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에서 3월28일 은행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구제금융 협상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뱅크런)를 막기 위해 지난 3월15일 문을 닫아건 지 13일 만의 일이다.
현금을 찾으려는 이들이 은행 지점마다 기다랗게 줄을 섰지만, 우려했던 혼란은 없었다. 그리스 일간 가 3월29일치에서 전한 현장 분위기도 사뭇 차분해 보인다. 신문은 “일부 은행지점 앞에선 고객보다 취재진이 훨씬 많았다”며 “극히 일부지만, 예금을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고 보도했다. 인출할 수 있는 금액에 제한을 두는 등 아직은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성숙함과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 국민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썼다. 그는 이날 월급 25%를 자진 삭감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font size="3">이미 돈은 빠져나갈 대로 나간 뒤</font>
이른바 ‘트로이카’로 불리는 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유럽연합(EU)이 강력한 자구 노력을 전제로 지난 3월25일 키프로스에 지원하기로 합의한 구제금융은 100억유로(약 14조2441억원)다. ‘자구 노력’에는 유로존 국가 중 처음으로 은행예금에 대한 일종의 ‘직접 과세’(부과금)도 포함됐다.
키프로스 정부와 트로이카는 애초 지난 3월15일 모든 은행예금에 최대 9.9%까지 부과금을 물리기로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협상을 체결했다. 하지만 전 국민적 저항이 거세지자 키프로스 의회가 3월18일 이를 부결시켜 협상을 재개해야 했다. 두 번째 구제금융 협상에서도 전제조건은 빠지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변화’를 준 것뿐이다.
“은행 영업에 대한 제한 조처를 점진적으로 해제해나갈 방침이다. 중앙은행 쪽 전망으론, 모든 제한 조처가 해제되기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오나니스 카술리데스 키프로스 외교장관은 은행 개점일에 맞춰 등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칼리스 사리스 재무장관이 밝힌 ‘제한 조처’의 내용을 살펴보자. 하루 인출 가능한 금액은 300유로까지다. 개인이 한 달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 한도는 5천유로로 정해졌다. 3천유로가 넘는 규모의 금융거래는 금융 당국의 ‘관심 대상’이, 20만유로 이상의 금융거래는 ‘조사 대상’이 된다. 은 3월27일 인터넷판에서 “은행 개점일을 앞두고, 키프로스 국제공항에 ‘해외 여행객이 휴대 가능한 현금은 1천유로이며, 그 이상을 지니고 출국을 시도하면 넘치는 금액을 압수할 방침’이라고 적힌 경고문이 나붙었다”고 전했다.
‘자본 탈출’을 최대한 막아보겠다는 계산이었을 텐데, 키프로스 중앙은행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이미 상당한 돈이 키프로스를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에만 유로존 회원국 예금자들이 예치한 자산 가운데 18%가 빠져나가면서, 키프로스 민간은행권의 여신 규모도 전달에 견줘 2.2% 떨어진 464억유로까지 떨어졌단다.
키프로스 정부가 2011년 12월 발표한 최신 통계를 보면, 키프로스 인구는 83만8천여 명이다. IMF가 밝힌 2012년 국내총생산(GDP) 추정치는 약 186억유로(237억5200만달러)다. 극심한 금융위기에 빠진 인구 10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나라가 여전히 GDP의 2배가 넘는 예금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font size="3">그리스 국채 폭락으로 투자금 거덜</font>
한때 키프로스 금융권의 여신총액은 GDP의 5~8배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유는 자명하다. 키프로스 은행에선 어떤 화폐도 금액에 상관없이 유로화로 환전이 가능했다. 개인정보는 철저히 보호했고, 국제기준에 견줘 높은 이자도 보장됐다. 예금이 밀려드는 건 당연했다. 구제금융 논의 이전까지 키프로스 여신의 절반가량은 ‘도피처’를 찾아온 러시아 신흥 갑부들 돈으로 채워졌다.
막대한 자금으로 흥청이던 키프로스 금융권의 최대 투자처는 ‘형제의 나라’인 그리스 국채였다. 금융위기로 채무불이행 직전까지 내몰린 그리스는 결국 구제금융 지원 대상국으로 전락했다. 그리스 국채는 ‘쓰레기’(정크본드) 취급을 받게 됐다. 키프로스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원인이다. 그런데….
키프로스의 구제금융은 앞선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과 차원이 다른 전제조건이 붙어 있다. 이들 나라의 경우엔 세금 인상과 사회복지 예산 축소 등 긴축재정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키프로스에선 은행권에 부과된 영업제한 조처가 보여주듯 국민의 씀씀이를 트로이카가 직접 통제하는 모양새다. 긴축의 수위가 대폭 높아진 게다.
1차 구제금융안에서처럼 모든 예금에 부과금을 매기는 것은 아니지만, 2차 구제금융안에서도 10만유로 이상 계좌 보유자는 부과금을 내도록 했다. 은 3월25일 ECB 관계자의 말을 따 “(애초 예금액의 9.9%였던) 부과금이 최대 40%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의 신흥 갑부들 예금만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키프로스 국민이 평생을 모아온 노후자금 계좌도 포함된다. 중소기업의 원자재 대금이나 인건비 계좌는 어떨까? 키프로스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세계 금융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실험이 지금 키프로스에서 벌어지고 있다.” 은 3월28일치 니코시아발 기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앞서 리처드 울프 미 매사추세츠주립대 명예교수(경제학)는 3월25일 인터넷 대안매체 에 출연해 “키프로스에 대한 트로이카의 처방은 6년째로 접어든 지구촌 경제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것”이라며 “그간 초긴축재정만을 외쳐온 트로이카가 이번엔 문자 그대로 예금자의 지갑을 직접 털어가는 방식을 택했다”고 꼬집었다.
키프로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해법’의 미래는 어떨까? 은 “벌써부터 그리스 등 앞서 구제금융을 지원받은 국가들도 예금에 대해 부과금을 직접 매기는 방식이 추가로 도입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다국적 거시경제 정책 자문회사인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제임스 호왯 연구원은 “키프로스에 이어 최근 2년 만기 국채 이자율이 치솟고 있는 슬로베니아와 경제규모에 견줘 금융 부문이 지나치게 비대한 몰타와 룩셈부르크도 금융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며 “이들 국가가 구제금융 지원을 받게 되면, ‘키프로스 모델’이 적용될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font size="3">“당신들이 저지른 잘못, 저당 잡힌 우리 미래”</font>
“천천히 죽어가는 심정이다.” 키프로스 은행이 다시 문을 연 3월28일 예금을 찾으려고 은행 앞에서 한참이나 줄을 서 있던 코스타 키콜라우(60)는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은행에 맡긴 돈을 찾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내 손으로 평생을 모은, 내 돈인데.”
앞서 은행 개점일 전날인 3월27일 밤 니코시아 중심가에선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하리스 크리스투라고 자신을 밝힌 키프로스 청년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겁이 나느냐고? 물론 겁난다. 앞으로 모든 게 나빠질 것이란 점을 모두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빠지리란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끝이 어디냐는 점이다.” 이날 시위대가 들고 나온 펼침막에는 ‘당신들이 저지른 잘못, 저당 잡힌 우리들의 미래’라고 적혀 있었단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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