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복지 등의 분야에 대한 통찰력 있는 진단과 해결 방안을 주실 분으로, 정파를 떠나 신망을 받고 있어 당의 정책과 노선을 새로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해 말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 영입을 발표하며 했던 말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삼고초려 끝에 김 위원장을 영입하며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야권에서 빼앗아온 박 후보가 정작 이를 공약의 형태로 발표한 11월16일 기자회견에 김 위원장은 불참했다. 재벌개혁과 관련한 핵심 의제를 끝내 박 후보가 수용하지 않은 탓이다. 후하게 표현해도 ‘정치적 결별’이고, 엄밀히 말하면 박 후보가 김 위원장을 버린 셈이다.
몇 차례 봉합된 사이, ‘로비’에 틀어져
실제 기자회견에서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대규모 기업집단법(대기업집단법) 제정’ ‘주요 경제사범 국민참여재판’ 등 김종인표 핵심 공약은 모두 제외됐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도 대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드라이브보다는 시장의 공정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데 방점을 찍겠다는 게 박 후보의 논리다. 박 후보는 “경제민주화가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에 대해선 “우리 기업이 외국 기업의 적대적인 인수·합병에 노출될수 있고 합법적으로 인정되던 과거의 의결권까지 제한한다면 기업이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했고, 대기업집단법의 경우는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기로 했다”고 피해갔다.
김종인 위원장은 새누리당에 비상대책위원으로 합류한 이후에도 박 후보 주변에 포진한 시장만능·성장우선론자들과 갈등을 이어왔다. ‘당무 거부’나 ‘사퇴 불사’ 카드도 여러 차례 꺼내들었지만 고비마다 봉합이 반복됐다. 결정적인 것은 11월8일 이뤄진 박 후보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장의 간담회였다. 박 후보는 이날 간담회에서 “기존의 의결권을 제한하거나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기 위해 대규모 비용이 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재계는 당장 환영했지만 김 위원장은 “경제·사회 상황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이 올바른지 회의적”이라며 “(박 후보가) 로비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고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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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후보는 김 위원장의 ‘로비’ 발언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후보는 “내가 로비를 받을 사람이냐. 15년 동안 정치하며 한 번도 로비를 받은 적이 없다”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11월11일에는 우여곡절 끝에 회동이 이뤄졌지만 박 후보는 당과 캠프의 핵심 인사 9명을 대동하고 자리에 나갔다. 성장 위주의 시장주의자로 잘 알려진 안종범·강석훈 의원도 데려갔다. 김 위원장을 압박하기 위한 ‘10 대 1’ 회동이었다. 이후 김 위원장은 “결별이 그리 간단하겠느냐”는 말을 남긴 채 ‘침묵 모드’를 이어가고 있다. 공약 발표 전날 박 후보는 서울시내 모처에서 김 위원장과 회동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만나지 못했다. 기자회견 당일 아침까지도 박 후보의 측근들은 김 위원장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해 참석을 종용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당과 캠프 안팎에선 “김종인은 가고, 김광두가 떴다”는 관측이 많다. 경제정책과 관련해 김 위원장과 ‘쌍두마차’로 평가되던 김광두 힘찬경제추진단장은 실제 이번 결별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강대 출신 경제관료 집단인 이른바 ‘서강학파’로 분류되는 김 단장은 박 후보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장으로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는 의미의 ‘줄푸세’ 공약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최근 논란 과정에서도 김 단장은 “경제민주화와 성장은 같이 가야 한다”며 10조원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주장해 성장론의 선봉에 섰다.
결국 박 후보에게 필요했던 것은 경제민주화라는 ‘이미지’뿐이었을까. 야권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쪽 박광온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이용하고 버렸다”며 “김종인 위원장이 걱정한 대로 로비의 결과인지, 아니면 주변에 있는 재벌 장학생들의 압력 때문인지 국민들에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경실모) 소속 인사들도 “당의 경제민주화는 끝났다”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경실모 소속의 한 의원은 “오늘 발표된 공약은 공정거래 질서 확립을 위한 것이지 경제민주화 공약이 아니다”라며 “이것을 경제민주화라고 말한다면 국민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박 후보의 확고한 신념이 확인된 이상 단체 행동 등을 통해 공론화를 시도할 명분이나 동력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현직 의원 50여 명으로 구성된 경실모는 박근혜·김종인 결별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이후인 11월13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지만 결국 “경제민주화 실천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원론적인 의견만을 내놨다. 모임 대표인 남경필 의원은 “할 말은 많지만 대선 뒤에 하겠다”고 했다.
“철저하게 약속하고 계속 확인해야…”
김 위원장은 이한구 원내대표 등 당내 대표적인 시장주의자 그룹과 힘겨루기가 한창이던 9월 중순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관건은 박근혜 후보가 현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다.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상황 인식은 조금 된 것 같다. 대통령이 되면 관료들이 가서 브리핑을 한다. 확고한 신념을 갖지 않은 당선자라면 거기에 홀딱 넘어갈 수 있다. 국민에게 철저하게 약속하는 게 중요하다. 계속 확인해야 한다. 과연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경제민주화’가 빠진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는 그에 대한 박 후보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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