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미·중·일·러 등 주변국들도 발걸음을 재게 놀리고 있다. 김 위원장 사망이란 충격파가 가라앉은 뒤 마주하게 될 상황은 위기일까, 기회일까? 은 대표적 남북관계 전문가인 정세현 원광대 총장에게 물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 사망 때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근무한 정 총장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월부터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4년 6월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그의 재임 기간에 열린 각종 남북회담은 모두 89차례, 타결된 합의서만도 74건에 이른다. 6·15 공동선언이 만들어낸 ‘남북관계의 황금 시기’였다.
<font color="#C21A8D">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을 우리 정부가 사전에 알아채지 못한, 이른바 ‘정보 실패’에 대해 비판 여론이 높다.</font>
1994년 상황에 비춰보면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때도 당일 예고방송 나온 뒤에야 ‘김일성 유고’를 추정한 정도였다. 물론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된 상황이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한때 금강산 관광객을 빼고도 남쪽 사람이 하루 300~400명씩 평양에 체류하던 시절도 있었다. 경제협력·인도지원·사회문화 교류와 협력을 위해 1년에 관광객을 제외하고도 10만 명가량이 북한에 다녀오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금은 남북 간에 아무런 채널도 없지 않나. 판문점 연락관끼리도 분위기를 서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진 상황이다. 인적정보(휴민트·HUMINT) 채널은 아예 끊겼고, 대중국관계가 어려우니 중국과의 협조가 원활히 이뤄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font color="#C21A8D">북한의 초기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는가.</font>
1994년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두 번째다. 17년 전의 선례를 따를 수 있었으니, 대응에 필요한 시간도 짧아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장의위원회를 꾸리는데 누구를 1번으로 하느냐로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의 발병부터 혈통에 의한 후계 체제를 (김 위원장이) 결심했다고 봐야 한다. 공식적으로 내세운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 내부 정지작업을 다 해왔을 테니 특별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font color="#C21A8D">1994년과 달리 ‘조문 파동’ 없이 넘어가는 것 같다. 조문과 관련한 정부의 결정을 어떻게 보는가.</font>
사망 발표 이후 대처는 1994년에 견줘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조문 문제가 매끄럽지 않게 처리돼 남북관계에 걸림돌이 됐고, 이후 남북관계 악화의 계기가 됐다. 이번엔 그때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은 듯하다. 북쪽의 발표 하루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 직계가족의 방북 조문을 허용했다. ‘조의’도 북쪽 주민을 대상으로 삼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기 그간의 남북관계를 볼 때 평가해줄 만하다.
<font color="#C21A8D">후계 구도를 포함해 김 위원장 없는 북한을 전망한다면.</font>
김정은에 대해선 ‘승부욕이 강하다’는 얘기밖에 안 나온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이 했던 것을 모방하려 할 것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이럴 땐 어떻게 하셨느냐’고 묻겠지. 사실 최고지도자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실무자들이 올린 A안과 B안 중에 하나를 택하는 거다. 김정은의 고모부이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이나 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 같은 경험 많은 이들이 보좌를 치밀하게 해줄 것이다. 2002년 10월 말께 장성택이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남쪽을 방문한 일이 있다. 단장은 박남기였지만, 장성택이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때 신라호텔에서 만찬을 할 때 처신을 보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모시고 떠받드는 것에 대단히 조심하더라. 사진 찍을 때도 다들 가운데 세우려 하는데 맨 뒷줄 끝에 가서 서는 것을 보고 ‘참 몸조심을 잘하는 구나’ 싶더라. (웃음) 참모로서 차분하게 일을 잘할 거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font color="#C21A8D">김정은 체제 안정화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뭘까.</font>
경제다. 민생이다. 북은 그동안 2012년을 ‘강성대국으로 가는 대문을 열어젖히는 해’라고 선전해왔다. 2012년 4월15일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은 그 시발점이다. 김일성 주석이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면서 살고자 하는 우리 인민들의 염원을 기어이 실현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 게 1957년이다. 1991년 똑같은 얘기를 하며, ‘인민의 염원’ 앞에 ‘세기적’이란 표현을 더했다. 김 주석은 끝내 그 염원을 달성하지 못했고, 김 위원장도 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다 숨졌다. 북쪽 표현으로 ‘내부예비’(내부자원)는 고갈됐고, ‘외부예비’는 핵문제 때문에 막혀 있다. ‘강성대국 원년’을 실감나게 하려면 먹고사는 문제라도 해결돼야 한다.
하지만 북 내부적으론 주민 생활을 향상시켜줄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없다. 외부예비를 끌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북-미 관계에서 돌파구를 열려는 게 아닌가 싶다. 북-미 접촉이 계속되고 있다. 핵심은 북이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인도적 지원을 하는 거다. 미국이 24만t 규모의 이른바 ‘영양지원’을 하는 쪽으로 어느 정도 합의돼가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숨졌다. 북 당국의 처지에선 가능성을 보이던 북-미 접촉을 빨리 진전시켜 2012년 4월 이전에 물적 지원을 확보해, 이를 성과로 선전하려 들 공산이 크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도 김 주석 사후 석 달 만에 나왔다. 미국이 북의 요구를 들어주고 핵 활동을 중단시킨 선례가 있다. 북은 다급했고, 미국은 이를 잘 활용했다.
<font color="#C21A8D">이른바 ‘인민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군사경제’를 줄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마찰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font>
인민경제와 군사경제는 ‘제로섬 게임’ 관계다. 민생 쪽에 국부를 많이 배분하면 군사 분야에 투자를 못하고, 군사 쪽 규모를 늘리면 민생경제를 키울 수 없다. 소련도 군사경제 중심으로 끌고 가다가 망하지 않았나. 외부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북이 (민생경제 활성화를 위해) 군사경제 규모를 줄이는 건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소리다. 외부의 군사위협이 없어져야 한다. 핵무기와 미사일이 있다고 주민들 배가 부른 건 아니다. 북쪽 당국도 민생경제를 활성화해, 당과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더 많이 끌어내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게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다. 한반도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면 민생을 위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북한이 그걸 따내려고 1990년대 초반부터 핵 카드를 활용하기 시작한 거 아닌가.
<font color="#1153A4"><font size="3">북이 상황을 주도할 처지는 아니다. 대외적으로 공세적으로 나갈 아무런 카드가 없다. 핵 카드는 있지만, 그건 대미 협상용이다.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남북관계도 따라온다고 볼 것이다.</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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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21A8D">북의 새 지도부가 ‘내부 결속용’으로 군사적 도발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font>
미사일을 쏜다거나 핵 활동을 강화하는 등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대내용이 아니라 대미 협상용이다. ‘빨리 우리가 원하는 걸 달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더 괴롭힐 수 있다’는 북의 협상 전략이다. 외부 지원이 더디고, 체제에 대한 외교적 보장이 확실치 않으면 위협적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협상용이란 얘기다. 지금으로선 북-미 협상을 좀더 치밀하게 해나가면서, 내년 4월까지 성과를 내려 할 가능성이 높다. 바쁘지 않겠나? 정치가 원래 그런 거다.
<font color="#C21A8D">남북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려 할까.</font>
북이 상황을 주도할 처지는 아니다. 대외적으로 공세적으로 나갈 아무런 카드가 없다. 핵 카드는 있지만, 그건 대미 협상용이다.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남북관계도 따라온다고 볼 것이다. 다만 남쪽에서 북-미 관계가 빠르게 개선될 것으로 보고, 거기에 뒤처져선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유화적으로 나가준다면 북으로선 나쁠 게 없지. 그런 과정에서 인도적 지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이산가족 상봉에 호응하는 등 북-미 관계 개선을 더 부드럽게 하는 데 남북관계를 활용할 수도 있다.
<font color="#C21A8D">미국의 선택은 어떨까. 일부 공화당 대선 주자들이 벌써부터 ‘강경론’을 내놓고 있는데.</font>
이번 기회에 북을 세게 압박해 끝장을 내자는 식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대선 후보답지 않은 단견이다. 국제정치로 국력을 버텨온 나라가 미국이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지정학적 구조는, 이를테면 중동 지역과 다르다. 북이 붕괴했을 때 그 부정적 파급을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중국이 있다. 북은 망하고 싶어도 중국 때문에 못 망한다. 생각해보라. 소련이 해체되면서 더 이상 버텨낼 수 없게 되자 동독도 무너졌다. 소련은 동독에서 손 떼는 대가로 서독에서 막대한 차관을 받아갔지만, 중국은 이미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라 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있지 않나. 중국에 북은 그야말로 ‘입술’이다. 미국에 버금가는 국력을 가진 상황에서, 자국의 정치·경제에 끼칠 영향이 막대한 북이 붕괴하도록 그냥 놔두겠나? 보수 진영에서 나오는 ‘붕괴 임박론’은 국제정치 상황을 무시한 희망적 관측일 뿐이다.
<font color="#C21A8D">북-미 관계가 잘 풀린다면 북-중, 북-러 관계의 비중은 줄어들겠지만, 그 반대라면 두 나라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font>
북이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9명 모두가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 조문한 것은 김정은 체제를 중국 정부가 확실히 인정하고 밀어주겠다는 뜻이다. 북-미 관계가 급작스럽게 개선되면, 동북아에서 중국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행보로 볼 수도 있다. 미국도 뉴욕 채널을 통해 북-미 접촉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북을 놓고 미-중 간 경쟁이 붙은 모양새다. 김 위원장 사망으로 북의 주민들은 슬픔에 잠겨 있겠지만, 대외관계의 입지는 되레 좋아진 측면도 있다.
<font color="#C21A8D">1년2개월여 남은 이명박 정부의 임기 동안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font>
통일 이전까지는 정권의 성향이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똑같다.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현 정부는 ‘북쪽 버릇을 뜯어고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관점으로 남북관계를 해왔는데, 성과가 전혀 없었다. 그 이전 10년은 북에 개입하고 관계를 이어가며 상황을 관리하고, 북이 변화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을 조성하는 쪽이었다. 1년2개월이 남았지만, 새 통일부 장관이 유연성을 강조하고, 이번에도 조문 문제를 유연하게 처리했다. 북이 남쪽의 모든 조의 대표단과 조문사절을 받아들이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지난 4년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간의 단절을 어떻게 바로 건너뛸 수 있겠나.
이번 조치를 계기로 정부가 비정치적 분야,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사회·문화교류 등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남북관계 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는 조처를 이어가면 좋겠다. 미국의 대북지원이 결정되면, 식량 지원 문제에서도 유연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이번에 ‘민간 조문’을 허용했듯이, 민간부문의 대북 인도 지원을 과감하게 풀어주는 게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식량·비료를 지원할 수 있는 모멘텀은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것 없이는 임기 말 주도권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 얘기도 나오고, 이를 계기로 금강산 관광 문제도 풀어갈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상회담이야 어렵겠지만, 장관급 회담 정도는 임기 내에 가능할 수도 있다. 이게 다 그간 남북관계의 역사를 통해 나온 ‘매뉴얼’이다. 그대로만 하면 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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