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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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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질서를 흔드는 핵폭탄, 원전

‘역사적 트라우마’ 방사능 유출이 일본의 ‘메이와쿠’ 전통과 안전 신화 흔들어…

재건 속도도 원전 문제에 좌우될 전망
등록 2011-03-23 15:39 수정 2020-05-03 04:26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1921년에 간행한 이라는 책자에는 조선인의 특성으로 ‘사상의 종속’ ‘문약’ ‘심미 관념의 결핍’ ‘공사 혼탁’ 등이 열거돼 있다. 거기에는 “일본인에게 동화돼야 하는 조선인의 민족성”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인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했을까? 같은 시기 이라는 책에서는 ‘무용’(武勇) ‘수행’ ‘동정’ ‘공익’ ‘국가’ 등이 일본인의 특성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라는 당시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 있지만 실제로 일본인들은 이 덕목을 자신들의 본성인 양 전 사회적으로 교육했다. 이 과정에서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메이와쿠’(迷惑·민폐),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앞세우는 ‘나카마’(仲間·동료) 등이 더해졌다. 이어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며 ‘안전’과 ‘신뢰’의 신화를 덕목으로 추가했다.
지난 3월11일. 진도 9의 지진과 뒤이은 쓰나미로 일본 사회는 일순 동요했지만 여전히 ‘동정’ ‘공익’ 등을 앞세운 일본인 특유의 근성은 유지되는 듯했다. 이튿날 기적적으로 생환한 가족들의 이야기, 헌신하는 구조대 등이 언론에 등장하면서 특유의 공동체 중심 사회라는 이미지를 이어갔다. 이때까지 정부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안전에 대한 믿음은 굳건해 보였다. 2010년 칠레의 대지진이나 2005년 미국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발생한 약탈 등 혼란은 일본에서 볼 수 없었다. 지진 발생 뒤 이틀 동안 물과 주먹밥만으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동요하지 않는 이재민들의 모습에 해외 언론은 경탄했다. 일본 동북부 피해 지역 곳곳에서 가족을 잃은 이재민은 숨죽여 울고, 가족을 찾은 이재민은 기쁨을 감추는 모습이 연일 화제였다.

본능처럼 학습된 질서의식

지난 3월15일 〈AP통신〉은 가장 큰 지진 피해를 입은 동북부 지역을 돌아보고 “사실상 정부 기능이 마비된 대혼란 속에서도 약탈과 절도를 찾아볼 수 없다”며 “화를 내거나 불친절한 일본인들이 없다는 사실도 놀랍다”고 보도했다. 박전열 중앙대 교수(일본연구소)는 “일본인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교육받은 재난 매뉴얼대로 냉철한 대응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공동체의 중요성 등을 본성처럼 끊임없이 교육받으며 살아가는 일본 지역사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탈 행동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3월17일 일본 도쿄 중심가인 시부야역 앞 한 편의점의 라면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한겨레 도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 3월17일 일본 도쿄 중심가인 시부야역 앞 한 편의점의 라면 진열대가 텅 비어 있다.한겨레 도쿄=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하지만 이런 찬사도 잠깐이었다. 일본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진도 9의 대지진과 쓰나미도 흔들지 못한 일본 사회에 균열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원전이다. 방사능 피폭은 일본인에게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다. 일본 국민은 히로시마에서만 13만 명, 나가사키에서 6만6천여 명이 사망한 1945년 원폭 투하를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피폭 사망자까지 합하면 30만 명에 이르는 죽음을 학습으로 뇌리에 간직하고 있다. 박 교수는 “지진과 쓰나미만이었다면 재난 구조에 집중하면서 재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겠지만 원전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불안감은 또 다른 차원”이라며 “원자력이라는 공포가 역사 속 피폭 트라우마와 만나 혼란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항 고려대 HK연구교수는 “원전 사고로 도쿄가 피폭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는 현재의 생존에 매달리게 만들었다”며 “원전의 공포가 일본인들의 학습된 질서의식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무슨 사건만 있으면 일본 사람들의 질서정연함을 역사적·심리적 민족성의 영역으로 치환하는데 그 논리의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 원전으로 인한 혼란”이라며 “다만 재난 대비 매뉴얼을 수십 년 동안 연습해온 만큼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원상태로 복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가 신뢰위기 자초해

원전에 대한 트라우마 못지않게 일본을 동요시키고 있는 것은 안전 사회에 대한 구성원 간의 신뢰 붕괴다. 도쿄에 머물고 있는 한 중견기업의 회사원 김아무개씨는 “일본 사람들부터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며 “주재하는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다들 정부 발표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외신 보도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원전 사고로 도쿄가 피폭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는 현재의 생존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원전의 공포가 일본인들의 학습된 질서의식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김항 고려대 HK연구교수

지금껏 일본 정부의 원전 상황 발표를 보면 신뢰를 잃기에 충분했다. 지진 발생 직후인 3월11일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방사성 물질이 누출됐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다음날인 12일 제1원전에서 정상치의 8배에 이르는 방사선이 검출됐다. 당시에도 “심각한 방사선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국 15일 원전 4호기에서 폭발이 있었다. 이때도 장관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우려가 커지고 비난이 빗발치자 결국 태도를 바꿨다. 같은 날 장관이 “나도 정보가 부족하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는 관방장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를 잃은 일본 정치권 전체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일본 언론은 연일 맹공이다. 등 미국 언론들도 “일본 정부가 원전 위기사태에 대해 솔직하지 않은 대응으로 일관해 리더십 부재를 노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도쿄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재난지역임에도 침착한 대응과 질서의식으로 주목받던 동북부도 들썩이고 있다. 지난 3월16일 사토 유헤이 후쿠시마 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주민들의 걱정과 분노가 폭발 직전”이라고 말했다. 결국 제한송전이 이뤄지고 있는 도쿄에서는 지난 3월17일 지진재해와 원전사고를 맞아 무능한 대처로 일관하는 간 나오토 총리 사퇴를 촉구하는 이례적인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물론 시민사회의 혼란이 약탈 등 극단적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현재의 혼란이 일본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고는 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안전지역으로의 이동이나 사재기 등은 자위적 생존 방편 수준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일본의 시민의식은 건재하다는 것이다. 1945년 원폭 투하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1923년 간토 대지진, 1995년 고베 지진 등의 경험도 시민의식을 순치시킬 것으로 본다.

다시 문제는 원전이다. 박 교수는 “재도약의 모멘트를 찾고 있던 상황에서 이번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원전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 그리고 차후에 원전 관리를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따라 재건 시기가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도쿄(일본)=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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