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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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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보호, 기회 균등, 인권 존중

각계 오피니언 리더 37명에게 물어본 ‘대한민국의 정의’…
양극화·약자 피해·비정규직 등 부정의로 꼽아
등록 2010-08-20 17:02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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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시민사회·학계 등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오피니언 리더로 손꼽히는 인사 37명에게 물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의는 무엇입니까?”

답변은 다양했다. 하지만 이들의 답변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존재했다. ‘공정함’이었다. 기회든, 분배든, 자유와 권리든 못 가진 사람이 좀더 배려받는 게 공정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보수 인사 가운데서도 시장 자유주의적 가치인 ‘경쟁’을 정의로 꼽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무상교육에 찬성하는 사람도, 부자 감세에 찬성하는 사람도 하나같이 현재 상황을 ‘사회적 약자에게 불공정한 상태’로 여긴다는 뜻이다.

못 가진 사람이 배려받는 ‘공정함’

가장 많은 사람이 실현돼야 할 정의로 꼽은 것은 ‘사회적 약자 보호’와 이를 이루기 위한 ‘기회균등·공정분배’였다. 각기 표현은 달랐지만 절반 가까운 16명이 이를 꼽았다.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가 강해져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이를 지나치게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출발선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경쟁할 수는 없다”며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다. 영화배우 박중훈씨는 “약자를 배려하고, 강자가 불리함을 다소 감수하는 게 정의이자 상식”이라며 “그게 바로 인지상정, 측은지심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도 “가난한 자에게 더 분배하는 것이 정의다. 특히 이 시점엔 불평등의 구조화를 막을 공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 박주선 민주당 의원,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은 공통적으로 ‘기회 균등’을 정의라고 답했다. 하승수 변호사도 같은 뜻으로 ‘기회의 평등, 출발의 평등’을 꼽았다. 특히 인명진 목사와 하승수 변호사는 사회의 출발점에 선 청소년이 교육받을 기회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극화 해소’가 정의라고 답한 사람은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와 경제평론가 정태인씨였다. 특히 정태인씨는 “양극화를 교정하기 위한 복지 정책은 보조적으로 시행되고 있을 뿐이며, 공공 영역인 교육과 의료 역시 자산 분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됨으로써 기회 평등 자체가 무력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동체’ 혹은 ‘공존’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는 5명이었다. 최재천 변호사는 “정의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가치 체계이자 공공의 의사결정”이라며 “소유권이 모든 가치의 중심인 것처럼 되면서 ‘1 대 9의 사회’로 가고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90%가 ‘잉여인간’처럼 간주된다.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공공선이 무엇인지 찾고, 소유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남경필 한나라당 의원은 이를 ‘존중’이라고 표현하면서 “서로 같이 잘 살고, 같이 하자는 생각이 사회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힘의 불균형, 소통 부재, 밀어붙이기는 국민·조직·가정·개인 모두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는 “모두를 위해 동등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것”이 정의라고 했다. “연대가 무너진 곳에 비극이 온다”는 마이클 샌델의 말처럼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공동체여야 하는지,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게 안 교수의 주장이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도 “사회구성원들간의 배려와 협력이 정의”라고 말했다.

설문에 응해주신 분들(총 37명)

설문에 응해주신 분들(총 37명)

현역 정치인 4명 ‘사람답게 사는 것’

정의는 사람 그 자체, 혹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꼽은 이도 5명이었다. 흥미롭게도 각 정당에 속한 현역 정치인 4명의 생각이 여기서 만났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인권’이 정의라고 했다. “제도적 민주주의는 이뤄졌지만, 실질적인 민주화는 아직 안 됐다. 그래서 아직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다. 인권을 보호하려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정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쟁의) 결과까지 일정하게 보완할 수 있도록 법률가와 정치인이 인권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독일 철학자 칸트의 말을 인용해 “인간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을 정의라고 표현했다. 최 의원은 “정치 분야의 기득권자는 인간을 ‘표’로 보고, 경제 분야 기득권자는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데,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상황을 바로잡아 인간을 존엄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정의는 ‘휴머니즘’인데, 현재 한국 사회에선 “정의가 무성해야 할 곳이 황폐화돼, (힘들게 찾아내야 할 만큼) 귀한 사막의 오아시스”가 돼버렸다. 그는 “누구든 인격체로서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제대로 보장받아야 한다. 그게 헌법의 기본 정신”이라고 지적했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므로 모두가 자유로운 의견을 가질 권리 등 기본권을 갖고 있다는 건 침해할 수 없는 정의”라고 말했다.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은 정의를 ‘자유’로 정의했다. 김 의원은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자유”, 은 연구위원과 박 원장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로 내용은 조금 달랐다.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극과 극’인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과 변철환 민생경제정책연구소 상임이사는 각각 ‘상식’을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상식’은 매우 달랐다. 오 사무국장은 “권력을 통제하는 법질서”라고 본 반면, 변 상임이사는 “성장 정책과 복지 정책을 함께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와 보수 양쪽이 함께 꼽은 단어로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국민 중심, 자유와 평등, 자율과 책임의 원칙이 지켜지는 민주주의”가 정의라고 말했다. 반면 김창남 뉴라이트전국연합 대변인은 “좋은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결과”, 즉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의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아 발생한 가장 큰 문제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꼽은 답변자가 가장 많았다. 쪽방촌 주민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아 발생한 가장 큰 문제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꼽은 답변자가 가장 많았다. 쪽방촌 주민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진보·보수 모두 ‘민주주의’ 강조

현재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아 발생한 가장 큰 문제와 관련해선 대부분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꼽았다. △양극화(강원택 교수, 남경필 의원,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 △약자의 피해(최문순 의원, 이정희 대표, 박원순 변호사) △비정규직 문제(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은수미 연구위원) △불평등(인명진 목사, 하승수 변호사, 박상훈 대표, 윤여준 이사장, 최재천 변호사) △사회 안전망 부족(이민열 변호사, 남경필 의원)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윤여준 이사장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안 되면 정치·제도적 민주화도 흔들린다. 국정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이룰) 공정성에 대한 인식을 투철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승수 변호사도 “불평등이 심해지면 자유도 흔들린다. 루소가 에서 지적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 자기 몸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는 자유나 평등이 실현될 수 없는 사회”라고 우려했다. 박상훈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경제적 자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노동할 권리, 노조를 만들고 활동할 권리 등이 제대로 보장돼야 하고 노동자의 이익이 정치·정책에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세균 전 대표와 노회찬 대표는 정치인답게 부자 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 등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이 정의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김호기 교수도 “시장은 자율성도 보장해야 하지만, 그만큼 공공성을 결합시켜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다. 그런데 친기업 정책을 노골적으로 펴는 이명박 정부는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낮다. 이 때문에 시장은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부는 이에 대응하지도 못한다”고 비판했다. 김창남 대변인은 “국민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사업 강행을 ‘부정의’로 꼽았다.

선대인 부소장은 토건 세력과 정치 세력의 정경유착이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부정의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토건업체를 낀 재벌이 담합을 통해 엄청나게 큰 토건공공사업을 가져가고, 거기서 나오는 돈이 정치권에 비자금으로 들어간다. 정치권은 부동산 가격 거품을 떠받치려고 수백조원을 쏟아붓는데, 그 돈은 모두 서민이 낸 세금이다. 서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의 배를 불려온 게 ‘삽질 경제’ 패러다임인 것이다.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려면 하루빨리 부동산 거품을 빼야 한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아예 “토지공개념”을 정의라고 규정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과거사 청산”을,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지속 가능한 사회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를 정의라고 생각했다. 보수 진영의 선진화 담론을 이끄는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은 “효율과 공평, 성과에 따른 배분” 등을 정의라고 말했다.

정의 그 자체보다 정의에 도달하는 길, 즉 정의를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실현하려 노력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정의는 시대·사회·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형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경철 원장은 “나는 내 경우에 (비춰) 합당한 것을 정의라고 하지만, 이는 공적 정의와 충돌할 수도 있다. 정의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정의가 아닌 것 같다. 시장은 정의로운가, 공공의 이익은 정의로운가, 무엇이 정의인가 등을 놓고 타인의 의견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 내가 완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겸손이 정의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토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의견도 유사하다. “정의의 실질적인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시대와 사회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의 처지와 상황이 공론화되고, 문제를 공유하고, 해법을 찾는 공정한 의사소통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 정의의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물어야 한다”

박원순 변호사 역시 “완벽하고 이상적인 정의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찾기 어렵다. 다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도 “최근 상황을 예전 박정희 정권 시기와 비교하면 조금 나아진 것으로 볼 수 있듯 정의는 처해진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며 “현재 인식에 비춰 더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김훈씨는 독특한 의견을 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대신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이것이 정의인가, 불의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세상엔 전면적 정의도, 전면적 불의도 없다. 젊은이들이 구체적·개별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식견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조국 교수와 신진욱 교수, 두 개의 정의

공정한 분배냐, 도덕적 가치냐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두 사람은 모두 진보·개혁 진영에서 주목받는 소장학자다.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기반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정의론’엔 꽤 큰 차이가 있다.

조 교수가 생각하는 정의는 ‘공정한 분배’다. “각자의 노력과 노동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그에 걸맞게 공정하게 몫을 받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임금은 정규직의 반토막이고 사회적 처지도 나쁘다. 이건 ‘부정의’다. 정의의 반대말이 ‘효율’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최고의 효율은 최고의 정의다. 비용을 적게 들이려고 비정규직을 고용하지만, (공정한 분배를 받지 못한) 비정규직은 사회체제를 부정하고 저항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효율이 떨어지는 거다. 그건 ‘정의의 원칙’에 반해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 교수가 언급한 정의의 원칙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에서 제시한 정의의 두 가지 원칙이다. 롤스의 제1원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기본권과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평등의 원칙’이다. 제2원칙은 사회의 가장 약자에게 이익이 돌아갈 경우에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차등의 원칙’과 사회·경제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는 균등하게 분배돼야 한다는 ‘기회 균등의 원칙’이다. 조 교수는 “한국은 아직 롤스가 말한 정의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시장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에서 필요한 건 마이클 샌델이 아니라 롤스”라고 주장했다. 샌델은 롤스의 정의론에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가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공동체주의자’다. 그런데 약자가 배려받지 못하는 한국에서 공동체를 강조할 경우 “약자를 위해주면 공동체에 손해가 된다는 보수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우려다.

반면 신진욱 교수는 샌델의 정의론에서 ‘도덕적 가치’에 주목한다. 신 교수가 생각하는 정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성 원리”다. 이는 “개인들이 함께 자유롭고 행복하려면 어떤 사회적·도덕적 가치가 필요한지를 고민해야 풀리는 문제”다. 정의란 각 개인이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가치는 개인적 가치보다 중요하다. 샌델은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공공선, 도덕성, 시민의 연대 등을 강조한다.

신 교수는 “롤스를 건너뛰어 샌델로 넘어가면 위험하다”는 조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 발전이 단계적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인 자유가 만개한 다음에 공동체를 논의하자는 건 사회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2008년 촛불집회 때 등장한 구호엔 ‘함께 살자 대한민국’처럼 개인의 삶을 사회적 관계에 뿌리내리려는 열망과 공존의 열망이 가득했다. 이제는 개인의 자유를 공공적·사회적 문제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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