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에서 뛰쳐나온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얼마나 될까. 매년 2% 정도로 추산된다. 평균 재적 인원이 3700여 명인 사실을 고려하면 매해 70명 정도다. 실험실을 뛰쳐나와 선택한 길은 변리사, 의사, 변호사부터 기자, 대안학교 교사, 연극배우와 노동운동가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늘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것으로 주목을 받지만 카이스트는 때로는 훈장처럼, 때로는 트라우마처럼 그들을 따라다닌다. 지금의 카이스트 상황은 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외환위기 거치며 삭막해진 분위기
황경(35)씨는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과 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최근 김곡·김선 감독의 장편영화에도 이름을 올렸다. 94학번으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1990년대 징벌적 등록금이나 영어 강의가 없어도 충분히 경쟁적이고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한계점까지 몰리는 환경이었어요. 그래도 그나마 그때는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10년 전이라고 해서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황씨는 “그때는 학사경고를 받아도 옆 친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숨통은 트인 상태였다”고 말했다. 현재 캐나다에서 노사관계학으로 박사학위과정에 있는 노성철(34)씨는 “다만 등수를 매겨 누군가를 도태시키는 경쟁이 아니었다”며 “낮은 학점을 야구 경기의 투수 방어율에 빗대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낮은 성적에도 성장하는 자 특유의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3~4개월 간격으로 무려 6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사태도 있었다. 당시 언론은 매년 전체 학생의 15% 이상이 학사경고를 받고, 그것이 3번 누적되면 제적되는 엄격한 학사관리 때문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과도한 경쟁이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식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았다. 카이스트는 달라졌을까. 누적 3회 제적이 연속 3회 제적으로 학칙이 완화된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여전히 학사관리는 엄격하게 이뤄졌고 구성원 사이의 경쟁은 강조됐다. 1997년에는 카이스트 입학생 1등부터 300등까지의 성적을 학교본부에 게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산업경영학과 94학번이던 김하늬(35)씨는 당시 학생회 간부였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다. 김씨는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게시물은 철거됐고 경쟁 우선에 대한 성토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학교가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다 그해 외환위기가 터졌다. 학생들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외환위기 전에는 학교에서 뭐라고 하든 간에, 학점이 잘 안 나와도 어떻게든 취직은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학생들 사이에 있었다”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회 전반으로 유포됐고 카이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카이스트는 이런 분위기로 2000년대를 맞았다. 2006년부터 카이스트에서 서남표 총장의 카이스트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김동환(23)씨가 말하는 학교 분위기는 1990년대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학생들끼리의 소통에 벽이 생겼다. 김씨는 “장짤(3.0 이하의 학점으로 징벌적 등록금을 내는 상황을 뜻함. 장학금 짤림의 줄임말)이 돼도 친한 친구들끼리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며 “영어 강의로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소통이 줄고, 징벌적 등록금 제도로 학생들 사이에 말 못할 고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한 사립대 로스쿨 1학년이다. “경쟁이 치열한 정도만 따지면 여기가 더하다”며 “하지만 스트레스가 더하냐 하면 그것은 비교하기 힘들다. 경쟁 자체가 아니라 경쟁의 방식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오래된 자문, 존재의 이유
현재의 비극은 외부에서 강요된 측면도 있지만 카이스트 내부에서 상당 기간 문제를 알고도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동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재료공학과 90학번이다. 그가 입학한 1990년은 카이스트가 일종의 과학기술자 사관학교라는 국가 주도의 목표의식이 분명한 시기였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학원을 설립하고, 이어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이 학부를 설립했다. 그 옳고 그름을 떠나 존재 이유가 분명한 시기였다. 이 센터장은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자 다른 대학들이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길러내기 시작했다”며 “카이스트의 원래 설립 취지는 다한 셈이다. 그래서 카이스트 외부에서 존재 이유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신자유주의 경쟁 시스템을 적극 도입했고, 여기에 존재 이유를 스스로 입증해야 했던 카이스트가 앞장서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지금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카이스트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며 “극단적으로 말해 카이스트가 MIT가 되고 하버드가 된다고 해서 카이스트의 존재 이유가 해결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실험실을 나온 사람들이 말하는 대안은 무엇일까. 조심스러워했다. 떠나 있는 상태에서 구체적일 수도 없었다. 자신들이 다른 길을 선택하며 느꼈던 필요를 근거로 말을 이어갔다. 김하늬씨는 “전공을 살리는 일도 있지만 최소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치고 자연스럽게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과학고→카이스트 진학’으로 자신의 진로를 너무 일찍 정해버린 학생들에 대한 당연한 배려라는 것이다. 황경씨는 “1등이 아니더라도,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하게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카이스트는 지금까지 섬처럼 존재해온 것이 사실”이라며 “이제는 사회와 어떻게 소통할지, 자신들이 배우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먼저 고민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제는 1급 과학기술자만이 아니라 1급 기술정책 입안자도 배출할 수 있도록 카이스트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전환점을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외부에선 우리를 잘 모른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슈화에만 골몰하는 언론도 문제라는 지적을 빠트리지 않았다. 노성철씨는 “1996년 당시에는 외부에서는 우리를 잘 모른다는 인식이 있었다”며 “단순한 시각으로 한쪽을 낙오나 실패로 몰거나 때로는 별종의 세계로 몰아가는 데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황경씨는 “학생들이 그 안에서 벌써 4명이나 숨졌는데 애도하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며 “언론은 앞장서서 슬픔 이전에 비판하고 분석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는 일부터 앞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황경씨는 “단순히 카이스트라는 특수집단의 문제로 보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을 막을 것”이라며 “다른 대학들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동 센터장도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도록 차분하게 도와줘야 한다”며 “특히 서남표식 개혁을 지지하는 내부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함께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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