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저녁 6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서울 대방동 통합진보당사의 상황실 풍경은 한껏 들떠 있었다. 유시민 공동대표는 각 지역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반색하며 감탄사를 연발했고, 가끔 옆자리의 이정희 공동대표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잘 나온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뒤 ‘이게 내 점수 맞아?’ 하며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는 고3 수험생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TV를 지켜보던 누군가 무심코 한마디를 내던졌다. “저 치밀한 사람에게도 저렇듯 천진한 표정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TV 자막에선 통합진보당의 의석수를 12석에서 21석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오랜 숙원인 원내교섭단체 구성까지 바라볼 수 있는 예상치였다.
<font color="#A341B1"> 짐작과는 달랐던 지역구 성적표</font>
하지만 밤 9시를 넘기며 개표 초반의 열기는 냉각되기 시작했다. 통합진보당 후보가 앞서거나 오차범위 안에서 접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던 경기 의정부와 울산 남·북구, 경남 창원 등의 지역구에서 1위 후보와의 표차가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는 흐름을 보인 탓이다. 다음날 새벽 1시를 넘기며 결과는 확실해졌다. 지역구 7석에 정당득표율 10% 초반. 비례대표 포함 의석 13석.
애초 최대 목표치였던 교섭단체 구성에는 실패했지만, 외형상 준수한 성적이었다. 무엇보다 선거 전 6석이던 의석수가 2배 이상 늘었다. 의석이 1곳도 없던 수도권에서 4석(서울 2, 경기 2)을, 1석뿐이던 호남에서 3석(광주 1, 전남 1, 전북 1)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경선 여론조사 조작’ 논란으로 중도 사퇴한 이정희 대표를 대신해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상규 후보가 당선된 것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다. 수도권의 민주통합당 텃밭 지역에서 진보정당 후보로 단일화되면 민주당 출신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필패할 수밖에 없다는 세간의 예상을 보기 좋게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호남이라는 ‘엘도라도’에서 광주·전남·전북에 1곳씩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것도 무시 못할 성과다. 2010년 전남 순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호남 의석을 확보하긴 했지만, 당시는 민주당의 무공천 배려와 무소속 후보의 난립 덕에 30%대의 득표율로 간신히 이룬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순천 선거에서 김선동 후보는 ‘국회 본회의장 최루탄 파동’이란 악재에도 불구하고 순천시장을 지낸 민주당 후보와 붙어 압도적 표차로 승리를 거뒀다. 1년6개월 만에 소작농 신세에서 자작농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전북 남원·순창에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강동원 후보가 터줏대감인 이강래 민주당 의원을 꺾은 것도 자력에 의한 호남 진출 가능성을 확인시킨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수도권과 호남에 교두보를 구축한 대신, 전통적 지지 기반인 울산·경남의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전패했다는 사실이다. 당내에선 영남에서 노동자를 지지 기반으로 했던 진보정치가 뚜렷한 한계에 봉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의 한 관계자는 “무엇보다 8년 동안 장악했던 경남 창원을과 울산 북구를 내준 게 뼈아프다. 이건 노동운동과 진보정치, 그리고 통합진보당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수도권에서의 선전이 영남권의 참패를 결코 상쇄할 수 없다”고 했다. 실제 이번 총선에선 2004년 첫 원내 진출 때와 같은 현장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는 게 당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진보신당 쪽 관계자 역시 “노동현장과 정당정치의 분리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사실상 노동정치의 몰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라고 씁쓸해했다.
<font color="#A341B1"> ‘경기동부’ 논란으로 중도층 이탈</font>
정당지지율이 예상보다 낮은 10.3%에 머문 것도 통합진보당으로선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이 수치는 2008년 민주노동당이 거둔 5.7%에 비해 2배 가까이 오른 것이지만, 2004년 17대 총선의 13.8%에는 크게 못 미친다. 통합진보당은 선거 직전 네 차례의 자체 여론조사에서 정당투표 지지율이 12%까지 나와, 내심 17대 때와 비슷한 8명 안팎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당 관계자는 “서울 관악을 단일화 경선 당시 여론조사 조작 논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치명적이었다”며 “후보 사퇴를 더 일찍 결행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일각에선 선거운동 기간에 당내 최대 계파인 ‘경기동부연합’의 실체를 두고 보수 진영의 공세가 계속돼 당에 호감을 보이던 중도층 일부가 이탈한 것도 정당지지율 하락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총선 결과가 이후 통합진보당의 내부 역학관계에 끼칠 파장이다. 이번 총선의 최대 수혜자는 당권파로 불리는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역구 당선인 7명 중 4명(김미희·김선동·오병윤·이상규), 비례대표 6명 중 2명(이석기·김재연)이 확실한 당권파로 거론되고, 나머지 비례대표의 다수도 당권파의 우산 아래 있는 인사들로 분류된다. 당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민노당 시절부터 원내 진출이 여의치 못했던 세력이 처음으로 당 원내 인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며 “통합 이후 어수선했던 당내 질서가 사실상 경기동부의 독주 구도로 정리된 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당권파의 독주는 나머지 정파·계파들의 위기감을 촉발해 잠재된 당내 갈등을 표면화시킬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노회찬·심상정 당선인이 중심인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 세력과 옛 민노당계임에도 당권에서 소외돼온 인천연합·울산연합 계열이 당권파에 대항해 비주류 연합전선을 펼치는 구도다. 그 첫 무대는 당헌·당규를 결정하기 위한 4월29일 전당대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핵심 쟁점은 당권과 대권의 분리 여부다. 이정희라는 잠재적 대선주자를 보유한 당권파로선 굳이 둘을 분리함으로써 권력 분산의 위험을 초래할 이유가 없다. 반면 노회찬·심상정이란 주자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당내 세력 기반이 취약한 통합연대는 공정한 당내 대선 후보 경쟁을 위해선 당권·대권 분리가 필수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물론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본선 완주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당 대선 후보를 거머쥔다면 이후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과정에서 참여 지분을 늘릴 수 있어 각 계파로선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1A"><font size="4">정당지지율이 예상보다 낮은 10.3%에 머문 것도 통합진보당으로선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통합진보당은 선거 직전 네 차례의 자체 여론조사에서 정당투표 지지율이 12%까지 나와, 내심 17대 때와 비슷한 8명 안팎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font></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font color="#A341B1"> 유시민의 선택이 가를 당내 투쟁</font>
키를 쥔 것은 당내 대선주자 가운데 대중 지지도가 독보적인 유시민계(참여당계)다. 이들은 총선 경선 룰 확정 과정에서 당권파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유시민 대표의 당무 거부 파동 이후엔 표면적으로나마 당권파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들이 당권파와 비주류 가운데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에 따라 당내 투쟁은 싱겁게 정리될 수도, 옛 민노당 내 헤게모니 투쟁 못지않게 확산될 수도 있다. 유시민의 선택은 어디로 기울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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