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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의 시대는 오는가?

안철수·박원순 열풍을 통해 정치 화두로 떠오른 자유주의…중도진보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모호한 개념이란 지적 받지만, 왜곡된 보수 비판에 의미 있어
등록 2011-09-30 17:05 수정 2020-05-03 04:26
» 2011년 자유주의 르레상스의 두 주역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과 박원순 변호사. 안 원장이 지난 9월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한 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로 한 박 변호사를 포옹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 2011년 자유주의 르레상스의 두 주역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과 박원순 변호사. 안 원장이 지난 9월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한 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로 한 박 변호사를 포옹하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몇 해 전부터 변화의 조짐이 관찰됐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리버럴과 자유주의에 대한 신원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소명의 양상은 적극성을 띠고 있다. 자유주의의 진보성을 긍정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위상을 ‘19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의 지배 이념으로 격상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리버럴’(Liberal)은 경멸의 언어였다. 모욕의 강도는 좌파들 사이에서 더 강렬했다. 그것은 고립과 무능의 낙인이자 방종과 타락의 표식이었다. 리버럴의 이념적 대응물인 자유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첨예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시기를 통과하는 동안 때로는 반공주의와, 때로는 시장지상주의와 등치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냉전의 최전선이자 시장경제의 진열장이던 한국에서는 이런 부정적 동일시가 한층 심각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 리버럴과 자유주의에 대한 신원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인데, 시간이 갈수록 소명의 양상은 적극성을 띠고 있다. 자유주의의 진보성을 긍정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위상을 ‘19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의 지배 이념으로 격상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세력과 다른 감수성

눈길을 끄는 점은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쪽이 대체로 미국 민주당이 구현한다는 진보적 자유주의에 지속적 호감을 표시해온 중도진보 성향의 정치학자들이라는 점이다. 진보학계의 대표적 ‘미국통’인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최근 칼럼을 통해 ‘안철수(박원순) 현상’과 ‘강남좌파’의 등장, 야권의 전면적 재편 움직임 등을 거론하며 “선거를 통한 새로운 자유주의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는 도발적 언명을 제출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편협한 태도를 비판하며 ‘사회적 자유주의’의 도입을 역설해온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도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철수 현상이 자유주의의 복권과 재평가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안 교수의 발언에 공감을 표시한다. 정상호 서남대 교수(정치학) 역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상적으로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상에 근접한 집단적 열망이 안철수·박원순 열풍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안병진 교수의 ‘도발’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강남(분당)좌파’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4월 ‘다가오는 자유주의의 시대’라는 칼럼에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분당과 서울은 자유주의 혁명의 진앙지가 될 것”이란 ‘기대 섞인 예언’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안 교수의 논리는 1970~80년대 민주화(반체제) 세력과 전혀 다른 감수성과 신념 체계를 소유한 새로운 집단 주체가 한국의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나름의 판단에 근거한다. 안 교수는 이 새로운 주체를 ‘리버럴’로, 그들의 집합적 열망을 ‘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호출한다.

리버럴의 시대는 과연 도래하는 것일까. 안병진 교수 등의 진단이 맞다면 1980년대 지배적 저항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오랜 잠행에 들어간 한국의 자유주의가 뒤늦은 재생의 시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쟁점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새로운 집단 주체와 최근 몇 차례의 선거에서 정의·복지에 대한 지지로 표출된 사회적 열망을 자유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으로 호명하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안철수 현상을 지탱하는 세력이 2008년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무상급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 의제에 적극적 지지를 보내온 계층과 대체로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은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안철수·박원순 지지층을 분석해볼 때 분명해진다. 대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20~40대의 고학력 화이트칼라, 진보정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한편 자신의 이념 성향을 진보와 중도진보로 인식하는 집단이 그들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안병진 교수 등이 말하는 리버럴은 기존의 중도진보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라고 꼬집는다. 정치적으로 오염되고 개념 정의조차 모호한 자유주의로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미국적 문맥에서 무리하게 꿰맞추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 이른바 `촛불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취향과 문화의 차이에도 개방적 감수성을 지닌 최초의 집단으로 지목된다. 2008년 6월10일 서울광장과 태평로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의 모습. 한겨레 신소영

» 이른바 `촛불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취향과 문화의 차이에도 개방적 감수성을 지닌 최초의 집단으로 지목된다. 2008년 6월10일 서울광장과 태평로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의 모습. 한겨레 신소영

너무나 다른 ‘자유주의들’의 경합

이 집단에 대해선 그동안 정치사회학적 분석이 상당 부분 이뤄졌다. “정보사회 도래와 세계화 확대에 따라 권위주의와 집단주의를 거부하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세대”(조희연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이자 “민주주의와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취향과 문화의 차이에도 개방적 감수성을 지닌 집단”(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들어 학계 일각에선 이들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등장한 서구적 의미의 리버럴로 지목한다. 안 교수 역시 그렇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서구식 자유주의의 색채를 확고히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이들의 집단적 열망이 안철수와 박원순이라는 실천적 자유주의자들을 만나 정치사회의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안철수에 열광하고 박원순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리버럴의 사전적 정의, 다시 말해 “변화에 개방적이고 차이에 관용적이며 약자에 너그러운 태도”(박동천)에 근접해 있는 게 사실이다.

한 가지 난점은 이런 리버럴의 정의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란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리버럴을 ‘개방과 관용의 영역과 방향’에 따라 세분화하는데 △경제적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분화는 자유주의가 포괄하는 영역을 지나치게 확대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어려움을 파생시킨다. 게다가 각각의 영역에서 주창되는 자유주의 교리가 때로는 충돌하고 심지어 이율배반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한 예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시장의 압도적 자유를 옹호하며 국가의 불개입을 강조한다. 반면 사회적 자유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분배와 복지정책)을 정당화한다.

모든 영역에서 일관된 자유주의의 신념과 태도를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경우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유주의가 절대왕정 및 봉건적 신분질서와의 투쟁을 통해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근대의 충격과 함께 외부로부터 이식된 한국에서는 자유주의 내부의 불일치와 모순이 한층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상하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 전통의 잔재와 분단과 전쟁을 경유하며 만들어진 반공주의의 완강한 규율 시스템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상당 기간 불완전한 상태로 연명하게 만든 내적 제약 요인이었다. 1960~7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던 자유주의 엘리트의 상당수가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의 주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미국적 맥락에 끼워 맞추기”

자유주의의 내적 불일치에 따른 논리적 난점은, 21세기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반권위주의적이고 탈집단주의적인 주체를 ‘리버럴/자유주의’로 호명하려는 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된다. 시민적 권리를 긍정하고 분배와 복지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취향과 기호의 민주주의까지 내면화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자유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그것의 현대적 변용인 신자유주의 교의와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사회적(진보적)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이 선택한 전략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특정 국면에 출현한 자유주의의 역사적 특수형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본류가 아니라 사회 세력들 사이의 각축과 타협을 통해 교정되고 극복된 초기 자유주의의 유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2008년 경제위기를 겪으며 견고하게 보였던 시장 지상주의 신화가 무너진 것도 이런 논거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진보학계의 다수는 최근의 ‘자유주의 복권론’에 대체로 회의적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안 교수 등이 말하는 리버럴은 기존의 중도진보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라고 꼬집는다. 정치적으로 오염되고 개념 정의조차 모호한 자유주의로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미국적 문맥에서 무리하게 꿰맞추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치학자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견해도 비슷하다. 그는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유권자들의 개인적·집합적 기대가 기존 제도 정치 안에서 해소되지 못함에 따라 나타나는 ‘불만의 정치’의 전형”이라며 “이를 굳이 자유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유권자 집단의 요구를 희화화하는 것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안철수·박원순의 개인적 성향과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 집단의 정체성을 기계적으로 대응시켜선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찬표 목포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는 “아래로부터 표출된 대중의 요구가 누군가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연결될 때, 대중의 지향과 지지받는 대표자의 성향은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안철수·박원순의 행적에서 드러난 정치·사회적 지향이 전통적인 좌·우 노선으로 구획하기 어려운 자유주의적 중도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에 연결하는 것은 여전히 무리라는 얘기다.

반면 안철수에 대한 열광이 진보적(사회적) 자유주의보다 신자유주의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안철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혜택을 입고 성장한 인물로, 그가 말하는 복지 역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사후적 복지, 사회안전망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며 “4년 전 이명박을 당선시킨 대중의 열망과 오늘의 안철수 신드롬은 사실상 ‘유능한 정부’에 대한 요청이라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고 단언한다.



일부 진보세력이 공론화한 자유주의 담론에 진보학계 주류의 반응이 냉소적인 것과 달리 우파의 대응은 기민하다. 보수 정치권과 언론, 학계가 나서서 ‘자유민주주의 이념 논쟁’을 독려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극좌와 극우를 제외한 모두의 이름

자유주의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진보 이념을 자유주의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진욱 교수는 “한국적 현실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실천의 무게중심을 ‘진보’보다는 ‘자유주의’에 둘 수밖에 없는 담론”이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야권의 정치적 재편 과정에서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가운데, 나머지 진보세력의 변화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라는 프레임이 갖는 설명력의 한계 역시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 개념틀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 최근의 자유주의 담론은 극좌와 극우를 제외한 모든 이념을 포괄하는 만능의 프레임으로 구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유주의와 경합했던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마저 역사적 진화를 겪으며 시민권적 자유와 시장제도의 효용성이란 자유주의의 요소를 승인하고 수용했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데, 문제는 진보적·보수적·고전적·합리적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자유주의의 외연을 확장하다 보면 자유주의란 개념 자체의 유용성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부 진보세력이 공론화한 자유주의 담론에 진보학계 주류의 반응이 냉소적인 것과 달리 우파의 대응은 기민하다. 보수 정치권과 언론, 학계가 나서 ‘자유민주주의 이념 논쟁’을 독려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논란은 뉴라이트 성향의 한국현대사학회가 교과서 서술 지침에서 ‘민주주의’란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할 것을 건의하고 정부가 이를 전격 수용하면서 촉발됐다. 이런 보수세력의 움직임엔 자신들이 1980년대 이래 누려온 자유주의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공포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보수세력이 새삼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보 역사학계의 해석은 자유(민주)주의가 보수세력의 취약한 역사적 정당성을 보완할 유일한 이데올로기 자원이란 사실로 모아진다. 친일과 분단에 대한 책임 때문에 한국의 보수세력은 자신들의 유력한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민족주의를 일찌감치 진보세력에게 선점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장주의와 반공을 통해 유지돼온 자유주의와의 접합 구조에 균열이 생기면서 보수의 위기의식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첫째 요인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찾아온 시장 신화의 붕괴라면, 둘째 요인은 진보세력 일각에서 시도되는 자유주의에 대한 소유권 되찾기다.

» 한국 사회에서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시기였던 1970년대에는 정치적 자유주의뿐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마저 국가의 간섭 대상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장발 단속 모습. 보도사진연감

» 한국 사회에서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시기였던 1970년대에는 정치적 자유주의뿐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마저 국가의 간섭 대상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벌어진 장발 단속 모습. 보도사진연감

자유를 강조해 독재를 지우기

결국 자유민주주의 서술 지침을 둘러싼 보수의 공세는 ‘자유’를 둘러싼 프레임 전쟁에서 우세를 확보하겠다는 이념적 선제공격의 혐의가 짙다는 게 진보학계의 분석이다. ‘이승만-박정희-5공’에 뿌리를 둔 보수세력이 헌법을 파괴하고 자유주의를 억압한 권위주의 세력이 아니라, ‘공산독재의 위협’에서 자유와 시장경제를 지키려고 투쟁해온 자유주의 수호세력이었음을 공인받겠다는 속셈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진보세력 일각의 ‘자유주의 강화론’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집단 열망을 ‘리버럴’이라는 집단 주체로 동원하는 정치적 효과보다, 보수세력의 자유주의 담론에 내장된 기만과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서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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