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한국 헌법 1948년 제정) “사적 재산은 정당한 보상이 없이는 공적 이용을 위하여 수용될 수 없다.”(미국 연방헌법 1791년 제정) “수용은 오직 공공복리를 위해서만 허용될 수 있다. …보상은 공공의 이익과 관계자의 이익을 공정하게 형량하여 정해져야 한다.”(독일 연방헌법 1949년 제정) “사유재산은 정당한 보상하에 공공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일본국 헌법 1946년 제정)
5대4, 미국에서 벌어진 격론
어느 개인의 절대적·배타적 재산이 되기에는 땅은 한정돼 있다. 공공필요라는 개념이 토지에 부과되는 이유다. 헌법을 일별하면 다른 나라들도 정당한 보상을 전제로 토지를 수용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법학계에서는 한국처럼 민간기업에 땅 몰아주기가 쉬운 나라는 없다고 말한다. 개발계획이 나오면 ‘무조건 토지수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게 우리 현실이다. 반면 다른 나라는 이런 사업을 인정하더라도 공익성을 따지기 위해 해당 개발사업의 전망을 사소한 수치까지 꼼꼼하게 쪼개고 들어간다. 고작 36만㎡짜리 개발사업을 두고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9명이 반으로 갈려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처럼 200만㎡가 넘는 땅덩어리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의 책상머리 판단과 형식적 공청회 몇 번으로 5개월 만에 통과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미국 코네티컷주 뉴런던시는 수십 년간의 경기침체로 도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낙후 지자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0년 들어 시는 1천 개가 넘는 일자리 창출, 세수 증대 등 시 재건을 위한 36만㎡에 달하는 도시개발계획을 승인했다. 개발사업 시행자는 땅을 사들였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고 강제수용권을 행사하겠다고 했다. 1997년부터 이 지역에 살던 켈로는 해안 경관이 빼어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데리는 1918년에 태어나 평생을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60년을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들의 집은 ‘우연히’ 개발지역에 포함됐다는 이유만으로 수용 대상이 됐다.
미 연방대법원은 2005년 이 사건의 강제수용에 대해 격론 끝에 대법관 5 대 4로 합헌 결정했다. 오코너 대법관 등 4명은 선출되지 않은, 따라서 유권자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민간법인이 강제수용의 주된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들어 반대했다. “이제 다른 사인의 이익을 위해 어떤 재산이든지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이 판결의 예기치 않은 후유증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 수혜자들은 대기업이나 부동산 개발업자 등 정치적 과정에서 과다한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합헌 의견에 섰던 대법관 5명도 “수용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수용에 따르는 어려움을 최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토지수용권을 행사하는 것은 필요하며, 이는 공공 토론의 대상”이라고 첨언했다.
이 판례를 2009년 헌법재판소 헌법실무연구회에서 발표한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판결이 있기 전에도 미국의 8개 주는 도시의 폐허 상태를 제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제개발 목적으로 토지수용권을 행사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는 공화당·민주당 의원들이 경제개발 목적의 토지수용권 행사를 제한하는 법률안을 제출했으며, 수십 개 주가 연방대법원 판결에 대응해 토지수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고 설명했다.
독일, 국민 생존 연결 사업에 제한
독일에서는 40여 년 전 관광사업을 위한 케이블카 설치가 문제가 됐다. 바트뒤르크하임시는 케이블카 사업자와 공동으로 관광사업을 위한 회사를 설립했다. 지분은 민간사업 시행자가 절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었다. 케이블카 설치를 위한 토지수용을 신청했지만 인허가 관청은 “공공복리 달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결국 시가 나섰고 토지수용이 이뤄지게 됐다. 해당 지역 토지 소유자들이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케이블카를 설치할 경우 노약자나 환자들이 쉽게 삼림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런 개발의 필요성은 공익 목적과 공공복리에 부합한다”며 “관광산업은 오로지 사업자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관광자원이 자치단체의 경제와 재정 능력을 신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산업자원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물론 관광에 대한 이런 입장이 토지수용이라는 강제적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익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이라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며 사업시행자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를 불허하며 토지 강제수용에 대한 이정표적 결정을 내린다. “공용수용은 법질서가 제공하는 다른 수단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경우에 한해 최후적으로 고려돼야 하는 보충적 강제 수단”이라고 전제한 뒤 “의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입법권자만이 공용 수단을 정당화하고 규율할 권능이 있다. 국가와 지자체 등은 공용수용을 정당화하는 공익사업을 입법자를 대신해 결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 판례를 소개한 김성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문에서 “경제적 사기업을 위해 특정인의 재산권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경제적 강자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사회적 취약자가 강자에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결과가 된다”고 했다. 모든 기업이 국부와 일자리 창출 등 일정 부분 사회적 공헌을 하는 측면이 있지만, 이는 기업활동의 부수적 효과로 발생하는 것이지 기업의 원래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독일에서는 전기·가스·상하수도·철도·도로·공항·항만 등과 같은 국민의 생존과 연결된 사기업에는 공용수용이 허용되지만, 전적으로 영리 추구가 목적인 사기업에는 예외적으로 엄격한 요건하에서만 토지 강제수용이 허용된다.
‘공공갈등의 예방과 해결에 관한 법률’ 시급
한국에서 토지수용에 대한 법적 연원은 일제 강점 직후인 1911년 4월에 나온 토지수용령에서 찾을 수 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도 일제시대의 토지수용령이 그대로 적용되다가 1962년 토지수용법이 제정·시행됐다. 헌법 제23조 3항은 어쨌든 토지 등에 대한 수용·사용은 오직 ‘공공필요’에 의해서만 허용되는 것이지 사익을 위해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공공필요라는 개념 자체가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이 헌법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이 때문에 부족한 공공부문 재원이나 경영 능력을 조달하려는 목적으로 민간기업에 공익사업을 맡기거나 지역개발을 허가해줄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인허가 관청 등이 헌법상 공공필요의 요건을 집요하게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녹색연합 녹색법률센터의 최재홍 변호사는 “일본은 공익성이 큰 공항을 만들 때도 10년 넘게 주민들과 협의하고 주민에게 이익을 주는 부분을 꾸준히 연구한다. 반면 우리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 순식간에 사업이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밀어붙이기로 끝난다”고 했다. 시민단체 등에서는 제정 단계에 있는 ‘공공갈등의 예방과 해결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 공익성을 내세운 민간 개발사업이 추진되기 전에 그 필요성을 따지는 길이 트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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