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의 책임을 지고 8월26일 사퇴했다. 오 시장은 “대한민국 복지 방향에 대한 서울시민의 뜻이 어디 있는지 결국 확인하지 못하고 아쉽게 투표함을 닫게 된 점, 매우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투표에 모아주신 민의의 씨앗들을 꽃피우지 못한 것은 저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장직 사퇴로 모든 게 끝났을까? ‘오세훈의 셀프 탄핵’이라며 웃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계급·세대 갈등 심화한 투표
그렇지 않다. 이번 오세훈발 주민투표는 그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에 새로운 민주주의가 열리는 계기’가 될 만한 많은 정치·사회적 성찰점을 던져줬다. 물론 그 의미는 “이번 주민투표는 제가 제안했지만 시민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과 결단으로 시작되었고, 81만 서울시민은 최초의 주민청구형 주민투표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만들었다. 독재시대를 넘긴 민주주의는 인기영합주의를 극복해야 한 단계 더 발전하기 때문”이라는 오 시장의 낯뜨거운 수사와는 다르다.
가장 먼저 짚어봐야 할 대목은 이번 투표를 통해 시민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갈등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다. 현실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견해를 가지는 상황은 거의 없다. 각기 다른 견해를 조정·타협하고, 정치·사회·경제적 권력에서 배제된 이들의 반대 의견을 조직화해 관철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민주주의다. 주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이런 갈등을 조정하려는 수단이다.
하지만 주민투표라는 형식 자체가 복잡한 쟁점을 양자택일 문제로 단순화하기 때문에 갈등을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이번 주민투표는 무상급식과 관련한 정책선거가 오 시장 진퇴, 10월 재보선과 내년 총선·대선, ‘복지 포퓰리즘’ 등을 둘러싼 정치선거로 비화하며 갈등이 더욱 격화됐다. 그 결과가 바로 양극화된 투표율이다. 이는 갈등 조정자 노릇을 해야 할 지방자치단체장이 자신의 책무를 망각하고 되레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살 만하다.
주민투표 개함 기준 33/3%를 웃돈 투표율을 보인 곳은 서초구(36.2%)와 강남구(35.4%), 두 곳뿐이다. 송파구(30.6%)도 전체 투표율 25.7%보다 높은 30% 이상의 투표율을 보였다. 세 곳은 ‘강남 3구’로 불리는 대표적인 ‘부자 동네’다. 반면 투표율이 가장 낮았던 금천구(20.2%), 관악구(20.3%), 강북구(21.7%) 등은 상대적으로 서민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소득수준에 따라 투표율이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같은 강남구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확인됐다. 부유층이 밀집한 도곡2동 타워팰리스 A동의 투표율은 59.6%인 반면, 다세대 원룸이 많은 역삼1동 투표율은 19.5%로 두 지역의 투표율 차이는 40%포인트를 넘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계급 갈등이 첨예하다는 사실, 혹은 사회적 균열 구조가 공고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다.
아직 정확한 수치로 확인하긴 어렵지만, 세대 갈등과 이념 갈등, 주민 갈등도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여러 한나라당 의원들은 8월24일 투표 당일 “투표장에서 젊은 사람들을 볼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주민투표에 반대하는 이웃에게 폭력을 휘두른 일도 있었다. 투표를 이틀 앞둔 8월22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역 앞에서 투표 거부 캠페인을 벌이던 주민과 야당 소속 구의원 등 20여 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 서너 명에게 위협을 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구의원은 “펼침막을 들고 투표 거부를 호소하고 있는데, 갑자기 곤봉을 든 남성들이 나타나 거친 욕설을 퍼붓고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린 뒤 도망갔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도 있었지만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동작구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서울 지역 풀뿌리단체, 시민단체, 사회단체들의 연대체인 시민사회네트워크는 주민투표 뒤 이런 논평을 냈다. “주민에 의한 권력 감시와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마련됐던 주민투표 제도가 정치인의 신임을 묻거나 이념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것은 안타깝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을 견제하려고 만든 장치인 주민투표가, 주민을 들러리로 삼은 권력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입지를 다지려는 목적으로, 인민주권을 내세워 인민을 정치적으로 동원·배제하는 것’을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고 본다면, 이는 주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요소를 오 시장이 ‘제대로’ 활용했다는 얘기가 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흔히 진보주의자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절대 선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수 포퓰리즘과 진보 포퓰리즘 양쪽에서 활용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이를 증명하는 산 역사다. 캘리포니아주가 주민투표 등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12년이다. 이 지역은 기업·이익집단이 중심이 된 정당정치가 강해, 그 바깥의 개혁세력들이 조직이나 자금을 동원하기 어려웠다. 개혁세력이 이런 구조를 깨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포퓰리즘밖에 없었다. 부패한 정당정치를 주민의 손으로 직접 개혁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대중적 지지를 얻었고, 결국 주민발안과 주민투표를 제도화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곧 기득권 집단도 이 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기초 문서 작업, 주민 서명 받기, 광고 등 주민발안의 모든 과정을 돈을 받고 대행해주는 전문업체들까지 등장했다. 1970년대 말에 들어오면, 캘리포니아주의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우파 포퓰리즘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된다. 1978년 ‘제안 13’(Proposition 13)은 주민투표를 통해 재산세 감면에 성공한다. 이를 시작으로 사형제 부활, 동성애자 결혼 금지, 소수민족 우대정책 철회 등 많은 보수적인 정책이 주민투표로 결정됐다.
오 시장이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를 동원해 관제선거를 ‘사실상’ 주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캘리포니아에 비해 제도화 수준이 낮은 우리나라의 직접민주주의도 포퓰리즘으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일 수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권력을 누가 잡든, 주민투표를 악용할 수 있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투표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투표 확정 요건 33.3%와 투표 거부 운동도 딜레마를 남겼다. 주민투표법을 만들 때부터 투표율 기준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정부는 25%와 33.3% 사이에서 고민하다 주민투표가 남용될 우려가 있다며 33.3%로 결론을 내렸고, 국회도 이 안을 수용했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투표율이 낮다는 점이다. 2000년 이후 치러진 21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 투표율이 33.3%를 넘은 건 11차례다. 17대 대선과 함께 치러져 투표율이 이례적으로 높았던 2007년 12·19 재보선을 제외하면, 33.3%를 넘었던 선거와 그보다 낮았던 선거는 딱 절반씩이다. 주민투표는 이런 재보선보다 관심도가 떨어지고, 정당 등의 조직적 지원이 적기 때문에 투표율이 더 낮다.
이 때문에 주민투표안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쪽은 투표 참여 또는 거부 운동을 선거 전략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투표 거부 운동은 ‘당신의 한 표가 세상을 바꾼다’는 기존의 투표 독려 논리와 충돌한다. 특히 투표 참여를 강조해온 진보개혁 세력이 이번처럼 투표 거부 운동을 벌이게 되면, 유권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자기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투표를 거부하는 쪽은 A라는 의견을 지지하는데, 주민투표안엔 B와 C라는 의견밖에 없으므로 투표를 무효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논리지만, 평범한 유권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는 A 의견을 지지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대척점에 있는 C 의견을 지지하게 되는 현상도 발생한다. 실제로 2005년 7월 제주도 행정구역 개편 주민투표가 그랬다. 기존 시·군 4곳을 2개 시로 묶고, 단체장을 도지사가 임명하는 ‘혁신안’과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점진안’을 놓고 투표가 진행됐다. 혁신안을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은 투표 거부 운동을 벌였지만, 투표율은 확정요건을 조금 넘긴 36.7%. 혁신안 지지도는 57%, 점진안 지지도는 43%였다. 말하자면 혁신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투표자의 43%나 됐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혁신안을 통과시켜주는 데 한몫한 것이다.
주민투표법 입법에 깊이 관여한 김병준 전 참여정부 정책실장은 8월25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투표 확정 요건과 관련해 ‘25% 이상’ 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좀더 완숙해지면 고려해볼 수 있는 안’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는 또 총선이나 대선 등 투표율이 비교적 높은 선거와 함께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악용에 악용을 거듭 당한 주민투표이 기회에 주민투표법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는 현행 주민투표법이 정작 주민은 활용하기 어렵게 설계돼 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선 주민투표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비록 무위에 그쳤지만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물론, 주민투표법이 시행된 2004년 7월 이후 실시한 주민투표 사례들은 대부분 이런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경북 경주·포항시와 영덕군, 전북 군산시에서 2005년 치러진 방폐장 부지 선정 관련 주민투표는 중앙정부가 20년 가까이 끌어온 방폐장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제도를 악용한 사례다. 정부는 지원금 3천억원을 비롯한 여러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4개 지역에서 동시에 주민투표를 치르게 해 가장 찬성률이 높은 곳에 방폐장을 유치하겠다고 했다. 각 지역은 지역감정까지 유발하며 극심하게 경쟁했고, 주민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일방적인 찬성 논리뿐이었다. 특히 경주시는 방폐장 유치에 찬성하는 단체에만 20억원을 지원했다. 조직적인 부정선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는 주민투표안 접수부터 청구인 서명 확인, 투표 문안과 방식 결정까지 주민투표와 관련된 모든 일을 지방자치단체가 관할하도록 한 점이 큰 원인이다. 또한 투표운동 자금의 출처와 한도, 용처 등을 규정해두지 않아 이를 관리·규제할 방법이 마땅찮다. 권력 견제를 위한 주민투표 절차의 합리성과 공정성이 결여돼 있는 셈이다.
이런 사례들과 달리, 주민투표법이 시행되기 전인 2004년 2월 전북 부안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시한 방폐장 부지 선정 관련 주민투표에서 주민투표관리위원회 사무처장을 지낸 하승수 변호사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방의회의 동의를 받지 못할 것 같으니 변칙으로 주민 서명을 받아 주민투표를 오용하는 것도 지금은 막을 수 없다. 투표 확정 요건 설정, 지자체에 과도한 권한 부여 등 처음부터 잘못 만든 주민투표법을 이 기회에 본래 취지에 맞도록 뜯어고쳐야 한다.”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역량을 강화할 방법을 고민할 필요도 있다. 주민투표를 비롯해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이 제도가 운영되는 정치·사회·문화적 배경과 시민의 주체적 역량이 부족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탈리아 사회학자인 로베르트 미헬스는 이미 100년 전 저서 에서 그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투표에서) 지도자들은 불분명하게 질문함으로써 대중을 손쉽게 기만할 수도 있고, 불분명하게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불분명하게 유도한 뒤 그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 투표는 절대적이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그 본질로 인해 능란한 사기꾼의 지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는, 대중의 능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한 인민투표는 민중의 자유에 대한 암살 행위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 주민투표도, ‘보편적 무상급식’과 ‘선별적 무상급식’이라는 원래 의제를 ‘전면 무상급식’과 ‘단계적 무상급식’이라는 가짜 의제로 비틀어 시민들에게 혼란을 줬다.
불완전한 투표제 넘어서기 위하여이렇게 보면, 주목할 대목은 대의민주주의 제도와 직접민주주의 제도 사이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영향의 정치’ 영역이다. 정치적인 결사, 집회·시위, 표현, 양심의 자유 등에 기반을 둔 집단행동은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지만, 그 자체가 정책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다른 두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는 기반이 되고, 이들 제도에서 결정되는 정책의 방향을 선도한다. 이런 집단행동은, 제기된 쟁점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뿐만 아니라 그 쟁점을 가장 깊이 알고 있어 비교적 성찰적인 견해를 가진 당사자들에게서 나온다. 반면 주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제도에선 똑같은 1표를 행사하고 똑같은 의미를 부여받지만, 투표에 참여하는 이들과 해당 쟁점의 거리는 제각각 다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어떤 문제를 투표에 부치면 곧 비판적인 민의가 제도적으로 반영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대의기구 밖에서 나오는 사회적인 목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또 “시민사회 세력의 민주적 의사표현 능력, 성찰성, 상호 존중 등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식적인 제도만 갖춰지면, 지금처럼 민주주의의 취지 자체가 왜곡된다. 소통의 새로운 채널, 좀더 유연하고 소통적인 거버넌스 방식을 실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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