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사장들의 자녀, 특히 딸들은 모두 삼성에 다닌다는 말이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이 살짝 털어놓는 얘기다. 대학생들이 취업을 가장 선호하는 일부 대기업이 임원 자녀에게 입사 때 혜택을 주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별채용을 계기로 제기된 ‘현대판 음서제도’ 논란이 정부 부문에서 민간 기업으로도 확산될 조짐이다.
“삼성 임원 자녀 가산점이 당락 좌우”삼성은 대기업의 임원 자녀 채용 우대의 대표적 사례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임원 자녀에게는 채용시 가산점을 부여하는 ‘임원 자녀 우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의 채용 절차는 ‘서류심사→직무적성검사(SSAT)→면접’ 3단계다. 임원 자녀에 대한 가산점은 면접점수 100점 기준으로 5~10점이라고 한다. 삼성은 의 확인 요청에 대해 제도 운영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세부 규정 공개는 거절했다. 규정상으로는 20년 이상 장기근속 직원 자녀도 우대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임원 자녀 위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계열사의 한 간부는 “응시자 간 점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의 가산점은 사실상 당락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임원은 “계열사 사장급 자녀들은 성적에 상관없이 입사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삼성 고위 임원들의 경우 삼성에 다니는 자녀가 유달리 많다. ‘삼성의 2인자’로 불리는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전 그룹전략기획실장·부회장)은 두 아들이 모두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장남은 핵심 부서인 재무팀에서 경리·회계 업무를 담당해, 재무통인 부친과 똑같은 길을 밟았다. 현재 ‘우수사원 양성코스’에 선발돼 미국 연수 중인데, 삼성전자에서는 아예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차남은 홍콩의 외국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삼성전자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내며 이건희 회장의 ‘집사’로 불렸던 최도석 삼성카드 부회장의 경우 아들은 삼성전자에, 딸은 금융계열사에 입사했다.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장인 김순택 부회장의 아들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전자와 함께 삼성의 두 축을 이루는 삼성생명의 이수창 사장의 두 딸은 금융계열사에 입사했다. 그중 한 명은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다닌다. 삼성그룹 홍보책임자를 지낸 이순동 삼성미소금융재단 이사장도 두 딸이 모두 삼성 계열사에 다닌다. 권상열 삼성생명 부사장의 딸도 아버지와 같은 회사에 다닌다. 배정충 삼성생명 부회장과 이상완 삼성사회공헌위원회 사장은 딸이 삼성 계열사에 입사했다. ‘황의 법칙’(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이론)으로 유명한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의 딸도 삼성전자에 입사했는데, 지금은 그만뒀다. 한용외 전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은 아들과 딸이 모두 삼성에 입사했다. 이 중 아들은 삼성전자가 운영하는 디자인스쿨에 다니다가 성적 우수자로 특채됐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전직 임원은 “외환위기 이후 삼성의 사세가 급성장하면서 사장단 수도 늘어나고, 고위 임원 자녀의 입사도 급증했다”고 말했다. 은 삼성에 고위 임원 자녀의 근무 현황에 대해 확인을 요청했으나, 삼성은 “개인 신상 문제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답해왔다.
정치인·관료 자녀 인사 청탁도 많아
다른 주요 대기업은 삼성처럼 규정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관행적으로 고위 임원 자녀에 대해 입사 때 우대를 해준다. 현대·기아차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ㅊ 부회장, ㅇ 사장 등 고위 임원의 자녀가 상당수 근무한다”면서 “회사에서 고위 임원 자녀에 대해서는 입사시 우대해주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SK그룹의 고위 임원은 “기업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디나 그런 관행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고 최종현 SK 회장은 생전에 최고경영자 교육 때 “자기 자식을 자랑스럽게 넣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SK의 경우 주력 계열사고 대우도 좋은 SK텔레콤이 임원 자녀들의 선호 대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LG 고위 임원은 “임원 자녀에 대해서는 입사시 배려를 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하지만 그룹 최고경영자인 강유식 LG 부회장과 남용 LG전자 부회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등의 자녀 중에는 입사자가 없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선호 직장 중 하나인 은행권도 고위 임원 자녀가 많다. 최근 경영진 내홍을 겪고 있는 신한이 대표적이다. 라응찬 신한지주 회장과 신상훈 사장의 아들, 이백순 신한은행장의 딸이 은행에 입사했다. 4대 시중은행의 한 간부는 “당사자나 회사가 모두 쉬쉬하니까 정확히 집계된 적은 없지만 임원 자녀는 상당수에 달한다”면서 “전체 임직원이 1만5천여 명인데 전·현직 임원 자녀가 1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의 지점장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임원 자녀는 100% 입사 혜택을 줬다”고 말했다.
물론 대기업 임원 자녀 중에는 회사의 혜택 부여와 상관없이 자기 실력으로 당당히 입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는 “상당수는 굳이 삼성에 들어오지 않아도 다른 좋은 직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라고 말한다. 문제는 고위 임원인 부모의 후광이 없었다면 자력으로 입사하기 어려웠을 사람들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그룹 실세로 불리는 한 부회장의 아들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 임원은 “일부 고위 임원 자녀는 상대적으로 업무 부담이 크지 않은 부서에 배치된다”면서 “삼성에 들어왔다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임원 자녀들의 경우도 삼성 근무 경력이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현대차그룹의 한 간부는 “고위 임원 자녀 중 일부는 주위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업무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 고위 임원 딸들의 경우 결혼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많다. 이를 두고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다양한 스펙을 쌓듯이, 삼성 고위 임원 자녀들도 삼성 입사를 더 좋은 미래를 위한 일종의 스펙 쌓기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대기업은 임원 자녀 우대보다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 관료, 언론계 간부의 낙하산식 인사 청탁이 더 심각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10위권의 한 대기업 간부는 “감독이나 인허가권을 쥔 정부부처의 고위 관료로부터 자녀나 친척 인사 청탁이 오면 정말 난감하다”고 말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무리한 청탁이 줄어드는 추세지만, 부득이한 경우는 서류심사와 필기시험을 합격시켜서 면접은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털어놨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회사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A부처 장관과 B위원회 위원장의 자녀들이 회사에 들어왔다는 얘기가 파다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위인 이상주 삼성화재 상무는 장인이 대통령이 된 직후인 2008년 여름에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으로 영전했다.
“얼굴만 보아도 누구의 아들·딸인지 알아”대기업은 채용 때 공정한 평가와 부당한 인사 청탁 차단을 위해 지원자 정보를 가리는 ‘블라인드 면접’, 면접관으로 대리·과장을 참여시키는 ‘실무자 면접’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한다. SK의 고위 임원은 “최종 채용결정권을 제외한 나머지 채용 과정의 관리를 외부 전문기관에 맡기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채용의 공정성을 100% 보장하는 안전장치가 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블라인드 면접을 한다고 하지만 고위 임원의 자녀는 면접에 들어갈 때 이미 누구의 아들·딸이다 해서 다들 안다”고 말한다. 또 다른 4대 그룹의 고위 임원은 “사장이 인사담당자에게 직접 지시를 하면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느냐”면서 “다른 사람은 그 내막을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임원 자녀 우대를 평생 회사를 위해 기여한 임원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설명한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임원 자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더 크지 않겠느냐”면서 “삼성 비자금 사건 같은 내부고발의 위험성도 덜할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의 간부는 “임원 자녀의 경우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회사에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삼성 홍보팀은 “민간 기업에서는 다양한 인센티브 정책을 실시한다”면서 “민간 기업의 임원 자녀 입사 우대를 이번 외교통상부 사건과 동일한 시각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기업의 임원 자녀 우대가 헌법의 ‘기회균등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삼성은 대학생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직장 조사에서 매년 붙박이로 1위를 한다. 해마다 삼성 신입사원 채용시험 지원자는 10만 명에 육박하고, 경쟁률은 수십 대 1에 이른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ㅇ씨는 “졸업 뒤에도 바로 취업이 안 돼 재수·삼수도 흔할 정도로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고위 임원이라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주는 게 공정한 사회냐”고 반문했다. 고위 임원 자녀가 특혜의 기쁨을 맛보는 순간, 그 이면에서는 똑같은 수의 다른 일반 경쟁자들이 탈락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직원은 안 되고 임원은 된다고?
민간 기업이라고 직원 채용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당한 신입사원 선발은 법으로 금지한다. 지난해 연령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서 공무원과 공기업은 물론 민간 기업들도 사원 채용 때 응시자 연령을 제한하지 못한다. 남녀 차별도 남녀고용평등법에 의해 금지돼 있다. 이를 어기면 형사처벌을 받는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국 관계자는 “대기업의 임원 자녀 우대가 불합리한 차별에 해당하는지는 충분히 조사할 만하다”면서 “피해자의 진정이 들어와 조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위원회가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일부 사립대학에서 음성적으로 이뤄졌던 교수·교직원 자녀에 대한 입시 우대도 사회적 비판과 정부의 규제로 지금은 사라졌다. 입시 시즌을 맞은 교육과학기술부는 9월9일 주요 대학 처장들을 긴급 소집해 사전 단속에 나섰다. 교육부 대학교육선진화과의 송선진 사무관은 “예전에는 일부 대학에서 그런 관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말도 못 꺼내는 분위기”라며 “오히려 자녀가 지원하는 교수나 교직원은 입학 관련 업무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피제도(기피제도)를 엄격히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임원 자녀 우대는 노조의 반발을 살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 등 일부 대기업 노조는 이전부터 직원 자녀 채용 우대를 요구해왔는데, 특혜 시비를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대기업은 이런 문제점을 감안해 아예 고위 임원 자녀는 별도 정원으로 관리한다고 말한다. SK의 고위 임원은 “임원 자녀는 선발 정원 외로 별도 관리하기 때문에, 이들을 우대한다고 해서 다른 지원자가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임원 자녀 채용 우대는 우리 사회의 계층 고착화를 더욱 심화할 수 있다. 부자 부모를 만나 좋은 교육을 받고 대한민국 최고 직장까지 보장받아,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출세하는 갑(甲)과 그렇지 못한 을(乙) 간의 격차가 대를 이어 계속되는 이른바 ‘신분세습’이 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동과 관련해 “지금 시중에선 학부모들이 (좋은 자리는) 장관이나 고관대작의 자녀들이 다 차지할 텐데 뼈 빠지게 돈 벌어 자녀 교육을 해서 뭐하냐는 얘기가 돌고 있다”고 질타한 것이 민간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될 소지가 있다. 삼성의 일부 고위 임원 딸들의 경우 삼성에 들어간 뒤 삼성의 엘리트 직원과 결혼해, 아버지와 딸 그리고 사위가 완벽한 ‘삼성 가족’을 이루는 일도 드물지 않다.
임원 자녀 우대제가 기업 경영에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임원 자녀들이 입사는 물론 보직 부여, 승진, 급여, 교육에서 계속 혜택을 누린다면 다른 직원들로서는 얼마나 맥이 풀리겠느냐”면서 “그런 조직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SK의 한 부장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직원들은 모두 싫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고위 임원 자녀는 잘못을 해도 인사권자가 야단을 치거나, 고과를 나쁘게 주기 어렵다”면서 “부모와 자녀가 같은 회사에 근무할 때는 더욱 그렇다”고 털어놨다. 강성춘 서울대 경영대 교수(인사조직)는 “임원 자녀 우대제도가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전체 구성원의 동의와 투명성 등 절차의 공정성이 갖춰져야 한다”면서 “특히 사내외에서 제도 시행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관련 내용을 공개하는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식회사 공공성에 위배”
대기업의 임원 자녀 우대제의 뿌리는 총수 가족 중심인 한국 재벌의 후진적 지배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총수 자녀들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아무런 경영능력의 검증 없이 회사 임원이나 최고경영자로 초고속 승진하는 것이 관행화된 현실에서 임원 자녀들의 우대는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삼성 안에서도 몇 년 전 이 문제가 거론됐는데, 당시 이학수 부회장이 ‘할아버지·아버지가 만든 회사에 (그 자녀들이) 들어오는 게 뭐가 문제냐’고 일축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재벌 주력 기업의 대부분은 상장기업으로, 주식의 대부분을 일반 주주가 갖고 있다”면서 “(지분이 4~5%에 불과한) 총수 일가가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 자식이나 임원 자녀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주식회사의 공공성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도 “임원이 회사에 기여했다고 해서 그 혜택을 자녀 입사시에 부여하는 것은 민간 기업에 허용된 권한의 범위를 이탈한 것 같다”면서 “임원 자녀 우대는 ‘재벌 총수-임원-자녀’에게로 이어지는 일종의 인센티브 구조를 통해 총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결국 (임원 자녀 우대제는) 정도의 문제 아니겠느냐”면서 “회사로서는 그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 시스템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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