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은 지리적 중원이다. 따지고 보면 충청은 늘 승자의 편이었다. 바꿔 말하면 충청이 승자를 만들어냈다는 뜻도 된다. 1992년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후보는 모두 대전과 충남·충북에서 1위를 차지하며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충청의 맹주’였던 김종필 후보와의 DJP 연합을 통해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이로 따돌렸다. 충청권의 표차는 40만8319표였다. 2002년 대선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충청권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덕이다. 당시 대선에서 노 후보는 대전과 충남·충북에서 각각 54.7%, 51.4%, 4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87년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여야를 통틀어 노 후보는 충청권에서 50% 이상을 득표한 유일한 후보이기도 하다.
여야 대선주자들이 선거전 초반 유독 충청권에 공을 들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충청권 전략은 세종시, 친노 불가론, 그리고 ‘충청도의 딸’ 등 세 갈래로 요약된다. 박 후보는 ‘세종시 지킴이’를 자임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무산 위기까지 내몰렸던 세종시 문제에서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동시에 문재인 후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실패한 정권의 책임자”로 낙인하는 한편, 어머니인 고 육영수씨가 충북 옥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며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충청권을 두고 경쟁했던 선진통일당과의 합당,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지지 선언 등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보수대연합’도 새누리당은 호재로 본다.
공식 선거전이 시작된 11월27일 박근혜 후보가 첫 유세지로 택한 대전역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인파가 군집해 있었다. 무대에 오른 박 후보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가져왔다는 흙과 물을 한데 섞는 합토·합수식을 가졌다. 사회자는 “박근혜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면 이 흙과 물로 나무를 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통합의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그러나 유세의 언어는 통합이라기보다는 기존 지지층의 결집과 상대 진영과의 선긋기로 기울었다. 박 후보는 “대한민국은 준비된 미래로 가느냐, 실패한 과거로 되돌아가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야당 후보는 스스로를 폐족이라고 불렀던 실패한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라고 몰아세웠다. “당시 대학 등록금은 역대 최고로 무지막지하게 뛰었고, 부동산도 역대 최고로 폭등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죄한 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남 탓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실패한 정권이 다시 부활해서야 되겠습니까.”
최근 새누리당에 합류한 이인제 공동선대위원장과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도 차례로 무대에 올라 박 후보를 거들었다. 특히 이회창 전 대표는 “(야권의) 단일화는 일종의 야바위 굿판”이라고 규정하며 날을 세웠다. 그는 “문재인 후보는 정치에 처음 나온 순진한 안철수 후보를 슬슬 구슬리다가 결국 벼랑으로 몰아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후보직)
사퇴는 정치적 자살과 같다. 통 큰 형님이라며 순진한 사람을 자살하게 만든 사람을 어떻게 정직하고 신뢰받는 국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대전 대덕구에 사는 김종건(65·남·무직)씨는 “개인택시를 한다고 해도 10년은 택시 운전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물며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데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대학교수를 하다가 출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50대 남성은 “이회창도 이인제도 박근혜 편이니 충청은 박근혜 쪽이라고 보면 되겠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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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후보가 내세우는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궁금해 유세 현장을 찾았다는 편민경(31·여·치기공사)씨는 여전히 안철수 전 후보의 사퇴가 아쉽다고 했다. 그는 안 전 후보를 “후보님”이라고 불렀다. “안철수 후보님이 사퇴하고 나서 투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요. 제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참 많더라고요. 선거에 관심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요.” 비슷한 온도로 ‘안철수의 열정과 좌절’을 지켜본 이들이 흔쾌하게 투표장에 나올 수 있을까. 편씨는 “아마도 문재인 후보를 찍게 될 것 같지만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박 후보는 대전에 이어 세종시·공주·논산·부여·보령 등지를 돌며 충청권 표몰이에 나섰다. 오후 1시40분께 공주 재래시장 인근 유세장에 박 후보가 도착하자 시장 상인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가게 문을 닫고 뛰어나오는 상인들도 보였다. 김승수(45·남·식당 운영)씨는 “나도 박정희 대통령 세대인데 경제발전의 공도 있고, 유신 때 잘못한 점이 있지만 그건 박근혜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며 “요즘에는 주변 어르신들도 이번에는 여성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더라”고 했다.
통닭집을 운영하는 한 50대 여성은 “새누리당은 별로지만 박근혜 후보는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이곳의 바닥 민심에선 갑론을박이 한창이라고 했다. “어제도 손님들 사이에 싸움이 붙었어요. 박근혜가 되니, 문재인이 되니 하면서요. 옆집 사장님도 자기는 문재인이 좋다고 그러대요.” 다음날 박 후보는 다시 홍성·태안·당진·아산·천안을 찾았다. 그만큼 충청권에 전략적으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공식 선거운동 이틀째인 11월28일 충청권을 방문했다. 박 후보의 유세 현장이 중·장년층 유권자 중심이었다면, 문 후보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많아 보였다. 문 후보는 “선거는 정부의 지난 5년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국정이 파탄 났다. 그 책임의 절반은 박근혜 후보에게 있다”고 몰아세웠다.
박 후보에 맞선 문 후보 쪽의 대응 논리는 ‘세종시 원조론’과 ‘이명박 정부 심판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민주당은 신행정수도를 좌초시킨 당사자가 다름 아닌 박근혜 후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문 후보도 같은 날 세종시 유세에서 “신행정수도 건설이 위헌 판결을 받았을 때 박근혜 후보는 ‘법치주의의 승리’라고 말했고, 여야 의원 154명이 함께 발의한 세종시특별법 개정도 결국 무산시켜버렸다”며 “누가 세종시가 잘 안 되도록 방해하고 있느냐”며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새누리당 정권이 이곳 세종시에 제대로 관심을 갖겠습니까. 박근혜 후보가 이곳 세종시를 돌아보기나 하겠습니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야만 세종시가 사실상의 행정수도,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
2선 후퇴 이해찬 전 대표 아쉬운 판이춘희 민주당 세종시당 위원장은 “지역민들 사이에는 박근혜 후보가 세종시를 지켰다는 인식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인지도 측면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며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를 놓고 비교하면 모두가 노 전 대통령이 세종시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박 후보에 비해 아직까지 정치인으로서 덜 알려진 편이에요. 그러니까 문재인 대 박근혜로 보면 박 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죠. 하지만 그건 이미지일 뿐입니다. 신행정수도를 반토막 낸 정당이 바로 새누리당이고 그 책임자가 박 후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전략으로 가게 될 겁니다.”
공약의 구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자체 평가한다. 문 후보는 △제2의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 분원 및 프레스센터 설치 △전국 광역단체협의회와 전국 기초단체협의회 유치 △세종시특별법 개정 등을 약속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작한 세종시를 저 문재인이 완성시키겠다. 세종시를 사실상의 행정수도, 실질적인 행정수도로 발전시켜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문재인은 구체적 정책과 공약을 제시한 반면, 박근혜는 사실상 ‘세종시를 잘 만들겠다’는 수준의 알맹이가 없는 언급만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런 전략의 유효성 문제는 따져볼 만하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서 충청권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의 일이고, 대중의 기억에는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원안을 두고 충돌했던 최근의 일이 더 분명하게 각인돼 있다고 봐야 한다”며 “사실관계를 두고 싸운다는 민주당의 전략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문 후보와 민주당이 세종시의 ‘저작권’을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현재 세종시의 ‘상표권’은 박 후보가 누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코끼리를 떠올리는 것처럼, 사실이든 아니든 유권자의 인식에선 ‘세종시=박근혜’라는 공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4·11 총선에서 세종시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해찬 전 대표가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 쪽과 문 후보 쪽 사이의 정치 혁신 논란 과정에서 2선으로 후퇴한 점도 문 후보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지역에서 세종시 문제를 무게감 있게 제기할 수 있는 이 전 대표가 본격적으로 화력을 발휘하기에는 그의 운신 폭이 상당 부분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종시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책적 의제의 발굴이라는 방향 선회는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충청권 표심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결국 세종시를 둘러싼 ‘프레임 전쟁’의 결과에 성패가 달렸다는 게 박근혜·문재인 후보 쪽의 공통된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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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에서 이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공식은 1992년 이후 어김없이 작동해왔다. 이번 대선에선 어떨까. 선거전 초반의 우위는 일단 박 후보 쪽이 점하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11월27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유권자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2%포인트)에 따르면, 대전과 충청권에서 양자 구도를 전제로 박 후보는 49.9%, 문 후보는 42.5%를 기록했다. 특히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4·11 총선에서 충북 8석 중 5석, 충남 10석 중 4석을 차지해 중원 공략의 탄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대전에서는 6석 중 3석에서 승리했다. 이번 총선에서 새로 추가된 세종시를 포함하면 충청권 25석 가운데 새누리당이 12석, 민주당이 10석, 선진통일당이 3석이었다. 이후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돼 힘의 균형추가 크게 기울었다는 게 지역 정가의 대체적인 관전평이다. 반면 문 후보 쪽에서는 열세를 인정하면서도 바닥 민심의 반등을 기대하는 눈치다. 이상민 민주당 의원(대전 유성)은 “반반까지 올라왔다”고 말했다.
‘공중전’도 치열하다. 정우택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부위원장은 11월30일 MBC 라디오 에서 박 후보에게 ‘충청의 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특히 박 후보는 정치생명을 걸고 끝까지 세종시 원안을 고수했고, 이런 노력을 많은 충청도 주민이 알고 있다”며 “박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비해) 8~20%포인트 앞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노영민 민주당 충북 공동선대위원장은 “역사상 충청권이 가장 발전했고 또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는 참여정부 시절”이라며 “세종시와 호남고속철도의 분기역, 혁신도시, 기업도시, 오송생명과학단지, 아산 신도시 등 현재 충청권 활력의 근거는 모두 참여정부 때 이뤄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대전·충남=글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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