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8일 사이판이 미군 해병대에 떨어졌다. 일본군과 민간인 6만 명이 죽었다. 일부는 섬 북단에 있는 80m 높이의 절벽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 사이판을 손에 넣은 미군은 즉각 B29 발진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 본토가 폭격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전황 악화의 책임을 지고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가 사임했다. 7월18일이었다.
한밑천 잡아 고향에 돌아가나 했는데…
20일 뒤인 8월8일 일본 각의는 ‘반도인 노무자의 이입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본토와 식민지를 막론하고, 모든 물자와 노동력을 마지막 결전을 위한 전력 비축에 쏟아부을 심산이었다. 비행기 부품 및 제철 용광로 제조, 선박 수리 등 특수기능 보유자로 제한돼 있던 징용 대상이 한국인 전체로 확대됐다. 서울(당시 경성부)과 경기도에 살던 박창환·이근목·이병목·정창희·정상화씨가 징용 영장을 받은 것이 그해 8월과 10월 사이였다. 모두가 스무 살 안팎의 한창 나이였다.
이들은 다른 징용자와 함께 열차편으로 부산에 갔다. 그곳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뒤 다시 열차로 갈아타고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이들이 배치된 곳은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 기계 제작소와 조선소. 당시만 해도 열심히 일하면 한밑천 잡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철판을 자르거나 동관을 구부리는 고된 노동이 이들에게 할당됐다. 일과가 끝나면 회사가 마련한 숙소로 돌아가 끼니를 때우고 잠을 잤다. 음식은 절대량이 부족했고, 숙소는 다다미 12장(1장은 180cm×90cm) 크기에 10~12명의 징용자가 기거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외출도 불가능했다. 숙소 주변엔 철조망이 설치되고 근무시간은 물론 휴일에도 헌병과 경찰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주고받는 편지도 검열을 받았다. 주어진 월급은 20~35엔 정도였다.
징용 생활 1년을 맞을 무렵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들은 당시 공장에서 작업 중이었다. 섬광과 함께 철 파편이 날아들어 박창환씨의 턱을 강타했다.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이병목씨의 팔다리엔 유리 조각이 박혔다. 공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8월15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으로 전쟁이 끝났다. 박씨는 9월13일 시모노세키에서 밀항선을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병목씨는 비슷한 시기 하카타에서 미군이 마련한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근목·정창희·정상화씨도 그해 8~10월 하카타와 시모노세키에서 밀항선과 관부연락선 등을 이용해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오니 징용 전 다니던 직장은 문을 닫거나, 용케 망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이 들어와 일하고 있었다. 생계가 막막했다. 그들을 괴롭힌 건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전신 권태감과 호흡곤란, 피부 질환, 시력 감퇴 등에 시달렸다. 정상적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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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한국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6월22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 협정)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10년에 걸쳐 3억달러를 무상으로 제공받고, 2억달러를 차관으로 지원받았다. 이 돈은 1960~70년대 산업화의 밑천이 됐다. 하지만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누구도 일본 정부나 해당 기업으로부터 배상을 받지 못했다.
박씨 등 5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강제징용과 불법행위 등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해달라며 일본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낸 때는 1995년이었다. 하지만 현지 법원은 1999년 3월 청구를 기각했고, 히로시마 고등재판소(2005년)와 일본 최고재판소(2007년)가 이 판결을 확정했다. 일본 법원의 판결 근거는 세 가지였다. 박씨 등이 징용된 것은 합법적인 국민징용령에 기초해 이뤄졌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며, 미쓰비시가 이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는 과정에서 일부 불법행위와 임금 미지급 등이 있었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러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시효가 소멸됐을 뿐 아니라, 더 결정적으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로 정부와 개인 차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가 사라졌다는 것.
일본 1심에서 패소한 직후인 2000년 5월 징용 피해자들은 국내 법원인 부산지법에 소송을 냈다. 하지만 한국 법원도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1·2심재판부 모두 일본 법원의 판결이 적법하다고 본 것이다. 결과를 납득할 수 없던 이들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지난 5월24일 원고와 징용 피해자 단체들의 시선은 상고심이 열린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로 집중됐다. 재판부는 예상과 달리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내에서 소송이 시작된 지 12년 만이었다. 재판부의 판결 요지는 이랬다.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낸 소송을 일본 법원이 기각한 것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전제 아래 내린 판결로, 이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본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일본 판결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위반한다.”
미쓰비시가 배상에 불응하면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서도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조약(1951년)에 근거해 두 나라 간 재정·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협정 체결 과정에서 개인 청구권의 소멸에 관해 양국 정부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나아가 재판부는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된다”고 못박았다.
부산고법에서 배상 금액이 확정되면 박씨 등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배상받을 길이 열린다. 미쓰비시가 배상에 불응하면 한국지사 재산이나 국내 은행 예치금을 가압류하는 등의 방법으로 판결을 집행할 수 있다. 원고 쪽 소송을 대리한 최봉태 변호사는 “사법주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판결이었다. 법치와 정의가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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