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OK?”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여성이 기쁨에 겨워 빗속으로 뛰어든다. 카메라는 비를 맞으며 춤추는 여성의 육감적인 몸을 훑는다. 생뚱맞지만, 거리의 사람들도 덩달아 춤을 춘다. 들썩이는 사람들 뒤로 태양이 빛난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모델 제시카 고메스가 출연하는 대출업체 광고다. 눈 밝은 시청자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지난 1~2년 사이 유명 연예인이 출연하는 대출 광고가 부쩍 늘었다. 배우 이보영·조민기·윤해영, 가수 이하늘·장윤정 등이 줄줄이 광고에 출연했다. 지난 2006~2007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배우 최수종·김하늘 등 일부 연예인이 대부업체 광고에 출연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고리업체를 광고한다는 도덕성 시비가 일었다. 연예인들에게 이미지는 생명이었다. 유명 연예인은 그 뒤 오랫동안 대출 관련 광고에 발길을 끊었다. 그래서 최근 연예인들의 광고 출현이 새삼스럽다.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의 자락을 하나씩 헤치고 보면, 요즘 시비가 일고 있는 저축은행 부실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업과 제2금융권의 살림이 빠듯해지자 벌어진 일이다. 영문을 살펴보자.
저축은행이 서민대출로 돌아온 이유
먼저 최근 연예인이 주로 광고하는 업체는 흔히 알려진 대부업체가 아니다. 업종이 다른 ‘저축은행’이다. 말하자면 ‘고리대금업체’가 아니라, ‘제2금융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연예인들이 광고에 출연할 명분이 하나 생긴다. 유명 연예인들은 여전히 대부업체 광고는 피한다. 산와머니 등 대부업체들은 아직도 무명 모델이나 만화 캐릭터 등을 등장시켜 홍보활동을 벌인다. 최근 러쉬앤캐쉬 업체 광고에 나온 명계남씨는 드문 예외다.
사실 돈을 빌리는 처지에서 대부업체와 저축은행은 별 차이가 없다. 이자율이 높기는 마찬가지다. 저축은행도 연이자는 원금의 40%에 육박하기도 한다. 은행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이들이 찾는 고리의 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바뀐 점은 대부업체들이 주도하던 서민대출 분야에서 저축은행들이 점차 영역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최근 저축은행의 광고가 늘고, 연예인들이 대거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저축은행들은 대출 분야에서 영업을 확장했을까. 저축은행이 오래 재미를 보던 부동산 시장에 지난 1~2년 사이 급격하게 찬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 지역의 주택 가격이 1.2% 빠진 것을 비롯해, 수도권 지역의 집값이 1.7% 감소했다. 올해 들어서도 주택 가격은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건설사들이 먼저 타격을 입었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14일 발표한 ‘2010년 기업경영분석’ 자료를 보면, 지난해 건설업의 ‘현금흐름 이자보상비율’은 49.9%로 2009년의 182.1%에 비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 비율이 100%에 못 미치면 장사해서 번 돈으로 이자비용도 대지 못했다는 뜻이다. 체질 약한 건설사들이 최근 줄줄이 쓰러진 이유다. 시공능력 기준으로 100위권 기업 가운데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를 신청한 건설사는 이미 29곳에 이른다. 올해 들어서도 시공능력 기준 100대 기업사 가운데 7곳이 좌초했다. 특히 4월 들어 40위 안에 속하는 삼부토건(34위)과 동양건설산업(35)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건설사와 함께 대형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도 하나둘 주저앉았다. PF란 금융기관이 한 건설 사업의 수익성을 담보로 자금을 제공하고, 건설 사업이 끝난 뒤 수익을 회수하는 금융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금융기관이 ‘물주’로 나서고, 건설사 등에 돈을 빌려줘 사업을 벌이는 방식이다. 삼부토건 등도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통해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파국에 이르게 됐다. PF가 주저앉으며 타격을 받는 쪽은 건설사만이 아니었다. ‘물주’인 금융권도 부실채권을 떠안게 됐다.
금융 당국도 숨기는 부실 실상금융감독원의 자료를 보면,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PF 대출은 모두 25조원에 이른다. ‘물주’들이 돌려받아야 할 돈이 그만큼이다. 그 가운데 올해 2분기에 갚아야 할 돈만 13조8천억원이다. PF를 둘러싼 ‘5~6월 위기설’이 유령처럼 건설업계와 금융업계를 떠도는 이유다. 특히 금융업계에서도 약한 고리인 저축은행의 위기감은 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저축은행들의 부동산 PF 대출 잔액은 12조2천억원에 이른다. 저축은행 전체 대출 잔액의 18.9%에 해당하는 액수다. 이 가운데 회수하기 힘든 부실채권의 비율은 9%(1조원) 선이다. 저축은행의 PF 대출 비율은 일반은행과 비교해도 유독 많다. 일반은행의 대출 가운데 PF 관련 대출액의 비율은 3.2%(38조7천억원) 수준이다.
저축은행의 PF 관련 대출이 유독 많은 이유는 뭘까. 저축은행의 무리한 사업 확장에 원인이 있다. 저축은행의 본업은 일반은행 서비스에서 소외된 중소기업과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서비스다. 그런데 여기에서 돈이 그다지 남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저축은행들은 부동산 PF 시장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정부지로 치솟던 부동산 가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저축은행들도 아파트 가격 상승세를 타고 빠르게 성장했다. 마침 정부가 저축은행 대출 규제를 완화한 것도 컸다(40~41쪽 기사 참조). 저축은행이 본업인 서민금융은 내팽개치고 부동산 PF 대출에 ‘올인’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그렇지만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시작되자 건설사에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어려워졌다. 돈을 회수하지 못한 저축은행의 부실이 곰팡이처럼 번졌다. 지난해 PF 대출의 연체율이 24.3%에 이르렀다. 부동산 PF가 더 이상 돈줄이 되지 않자, 그나마 자금 여력이 있는 대형 저축은행들은 서민대출 분야로 급선회했다. 저축은행이 비운 자리에 빠르게 정착한 대부업체들은 서민대출에서 ‘돈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저축은행들이 지난해부터 대거 광고비 예산을 늘리고 서민 금융 분야를 확장한 배경이다. 그나마도 재정 여건이 건강한 일부 저축은행의 얘기다. 나머지 대부분의 저축은행은 부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축은행들의 금고 사정은 어느 정도일까. 금융 당국도 정확한 실상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11월 정부는 국회 정무위원회에 저축은행의 PF 대출 부실 현황을 보고했다. 물론 회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정무위 국회의원들에게 배포된 설명자료도 현장에서 회수됐다. 섣불리 저축은행의 부실 상황을 드러냈다가 자칫 예금자들이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하는 ‘뱅크런’ 사태가 올지 모를 일이었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저축은행 8곳이 파산할지 모른다는 보도도 나왔다. 금융위원회는 보도가 나온 날 바로 해명자료를 내고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사이 흉흉한 억측이 시장을 맴돌았다.
71개 중소 저축은행 중 32곳 파산 위험
실상을 파악하려고 은 김광수경제연구소가 작성한 ‘금융권의 부동산 PF 부실 분석’ 보고서를 넘겨받았다. 보고서는 김광수경제연구소가 금융감독원의 지난 연말 기준 통계를 분석해 작성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저축은행의 부실은 곪아서 악취가 나는 수준이었다. 시장의 가늠보다 나빴다. 우선 자산 1조원 이상인 24곳의 비상장 대형 저축은행 가운데 10곳이 특별한 조처가 없으면 1년 안에 파산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여기에는 지난 2월 영업정지 조처를 당한 부산·대전 등 저축은행들도 포함됐다. 또 6곳은 수익구조 악화로 잠재적 부실 증가 위험이 높은 것으로 풀이됐다. 연구소는 저축은행들의 당기순손익, 예대마진율, 부실채권 규모와 비율, 자기자본비율 등을 종합해서 이런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주식시장에 상장한 저축은행도 위태위태했다. 같은 분석 방법을 통해 10개 상장 저축은행을 보니, 2곳이 1년 이내 파산할 위험이 컸고, 2곳은 잠재적 부실 증가의 위험이 컸다. 또 중소 규모의 71개 저축은행 가운데서도 32곳이 1년 안에 파산할 위험이 높았고, 잠재적 부실 위험이 큰 곳도 7곳이었다. 수익을 개선하려면 경영 개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곳도 16곳이나 됐다. 보고서는 또 저축은행 가운데 상당수가 지출과 수익 자료를 분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연구소는 “저축은행의 정기예금 및 정기적금 금리는 대략 5% 전후로 나타나지만, 저축은행이 실제로 지급하는 총이자비용을 총예수금으로 나눠보면 실질차입금리는 2%대에 불과하다”며 “예수금과 지급이자를 분식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저축은행의 부실은 연구소가 분석한 수준보다 더 나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저축은행은 사실상 총체적 부실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고 풀이했다.
금융 당국으로서도 저축은행은 마냥 내버려둘 수 없는 ‘폭탄’이었다. 지난 2월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영업정지라는 강수를 둔 까닭이다. 그러나 김광수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폭탄의 폭발력과 숫자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직 제거해야 할 뇌관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금융 당국은 일단 공적자금을 이용해서 저축은행들의 부실을 제거하는 방안으로 기울고 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 4월20일 국회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의 구조조정기금 예산 3조5천억원으로 (저축은행 PF 부실채권) 매입을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사실 나랏돈이 저축은행의 구조조정에 쓰이는 것은 어느 정권도 반기지 않는 방법이다.
피하기 힘든 공적자금 투입앞선 정권들도 저축은행의 누적된 부실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방법을 피했다. 오히려 저축은행 규제를 완화하거나, 인수·합병을 유도하는 식의 ‘꼼수’를 부렸다. 공적자금 투입은 곧 정부의 금융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고, “나라 세금을 낭비했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당이 다른 금융권의 돈을 끌어다 저축은행의 부실을 채우는 방안을 원하는 반면, 야당이 나서서 공적자금을 쓰는 안을 주장하는 이유다. 금융위원회가 나서서 결국 공적자금을 쓰겠다고 밝힌 이유는 그만큼 저축은행의 부실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공적자금이 저축은행의 개혁으로 이어질까. 아직은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많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공적자금만 쏟아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금융 당국의 안이한 관리·감독과 저축은행 대주주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통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관리·감독이 소홀하면 저축은행의 부실이 다시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은 “800조가 넘는 가계 부채의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라 걱정이다. 지금 저축은행 부실을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 폭탄을 감당할 수 없다. 건설업과 저축은행의 거품을 빨리 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실로 이미 회생 불가능해진 저축은행과 건설업체들을 빨리 시장에서 빼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의 저축은행 ‘대수술’이 어디까지 갈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저축은행 광고에서 비싼 이자의 대출을 하라고 속삭이는 연예인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1153A4">저축은행 왜 생겼나?</font>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채 양성화했지만 사금고로 악용되기도</font></font>
저축은행이 뭐지?
저축은행의 시작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8·3 사채 동결 조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채 동결 조치란 당시 사채에 허덕이던 기업들을 구제하려고 사채 상환을 3년 넘게 동결한 정책을 말한다. 정부가 ‘긴급명령’ 형식으로 내린 이 결정 때문에, 당시 기업들에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개인들의 희생 위에 기업들을 살린 전형적인 개발지향형 정책이었다. 정권은 사채 동결 조치에 이어 사금융 양성화 방안으로 상호신용금고법을 제정했다. 저축은행의 전신인 상호신용금고는 이렇게 탄생했다. 쉽게 말해 사채를 양성화·제도화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렇게 등장한 상호신용금고의 본업은 지역에 밀착해서 일반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서민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금융서비스다. 그렇지만 외부 감시가 소홀해 몇몇 물주들의 사금고 구실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으로 이름을 바꾼 이유도 그 과정에서 생긴 오명 때문이었다. 2000년 상호신용금고가 벤처투자자들의 자금줄 구실을 하면서 비리에 무수히 연루된 탓이 컸다. 당시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등 벤처 관련 비리에 모두 상호신용금고가 연루됐다. 업계는 곧 이미지 개선 차원에서 명칭 변경을 요청했고, 이듬해 저축은행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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