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자가 센 거 아니겠습니까?”
김승연(60) 한화그룹 회장이 2010년 12월1일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기 전 “재벌 총수가 왜 유독 잦은 수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이라며 한 말이다. 재벌 총수가 외화 밀반출, 보복 폭행, 조세포탈 따위의 혐의로 5번째 검찰 조사를 자초한 상황을 그는 농담처럼 운명 탓으로 돌렸다. 그의 얼굴엔 검찰 소환에 대한 불쾌함과 무죄 입증에 대한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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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팔자가 정말 세긴 했던지, 김 회장은 결국 지난 8월16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구치소로 직행했다. 앞서 두 번 수감 경험이 있는 그에게도 법정 구속은 처음이었다. 물론 재벌 총수 전체로도 이례적이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함께 구속된 임원에게는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세 번째 구속된 그는 12월14일로 121일째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그에겐 가장 오랜 옥살이다.
그룹 안에서 ‘신’이라 불리던 김 회장이 또다시 구속된 데는 한화증권을 퇴직한 한 직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한화그룹이 차명계좌로 비자금을 관리 중”이라는 그의 제보는 2010년 7월 금융감독원을 통해 검찰로 전해졌다. 한화는 “김 회장이 금융실명제 이전에 갖고 있었는데 실수로 정리가 안 됐다”고 해명했지만 검찰이 차명계좌를 확인하는 과정에 김 회장과 연루된 여러 불법행위가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나왔다. 판결문을 보면 김 회장의 혐의는 피치 못해 저지른 ‘운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 회장은 2005년 자신의 부실 차명회사인 한유통, 웰롭 등의 부실을 떨어내는 과정에 다른 계열사들을 동원해 2883억원의 손실을 줬다. 또 자신의 어머니가 차명으로 소유한 동일석유를 누나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계열사들이 보유한 동일석유 주식을 저가로 팔도록 지시해 계열사에 141억원의 손실을 끼쳤다. 탈세도 빠질 수 없다. 회사 임직원의 이름을 빌린 차명주식을 거래해 양도소득세 15억원을 포탈한 점도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김 회장이 재벌 총수라 하더라도 이런 혐의들이 ‘징역 4년에 벌금 51억원’의 실형에 법정 구속을 하는 데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과거 재벌 총수의 비리 판단을 맡은 재판부들이 1심에서부터 ‘사회적 기여도’와 ‘경제에 미칠 파장’ 등을 운운하며 집행유예를 선고하거나, 1심에서 실형을 선고한뒤 법정 구속을 하지 않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하던 관행에 비추어보면 엄한 판결이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재판장 서경환 부장판사, 배석판사 노서영·김세용)는 “경영 공백이나 경제발전기여 등은 집행유예를 위한 참작 사유가 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심 판결로 한화가 얻은 성과도 있다. 언론의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향후 그룹의 경영권 승계 부담을 덜어주는 판결 내용이 포함된 덕분이다. 검찰은 2005년 김 회장이 (주)한화가 보유한 한화S&C 주식 40만 주(지분 66.67%)를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에게 매도하도록 지시한 것이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장남이 한화S&C 1대 주주가 된 이후 한화S&C가 다른 계열사를 인수하고, 지주회사인 (주)한화의 주식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장남이 그룹의 2대 주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은 애초에 주당 22만9903원의 가치가 있던 한화S&C 주식을 주당 5100원이라는 저가로 장남에게 매각하도록 지시한 김 회장에게 업무상 배임 혐의를 추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런 행위의 목적이 경영권 승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주당 금액이 합리적 범위 내에 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이 최종 확정되면 한화는 앞으로 후계 구도를 완성해가는 과정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된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소장(변호사)은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이뤄진 헐값 주식 거래 등에 대해서 사법부가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목발도 영향 못 끼친 엄격한 재판
김 회장의 변호인단과 검찰은 모두 즉각 항소했다. 한화는 항소심에서 “얼마든지 뒤집기가 가능하다”는 의견이지만 여러 차례의 검찰 조사와 수감 생활에 단련된 김 회장도 이번엔 심경이 복잡한 듯 보인다. 그동안 주요 재벌 총수 가운데 법정 구속까지 된 전례가 드문데다,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재벌개혁을 포함한 경제민주화에 대한 여론이 거세져 앞으로 집행유예나 특별사면 같은 ‘출구전략’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길한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변호인단은 지난 11월13일 방어권 보장과 건강상의 이유로 보석을 신청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석 신청 직전 공판에서 김 회장은 구치소 안에서 넘어져 발목이 다쳤다며 목발을 짚고 법정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김 회장은 2007년 아들을 위한 보복 폭행과 관련한 항소심에선 공판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구속 집행 정지로 한 달간 구치소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과거와 사뭇 다른 엄격한 재판 과정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김 회장은 이번엔 ‘옥중 결재’도 하지 않고 있다. 직전 수감 생활 땐 면회를 온 임직원들을 통해 주요 경영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고 지시도 했다. 한화 관계자의 말이다. “궁금해하실 만한 내용들을 알려드리고 있다. 그러나 (회장님이) 특별히 지시하거나 결정하시는 건 없다. 그래서 신규 사업이나 글로벌 사업이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한화는 ‘오너 구출하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심 때는 ‘김 회장이 경제민주화의 희생양이 아니냐’는 불만이 있어도 속으로 삼켰지만 항소심에선 이런 의견도 적극적으로 제시할 정도다. 김 회장 변호인단은 지난 10월22일 항소심 첫 공판에서 “재벌에 무조건 실형을 내리는 것은 대중선동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벌 총수가 비리 재판을 받을 때마다 제기됐던 ‘경영차질론’도 그룹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한화는 김 회장이 법정 구속된지 나흘 만에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김 회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3조원 규모의 ING생명 동남아 법인 인수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한화그룹이 불리한 상황에 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언론에선 김회장의 경영 공백을 우려하는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며칠 뒤 경제단체장들도 김회장의 법정 구속 등을 두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기업들이 대규모 해외 수주활동을 하고 투자 계획을 진행하는 데 차질이 있을까 우려된다”며 한화에 힘을 실어줬다. 일부 임직원들은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김 회장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를 받아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대선에 희망 건 팔자 센 재벌 총수들
한화는 12월19일 치러지는 대선 결과에도 주목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모두 재벌 총수 비리에 대한 집행유예 방지와 사면 제한 등을 약속하고 있지만 제대로 실현될지는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 있는 탓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구자원 LIG그룹회장,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 등 하나같이 팔자 센 전·현직 재벌총수들 역시 대선에 희망을 걸고 있는 이유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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