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가정이 조화로운 사회에 한발 가까이 있는 유럽과 미국의 정책 전문가들이 지난 5월25일 한국을 찾았다. 한국여성경제학회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일·가정 양립정책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각국의 일·가정 양립정책의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학술대회 다음날인 5월26일 은 이탈리아 시에나대학 프란체스카 베티오 교수,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아니타 뉘베리 교수,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줄리 넬슨 교수를 초대해 아빠의 양육 참여가 가정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물었다. 이들은 “아빠가 양육에 적극 참여할수록 아이의 학습능력과 사회성이 향상된다.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도 무너져 남녀 간 고용·임금 차별이 자연스레 줄어든다”고 입을 모았다. 좌담의 진행은 한국여성경제학회 회장인 성효용 성신여대 교수(경제학)가 맡았다.
성효용(이하 성) 유럽에서 아빠가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아니타 뉘베리(이하 뉘베리) 스웨덴은 북유럽에서도 양성평등이 잘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 국가이지만, 1995년 ‘아빠의 육아휴직’을 강제할 때까지 남성이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1974년부터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육아휴직을 쓸 수 있고 휴직수당도 급여의 90%나 지급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아빠만 쓸 수 있는 30일간의 육아휴직을 도입하자 육아휴직을 전혀 사용하지 않던 남성의 비율이 46%(1994년)에서 16%(1995년)로 바로 줄었다. 현재는 90% 가까운 아빠가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스웨덴 어디를 가나 아이를 돌보는 아빠를 만날 수 있다. 정부 정책이 문화까지 바꾼 것이다.
프란체스카 베티오(이하 베티오) 일·가정 양립정책은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의식이 유럽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북유럽 나라들이 1990년대부터 아빠의 양육 정책을 펼쳐왔고, 다른 유럽 나라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핵심은 엄마에게 양도할 수 없는 아빠만의 육아휴직 제도다. 아이슬란드에선 육아휴직을 9개월간 쓸 수 있는데, 3개월은 엄마만, 3개월은 아빠만, 3개월은 부모가 함께 나눌 수 있다. 남성이 자녀 양육에 참여하는 게 자연스러워져 육아는 여성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많이 줄었다. 또한 아빠의 육아휴직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육아휴직 급여가 통상 임금과 엇비슷해야 한다.
성 한국은 임금의 40%를 육아휴직 급여로 받는다.
뉘베리 많이 부족하다. 가족 생계에 위협을 받으며 육아휴직을 하려는 아빠는 거의 없다. 스웨덴에서는 육아휴직 급여가 임금의 80% 수준(이전엔 90%였으나 1995년 아빠 육아휴직을 강제하며 80%로 낮춤)이기 때문에 고학력·전문직 남성이 더 많이 쓴다. 정부 통계를 보면, 박사 학위가 있는 남성이 저학력보다, 스웨덴 태생이 아프리카 태생보다 2배 가까이 많이 아빠 육아휴직을 활용한다. 반면 여성은 저학력·비전문직일수록 육아휴직을 많이 활용한다.
베티오 경력이 단절되면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고학력·전문직 여성은 장기간의 육아휴직을 원하지 않는다. 출산·육아가 집중되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일터를 오랫동안 떠났다가 되돌아오면 승진 기회 등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일하려면 남성과 양육 및 육아휴직을 분담하는 게 바람직하다.
성 아빠의 양육 참여가 아이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줄리 넬슨(이하 넬슨) 흔히 아빠는 보조적 역할을 선호하고 엄마가 주된 양육 책임자 역할을 맡기 바라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엄마니까 아기를 가장 잘 알겠지’라는 태도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의 연구 결과를 보면, 아빠의 양육 개입이 자녀의 행동장애 감소, 사회연대성 강화, 심리적 건강과 인지능력 향상, 비행 행동 감소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더 적은 소득으로도 더 즐거운 가정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뉘베리 가정에서 아빠의 양육 참여를 방해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경우가 많다. 육아는 여성 몫이라는 관념이 강한 나라일수록 그렇다. 엄마는 자녀가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서 챙겨주는 반면, 아빠는 직접적 개입을 자제하는 편이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양육 방식을 비판한다. 아빠가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너무 수동적이거나 게을러서 탈이라는 것이다. 자녀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자신만 옳고 보조자인 남편의 양육 방식은 옳지 않다는 태도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니까 아빠는 위축돼 방관자로 돌아선다.
베티오 아빠의 양육 방식이 다른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에게 큰 장점이 된다. 아빠의 접근법은 아이에게 자율성을 키워준다. 아이가 넘어지든, 놀이공원에서 낯선 아이들과 놀든,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든, 엄마보다 느긋해서 아이가 낯선 세계를 탐험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스타일이 아이가 세상에서 위기를 맞았을 때 더 잘 대응하게 도와준다.
성 아빠의 양육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넬슨 미국에서는 개인적 이데올로기가 강해 보육서비스가 개인화돼 있다. 하지만 일과 가정의 양립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높다. 예컨대 미국 사립대학에서는 남성 교직원에게 100% 유급 육아휴직을 준다. 능력 있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베티오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에서는 기업이 바우처(Voucher·쿠폰)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기업이 다양한 어린이집·유치원과 계약을 맺고 그 보육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직원들에게 제공한다. 좋은 보육시설을 개인이 등록하는 것보다 싸게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정부가 공공 보육시설을 충분히 마련하고 보육료를 부모의 월급에 따라 차등 부여해야 경제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
뉘베리 일·가정 양립정책을 아빠가 맘껏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도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을 장려하려고 남성에게 별도로 1년간의 휴가 권리를 부여하지만 사용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보다 양성평등 문화가 잘 자리잡은 스웨덴에서도 아빠만의 육아휴직 제도가 생길 때까지 남성의 육아휴직 활용률이 상당히 낮았음을 고려하면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기업인을 교육해 양육은 남성과 여성의 공동 책임이라는 관념을 확산해야 한다. 전통적인 남성·여성의 역할을 바꾸는 교육을 아이들에게도 해줄 필요가 있다.
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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