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게 있으면 얻은 게 있다. 안철수 후보는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버렸다. 시대가 강요했다. 정치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쉽지 않았다. 2011년 10월26일로 예정된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박원순 후보의 지지율은 매우 낮았다. 그러다 누구도 예상 못한 행동을 했다. 선거를 앞두고, 2011년 9월6일 느닷없이 기자회견장에 섰다.
<font color="#1153A4">강연정치, 새로운 정치 양식</font>
“박 변호사가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운동의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 서울시장직을 누구보다 잘 수행할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 후보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도 안다. 너무 감사하고 부끄럽다”며 “제게 보여준 기대 역시 우리 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변화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안 후보는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하는 대신 제 삶을 믿어주시고 성원해주신 기대를 잊지 않고 제가 아닌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살아가는 정직하고 성실한 삶으로 보답하겠다”고 덧붙였다.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박원순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정치는 야수의 탐욕과 싸우기 위해 짐승의 비천함을 겪으면서 성인의 고귀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유시민 전 장관은 정의했다. CEO 안철수의 세상과 달랐다. 안 후보는 야수의 탐욕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짐승의 비천함을 겪을 이유가 없었고 성인의 고귀함을 추구할 필요도 없었다. 시대가 자꾸 그를 호출했다. 그는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면서도 대선 출마에 대해 아무 약속을 하지 않았다. 짐승의 비천함을 겪으며 성인의 고귀함을 추구하겠다는 결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은 달랐다. 정당도 직책도 없는데다 스스로 정치할 뜻이 없다는 안 후보를 계속 지지했다. ‘안철수 현상’ 말고는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언론과 국민이 ‘정치를 할 것이냐’고 물었지만 즉답을 피했다. 정치할 뜻이 없다고 했지만 정치적 행동을 이어갔다.
안 후보는 2011년 11월14일 자신이 보유하던 ‘안랩’(옛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37.2% 가운데 절반(당시 1500억원 상당)을 사회에 기부 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6일에는 ‘안철수재단’ 설립을 선언했고 4월에 법률적 등록 절차를 마쳤다. 당시 안 후보는 안철수재단이 벌일 사업에 대해 사회공헌 방식으로 청년 창업을 돕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격차사회’를 극복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대선 후보로 출마하겠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성인의 고귀함을 가슴에 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안 후보는 아직 짐승의 비천함을 견디거나 야수의 탐욕과 싸울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대선 출마 가능성은 부인하면서도 서울대 강연, 전남대 강연, 부산대 강연 등에서 꾸준히 청년 세대와 만났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정치의 중요함을 설파했다. 그런 와중에 모든 유권자, 정치학자, 언론의 예상을 깨고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했다. 안 후보는 묵묵히 ‘강연정치’ 행보를 계속했다.
‘정치인 안철수’의 모습이 뚜렷해지는 계기가 생겼다. 7월19일 책 을 펴냈다. 정치에 대해 뚜렷한 자기 생각을 처음으로 밝혔다. 에 ‘CEO 안철수’가 ‘정치인 안철수’로 진화하는 씨앗이 모두 담겨 있다. 자기가 싸우고자 하는 야수가 누구인지 조금더 구체적으로 밝혔다. 아울러 싸움을 비천하게 만든 책임이 민주당에 있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했다. 지금 시점에 돌아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font color="#1153A4">에둘러 표현한 ‘실망’과 ‘아쉬움’</font>
안 후보는 대선 출마를 고심하게 된 직접적 계기에 대해 4·11 총선에서 “예상치 않은 야권의 패배”를 들었다. 안 후보는 “총선 전에는 야권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그렇게 되면 야권의 대선 후보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수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는 총선 이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야수와 싸움과 동시에, 야수와 싸우며 야수와 닮아버린 낡은 야당 정치를 아울러 비판했다. 안 후보는 책에서 자신의 기반이 야권임을 명확히 드러냈지만, 민주당을 날 세워 비판했다. “총선에서 적극적으로 야당을 편들지 못했던 이유는, 후보 공천이 정당 내부 계파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취에 대해서도 ‘실망’과 ‘아쉬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평가했다. 예컨대 이런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10년간 집권했으면 서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도록 했어야 하는데 어땠습니까? 정부를 책임지는 사람들은 열심히 했다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받을수는 없습니다.”
정치인 안철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9월19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구세군아트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좁은 공간에 빼곡히 앉은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안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지금까지 국민은 저를 통해 정치 쇄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해줬다”며 “나는 18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국민의 열망을 실천해내는 사람이 되려 한다”고 일갈했다. 대중은 여론조사 지지율로 화답했다. 안 후보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양자 대결에서 박빙이거나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철수 후보는 자신의 브랜드 가치로 ‘새로운 정치’를 내걸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민주당에 오래 몸담았던 박선숙 전 의원이 힘을 싣기로 해 충격을 줬다. 민주당에서 오래 자문역을 맡았던 김호기 연세대 교수 등 지식인 그룹도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4·11 총선에서 당선된 민주당 송호창 의원도 안철수 캠프에 힘을 실었다. 마케팅은 포지셔닝이다.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 후보와 함께 문재인 후보도 이겨야 했다. 정책은 비슷했지만, 설전이 이어졌다. 신경전도 끊이지 않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에서는 견해 차이가 크지 않았다. 동일한 시민단체에 몸담았던 경제·복지 전문가들이 양쪽 캠프에 나뉘어 힘을 실었다.
문제는 선의의 내용이 아니라 선의를 누가 실천할 것인가에서 생겨났다. 정무팀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단일화한다고 무조건 새누리당을 이기리라는 분석은 적었지만, 단일화가 야권 승리의 필요조건임을 부인하는 정치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갈등이 불거지는 와중에 11월6일 두 후보가 전격적으로 단일화 회동을 가졌다. 그날 저녁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대선 후보 등록 전에 단일화를 하겠다고 합의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877015">‘정치인 안철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단을 했다. 11월23일 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대선 후보 안철수는 사라졌다. 그러나 정치인 안철수가 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font color="#1153A4">정치인 안철수는 사라지지 않았다</font>
갈등은 각론에서 벌어졌다. 안 후보는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자신이 정치인으로서 권력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의지는 선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문재인 캠프에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 사퇴 카드를 꺼냈다. 단일화 룰도 안철수 캠프에서 정하라며 양보의 제스처를 취했다.
각론에서 여전히, 갈등의 씨앗이 숨어 있었다. 안철수 캠프에서 여론조사와 공론조사를 반반 섞자고 제안했으나 문재인 캠프가 격분했다. 공론조사 대상 선정 때문이었다. 안철수 후보 쪽은 ‘민주당 당원 및 대의원’과 ‘안철수 캠프 펀드 후원자’를 섞어 공론조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민주당의 반발을 샀다. 민주당 당원과 대의원들은 100% 문재인 지지자가 아닌 반면, 안철수 펀드 가입자들은 순도 높은 지지자 집단이므로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게 반대 이유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물리적으로 공론조사가 불가능해진 마당에, 여론조사 문항과 관련해서도 양 캠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단일화 이후를 걱정하는 시민사회의 우려도 갈수록 커졌다.
‘정치인 안철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단을 했다. 11월23일 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후보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대선 후보 안철수는 사라졌다. 그러나 정치인 안철수가 사라졌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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