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거부한 병역거부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병역거부자로 대학원에서 평화학을 전공하며 를 쓴 임재성씨와 ‘전쟁 없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여성활동가 여옥씨에게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톨릭 국제연대단체 ‘팍스로마나’의 활동가로 드물게 국제 인권운동의 경험을 가졌고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엄기호 강사는 한발 떨어져 병역거부운동을 평가해줄 적임자였다. 세 사람의 좌담에 신윤동욱 기자가 사회를 맡았다. 5월17일 저녁 한겨레신문사에서 2시간 동안 진행했다.
사회: 10년의 병역거부운동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엄기호(이하 기호): 한국 사회는 몰라도 한국 사회운동에 끼친 영향은 확실한 것 같다. 가톨릭 대학생회 후배들을 보니, 병역거부가 등장하고 운동을 ‘자기화’해서 고민하는 경향이 생겼더라.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이 뭔지, 자기가 얘기하는 평화가 뭔지, 민주주의는 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사고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하더라. 예전에는 그냥 추상화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말이다.
임재성(이하 재성): 대학에서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이 군대에 가서 편지를 보내온다. 내용이 무겁다. 차라리 병역거부운동을 몰랐더라면 ‘몸으로 때우고 오는 2년’이라 생각했을 텐데, 고민과 자괴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예비군 훈련받는 친구들도 말한다. 급진적인 말을 하는 건 쉬운데, 예비군 훈련 거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여옥: 비폭력 저항에 영향을 끼쳤다. 2008년 촛불집회 때 비폭력 논의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비폭력에 대해 묻더라. 그동안 사회운동 안에서도 약함과 타협으로 오해받았던 비폭력 직접행동이 확산되는 데 병역거부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폭력의 구조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비협조, 양심적 거부가 작지만 분명히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사회: 대체복무제가 검토되다 백지화됐다. 이렇게 많은 전과자가 양산되는데도 도입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기호: 참여정부는 대체복무제 도입에 의지가 있는 정권이었지만, 사안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것 같다. 사회적 거부감이 큰 것은 맞지만, 어떻게 꼼수로 도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대체복무제는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정면 돌파하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고 북한과 군사적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대체복무제를 대중운동 방식으로 국민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도입하기는 어렵다.
“군복무 앞뒤로 바뀌는 심리”사회: 병역거부에 강하게 반대하는 세력은 누군가. 극우 반공주의자들과 보수 기독교 세력?
재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일반 예비역들의 박탈감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으로 작용한다. 병역이 워낙 도덕화돼 있어, 병역거부란 말 자체가 반도덕적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강하다.
기호: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 병역거부를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국가는 지켜야 하고 이를 위해선 개인이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재성: 어찌 보면 우리만큼 병역 기피 심리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나라는 없다.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다수다. 그런데도 일단 한번 다녀온 뒤엔 과거의 기피 심리는 묻어두고, 국가나 공동체 담론에 기대 다들 애국자가 되는 상황이다.
사회: 대중의 인식 상황을 보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허탈함도 들겠다.
재성: 여전히 양심이 무엇인지부터 얘기해야 한다.
“2008년 촛불집회 때 비폭력 논의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비폭력에 대해 묻더라.
그동안 사회운동 안에서도 약함과 타협으로 오해받았던
비폭력 직접행동이 확산되는 데 병역거부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 양여옥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
여옥: 거리에서 1인시위를 할 때 반응을 보면 달라지긴 했다. 운동 초기에 캠페인을 하면, 어르신들이 다짜고짜 책상을 뒤엎었다. 요즘은 다르다. 인상 찌푸리고, 혼자 웅얼웅얼하다가 간다.
재성: 나쁘게 보면 무관심해진 거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져 있고, 보통 사람들은 점차 무관심해지고.
여옥: 그래도 병역거부 이야기를 하면 ‘대안이 뭐냐’고 따지다가도, 대체복무제 얘기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사회: 징병제에 대해 대학생들이 느끼는 감수성에 변화가 있나.
기호: 굉장히 양극화돼 있다. 중간층이 별로 없다. ‘개인의 권리다, 이해한다’ 하면서 쿨하게 받아들이는 친구들은 확실히 늘었다. 다른 한편에선 반대하는 친구들 목소리도 강경해진 게 사실이다. 경쟁이 워낙 치열하니까. 나는 군대 가서 2년 썩어야 하는데 너는 뭐냐? 이런 심리다.
사회: 때로 사회화된 언어로 풀어내기 힘든 병역거부 사유도 있다고 들었다.
기호: 사회운동은 희생적이고, 신념에 근거를 두고, 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강하다. 그런데 ‘네가 군대 가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가기 싫다’는 건 이기적인 것, 나약함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나약함, 이기성이 운동의 근거이자 목표가 될 수 있느냐는 거다. 병역거부운동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모든 사회운동의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은 문제다.
여옥: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언어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얘기를 못한다. 왜 내가 병역을 거부하려 하는지. 그런 사람이 병역거부를 선언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계속 증명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경찰·검찰 조사는 물론, 감옥에 간 뒤에도 계속된 질문과 맞닥뜨린다. 그 과정을 버텨야 하는데, 이 사람들이 할 수 있을지. 이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참 난감하다.
사회: 외국 활동가들과 한국 병역거부 문제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 있나.
기호: 세계사회포럼에서 만난 한 친구는 한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 투표를 통해 정권까지 바꾸는 나라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과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던 나라에서 대체복무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 놀랍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병역거부를 위하여”사회: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 당사자들의 삶은 어떤가.
재성: 얼마 전 한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다. ‘무지 힘들게 살았을 거 같은데, 좋은 케이스가 없냐’는 거다. 사실 언론이나 대중이 병역거부자들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병역거부자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고통이 있지만, 힘들어도 잘한 결정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싶다.
기호: 요즘 대학생 가운데 상당수는 카투사, 학군단, 학사장교를 가서 자기계발 기회를 최대한 확보하려 한다. 누구나 군대 안 가려고 고민하던 시절과는 다른 양상이다. 취업을 위해 스펙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먹고살아야 해서 군대를 가기 어려운 친구들이 분명히 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만약 누군가 나는 먹고살아야 해서 군대를 가지 못하겠다는 거부자가 나온다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운동의 방향을 틀 수 있다. 보통 사람의 운동이 될 수 있는 거다.
사회: 어쨌든 징병제가 점점 사회적 관심이 될 텐데.
여옥: 병역거부운동이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군대 문제를 고민하는 더 많은 사람이 생겨나고 더 많은 단체가 나왔으면 좋겠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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