학교 이사장(왼쪽부터). 한겨레 김명진 기자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1153A4">“좋은 정부를 향한 소망이 꺾이다보니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을 열지 않는 상태로 보인다. 실망감은 예전 DJ가 대선에서 떨어지고 난 뒤보다 심하다.” -이종범 조선대 교수</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font size="3"><font color="#C21A8D">호남의 신당 지지율 24.7%, 민주당 24.2%</font></font>

광주 지역의 사무관급 공무원 ㄴ(40)씨는 “단일화 이후에 보여준 안철수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안철수가 문재인을 화끈하게 지원했으면 우호적인 여론이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심지어 패배의 원인이30%는 안철수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안 전 교수쪽의 한 인사조차 “그런 실망감이 있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야당의 맹주 자리를 놓고 민주당과의 경쟁이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안 전 교수와 문재인 전 후보 사이에선 ‘단일화 게임’ 비사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공방 자체에 대한 시선이 대체로 싸늘한 건 그 때문이다.

‘안철수 신당’에 대한 지지율이 의외로 낮다는 분석도 많았다. 서정훈(50) 광주NGO센터장은 “의아했다. 대선 국면에 불었던 안철수 바람을 감안하면 40% 이상은 나올 것 같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며 “안철수 거품은 조금 빠진 듯한데 민주당에 대해선 더 이상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종범(60) 조선대 교수도 “좋은 정부를 향한 소망이 꺾이다보니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을열지 않는 상태로 보인다. 실망감은 예전 DJ가 대선에서 떨어지고 난뒤보다 심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안철수 현상’은 호남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호남이 이를 선도한다.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준다. 한국갤럽의3월8일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신당’ 창당을 전제로 한 정당 지지율은 신당이 23%, 민주당이 11%였다. 광주·전라 지역에서의 신당 지지율은 26%로 전국 평균을 앞섰다. 미디어리서치의 3월6일 조사에서도 호남권의 신당 지지율은 34.4%로 24.1%에 그친 민주당을 제쳤다. 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3월2일 조사에선 신당의 호남 지지율이 24.7%로, 민주당(24.2%)을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 지난 2월 초 사회동향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호남인의 정치적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민주당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57.9%가 ‘민주당을 대체할 다른 정당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 결과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당, 계파 갈등과 당권 경쟁의 지리멸렬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다시 ‘안철수’를 불러내고 있다는 얘기다.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4기 의장을 지낸 송갑석(48) 사단법인광주학교 교장은“이제부터 야권은 본격적인 경쟁체제에 돌입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1~3기 전대협 의장 출신은 이인영·오영식 민주당 의원, 임종석 전 의원이다. 4·11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대선에선 문재인 캠프에 합류해 뛰었던 송 교장은 “안철수에 대한 열망 이전에 민주당에 대한 실망과 경고가 더 큰 것 같다”고 전했다. 송 교장에게 ‘광주에서 민주당은 혁파의 대상인가’라고 물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그렇다”고 했다. 특히 송 교장은 “젊은 시절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싸웠던 486 그룹이 이제는 민주당 내에서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돼버렸다”며 “그 점이 너무나 슬프다. 눈물이 날 정도”라고 덧붙였다.

2008년 5월18일 광주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 앞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국민정신계승대회’를 열고 있다(윗쪽). 대선 후 석 달이 지났지만 광주는 아직 패배의 충격과 고립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08년 5월18일 광주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 앞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국민정신계승대회’를 열고 있다(윗쪽). 대선 후 석 달이 지났지만 광주는 아직 패배의 충격과 고립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였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font size="3"><font color="#C21A8D">정치인 안철수, 지도자 안철수</font></font>

야당세가 강한 서울 노원병에 출마를 결심한 대목에서도 시선은 엇갈렸다. 부산으로 달려가 지역주의 프레임과 장렬하게 맞섰던 ‘노무현의 추억’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탓이다. 김준태 교수는 “노원병 출마는 안 하느니만 못한 선택이다. 낮은 곳이 아니라 정상을 오르기 쉬운 중턱에서 시작하겠다는 이야기 아니냐”며 “민중은 소박하다. 민중과 만나 그들을 이끌려면 심플해야 한다. 중요한 건 논리가 아니다. 심플하다는 건 정직하다는 이야기다. 그 정직함이 안철수에게 보이는가. 난 회의적이다”라고 했다.

반면 이상갑 변호사는 “안철수의 길과 노무현의 길은 다르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안철수에게 부산 영도에 출마하라는 논리의 요체는 ‘지역주의 혁파’다. 나도 처음에는 내부에서 영도 출마를 주장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노무현이 이루려 했던 지역주의 혁파나 승부사적 정치 역시 이제는 낡은 의제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화두가 ‘새 정치’라면, 이를 위해 민생 문제에 좀더 천착할 수 있는 노원병에 출마하는 게 맞다고 본다. 과거 ‘정치인 노무현’이 부산에 가서 깨지고 오더라도 그 실패가 다시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었던 건 민주당이라는 정당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철수는 지금 혈혈단신이다. 모험이나 도박을 시도할 여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우선 안 전 교수가 원내 진출에 성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통합진보당 창당 뒤 광주 지역 공동위원장을 지냈고, 4·11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지만 분당 사태 이후 탈당한 윤난실(47)지혜학교 이사장은 이렇게 분석한다. “광주가 아예 민주당을 버렸다든지, 안철수 쪽으로 일방적으로 쏠릴 것이라고 보는 관측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안철수에게는 기회요, 민주당에는 위기인 건 확실해 보인다. 결국 4월·10월 재보선을 거치고 내년 지방선거까지 지켜본 뒤에야 호남을 중심으로 한 야권의 질서 재편 방향이 분명해질 것이다.”

호남에서 안철수 신당의 성공 여부는 결국 양질의 인적 자원을 얼마나 규합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관측이 많다. 안 전 교수 쪽이 스스로에게 ‘새 정치’라는 명분을 부여하고 있지만, 정작 민주당의 ‘1당 독점 체제’에 편입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실패한 인사들 역시 다수 몸담고 있지 않느냐는 게 지역 정치권과 학계를 관통하는 우려의 뼈대다. 지역 시민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한 인사는 “안철수 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행태는 실망스럽다. 안철수에 줄을 대려는 경쟁의 양상이 저급한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결국 ‘정치인 안철수’가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을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 안철수’로 성장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안철수 신당과 민주당 사이의 힘겨루기와는 별도로, 호남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모델을 모색해보자는 움직임도 있다. 윤난실이사장은 “대선에서 보여준 광주 시민과 호남인의 선택이 희망의 신호가 되려면 지역의 정치권과 시민이 새 정치의 내용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한국 정치의 변화를 견인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장현 전이사장은 “민주화의 성지요, 인권의 도시라고 하면서도 그에 값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스스로 반성한다”며 “지역에서부터라도 소외된 약자, 탈북자, 이주노동자, 조손 가정 아이들을 끌어안고 나누며 사는 모습, 작은 민주주의부터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민주주의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font size="3"><font color="#C21A8D">민주주의의 모델하우스 역할을</font></font>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것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다던가. 낡은 것이 죽어가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무엇’인가를 안철수는, 혹은 민주당은 잉태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스스로 변화할 준비가 돼 있는가. 호남의 시선은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인가. 그 경쟁이, 이제 막 시작됐다.

광주=글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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