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폭로 기자회견, 기막힌 한 수

등록 2012-09-11 18:29 수정 2020-05-03 04:26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돕고 있는 금태섭 변호사가 9월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캠프 인사가 안 원장의 불출마를 종용하며 협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송호창 민주통합당 의원.  김경호 기자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돕고 있는 금태섭 변호사가 9월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캠프 인사가 안 원장의 불출마를 종용하며 협박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송호창 민주통합당 의원. 김경호 기자

기막힌 한 수였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돕고 있는 금태섭 변호사의 9월6일 기자회견은 대선 정국을 한순간에 뒤흔들었다. 박근혜 후보를 돕고있는 새누리당의 정준길 공보위원이 이틀 전 금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뇌물과 여자 문제를 터뜨릴 것이기 때문에 (안 원장이 대선에) 나오면 죽는다”고 협박하며 불출마를 종용했다는 게 회견의 골자다. 기자회견에는 금태섭·강인철·조광희 변호사 등 안 원장 쪽 인사뿐 아니라 역시 변호사 출신인 민주통합당 송호창 의원도 참여했다. 박근혜 후보의 ‘광폭 행보’와 답보를 거듭하고 있는 야권의 구도가 단번에 ‘안철수 대 박근혜의 공중전’으로 전환됐다. 공식 출마 선언을 포함한 안 원장의 ‘대선 프로젝트’에도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대선 프로젝트’ 본격적인 시동

그동안 룸살롱, 전셋집, 포스코의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행사 논란 등 네거티브 공세를 제기하며 잽을 날리던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은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보수진영의 이런 움직임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던 안 원장 쪽이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국민의 변화 열망을 구시대의 낡은 방식으로 짓밟는 범죄행위”로 규정하며 전면전에 나선 탓이다. 순식간에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

정 위원이 언급했다는 ‘뇌물과 여자’ 문제란 안철수연구소(현 안랩)가 설립 초기인 1999년 산업은행의 투자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당시 은행 벤처지원팀장이던 강아무개씨에게 연구소 주식을 대가성 뇌물로 줬다는 의혹, 안 원장이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음대 출신의 30대 여성과 최근까지 사귀고 있었다는 의혹 등이다.

그러나 두 사안 모두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게 안 원장 쪽 주장이다. 금태섭 변호사는 “안철수 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한 치의 의혹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2002년 서울지검 특수3부는 여러 벤처기업들에게서 수억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강씨를 구속했다. 논란이 일자 강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쫓아가서 투자를 부탁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분에게 뭘 받을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연구소의 한 임원도 “산업은행이 벤처에 처음 투자를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안철수연구소 같은 브랜드 있는 벤처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길 원했다”고 했다. 안철수연구소 쪽에서 뇌물을 제공할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다. 안 원장 쪽은 ‘여자 문제’에 대해선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다.


기자회견에서 한 번도 민주당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박근혜 후보의 대항마는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본인이라는 확실한 시그널을 준 셈.”-윤희웅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조사분석실장

‘협박 전화’의 주인공 정준길 위원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고 “금태섭 변호사와는 서울대 법대 86학번 동기”라며 “친구 사이의 개인적 대화”라고 말했다. 그는 “제가 실수한 것 같다”며 금 변호사의 회견 내용을 시인하면서도 “시중에서 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전달했다. ‘죽인다’는 등의 이야기는 너무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해명이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정 위원은 산업은행의 벤처 리베이트 의혹을 수사한 서울지검 특수3부 소속 검사였다. 안 원장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과정은 정 위원 본인이 직접 수사했다. 새누리당 안팎에선 4·11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출마했다 낙선한 정 위원이 공보위원으로 발탁된 건 ‘안철수 저격수’로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많다. 정 위원도 지난 8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안철수연구소의 BW 발행과 관련한 문제점에 대해선 적절한 시점에 쉽게 알려드리도록 하겠다”는 글을 올리는 등 ‘안철수 흠집내기’의 최전방 공격수를 자임해왔다.

민주당 일각 ‘잔칫집에 재를 뿌렸다’

안철수 원장 쪽과 민주당은 아예 이번 사안을 특정 대선주자에 대한 정권 차원의 불법사찰로 규정하고 있다. 정 위원은 금 변호사와의 전화에서 “우리가 조사해서 다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지난 8월에는 경찰이 안 원장의 행보를 사찰해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금 변호사는 “정보기관 또는 사정기관의 조직적인 뒷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내용이 새누리당 쪽에 전달되고 있지 않느냐는 강한 의심이 든다”며 “근거 없는 유언비어의 근원지와 조직적 유포에 대한 제보가 속속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불법사찰 진상조사위’를 구성키로 하는 등 공동 행보에 돌입했다. 국정조사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민간인에 대한 사찰과 통제가 일상이던 ‘유신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는 게 야권 전반의 시각이다.

새누리당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이번 사안을 정준길 위원 개인이 저지른 일종의 ‘사고’라고 해명했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그동안 ‘나도 사찰의 피해자’라는 태도를 견지해온 박근혜 후보가 단숨에 가해자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박근혜 후보는 이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서로 오랜 친구라는 거 아니냐”며 “개인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확대해석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안 원장 쪽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날 기자회견으로 안 원장은 민주당 후보들과 비교해 확고한 우위를 재확인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누렸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민주당은 대선 후보 경선의 분수령인 광주·전남 경선을 치르고 있었다. 민주당 일각에서 ‘잔칫집에 재를 뿌렸다’는 반응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 번도 민주당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박근혜 후보의 대항마는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본인이라는 확실한 시그널을 준 셈”이라며 “정치 도의상 민주당의 경선 도중 출마 선언은 하기 어렵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이슈를 제기한 고도의 전략으로 평가된다”고 분석했다. 금태섭 변호사는 과의 통화에서 “시점을 고려한 것은 전혀 아니다”라며 “전화를 받고 대응 방안을 논의한 뒤 바로 기자회견을 열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지지율에 끼칠 영향에도 관심이 쏠린다. 출마 여부를 둘러싼 안 원장의 ‘고민’이 길어지자 안 원장의 지지율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9월5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야권 대선 후보 선호도에서 안 원장은 40.8%, 문재인 후보는 38.1%를 기록해 오차 범위(95% 신뢰 수준에서 ±2.5%포인트) 안의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후보와의 양자 구도에서도 박 후보가 47.5%, 안 원장이 45.4%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통한 ‘역습’으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평가다.

안 원장과 박근혜의 ‘검증 전쟁’ 시작

반면 이날 기자회견이 안 원장에 대한 검증 국면에 오히려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지낸 권영세 전 의원은 “정준길 공보위원이 경솔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이번 일이 오히려 안철수 검증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안철수 원장과 박근혜 후보의 ‘검증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얘기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