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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잠수정은 물귀신인가…북 어뢰는 소리 없이 쏘나

합조단 발표에도 남는 의문들… 교신기록·TOD 등 결정적 증거들은 논의도 안 돼
등록 2010-05-28 20:28 수정 2020-05-03 04:26
“어뢰가 나왔다”는 말로 천안함 논란은 종지부를 찍는 것일까. 5월20일 윤덕용 민·군 합동조사단장이 천안함 사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어뢰가 나왔다”는 말로 천안함 논란은 종지부를 찍는 것일까. 5월20일 윤덕용 민·군 합동조사단장이 천안함 사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더 이상의 질문은) 우리를 적으로 보는 겁니다.”

생때같은 46명의 목숨이 바다에서 길을 잃었고, 한 달여 만에 뭍으로 올라온 배는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50여 일 만이다. 그 배를 바다에 침몰시킨 ‘1번’ 어뢰를 쌍끌이 어선이 찾았다. ‘번’이라는 글자는 한글이다. 한글은 우리 아니면 북한만 쓴다는 말장난 같은 정부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어뢰는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으로부터 발사됐다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는 민·군 합동조사단(합조단)의 말을 지금으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다.

의문점을 캐묻는 질문에 ‘적’ 운운하는 정부 관계자의 극단적인 언사도 심정적 측면에서는 이해가 간다. “뭘 어떻게 더 보여달란 말이냐”는 답답함이 배어 있다. 믿어달라는 부탁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사실은 드러났다. 이제부터는 믿음의 문제다.”(한 한나라당 관계자)

그래도 다시 묻는다.

어뢰, 물기둥… 이야기는 끝난 것인가

“어뢰가 나왔다”는 말로 천안함 논란은 종지부를 찍는 듯하다. 어뢰를 발견한 쌍끌이 어선 선장까지 증인으로 등장해 극적인 순간을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그래도, 질문을 시작한다.

어뢰

북한 어뢰를 입증한다는 ‘1번’ 표시가 미사일 등 발사체에 주로 쓰이는 ‘호’와 다른 점, 어뢰 상태에 비해 글자의 파란색이 선명한 점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여기에 자신이 드러날 수 있는 표시를 남겼겠느냐는 질문까지 이어진다.

얼굴에 튄 물방울과 100m의 물기둥

좌초설, 제2충돌설 등이 제기된 배경에는 버블제트 효과로 발생하는 물기둥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지난 중간조사 결과 발표 당시 합조단이 “물기둥이 옆으로 퍼질 수 있다.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5월20일 발표에서는 “높이 100m, 폭 20~30m의 하얀 섬광 기둥을 봤다”는 초병의 증언이 추가됐다. 여기에 “천안함 좌현 견시병이 넘어진 상태에서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으며, 좌현 외벽 부분에 물이 차서 (병사들의) 발목이 젖었다”고 발표했다. 앞서 언론에서 물기둥에 대한 지적이 수차례 보도됐을 때는 왜 초병의 증언이 확보되지 않았는지, 100m 높이의 물기둥 아래에서 견시병은 왜 ‘물방울’밖에 맞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버블제트

합조단은 “선체의 용골이 위쪽으로 변형되고 외판은 꺾이고 선체는 절단됐다. 가스터빈실 격벽도 뒤틀리고 훼손됐으며, 함정의 중심을 잡아주는 함안정기에도 흔적이 남아 있고, 선저 부분에도 버블 흔적이 있다”며 “이는 버블제트로 인한 것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쳤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대목 또한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천안함 선체가 수중폭발로 훼손되는 상황까지만 보여준다. 합조단은 “시뮬레이션을 위한 계산이 너무 복잡해 아직 완전히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선체가 갈라지기 전) 중간까지의 상황만을 공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합조단은 골절과 열창 등이 관찰된 숨진 장병들의 상태가 바로 버블제트의 방증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뇌진탕이나 심한 열창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다른 가설을 주장한다. 또 버블제트의 결과로 나타났어야 할 죽은 물고기 떼에 대한 의문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국방부는 이 의혹에 대해서는 “조류에 떠내려갔다”고 해명했지만 당시는 정조 시간대였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논의조차 되지 못한 의문점들

군사기밀이다(이전에 공개됐음에도), 자료가 없다(본 사람이 있음에도), 직접 보면 다르다(직접 본 사람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등 이유는 다양하다. 이는 무엇보다 어뢰의 등장 앞에 질문의 맥을 잃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

사건의 처음과 끝, KNTDS와 교신기록

한국형 해군전술지휘통제체계(KNTDS·Korean Naval Tactical Data System). 당시 백령도 인근 우리 군의 이동 경로를 소상히 알 수 있는 자료다. 합조단은 “군사기밀이며, 일부 국회의원에게 공개한 적이 있다. 또한 민간 조사위원도 해당 분과에서는 다 확인했다”며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2002년 제2연평해전의 사례에 준해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러 의혹을 일거에 일축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이번 발표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천안함이 그날 어디에서 어디로 갔고, 어느 방향으로 어느 속도로 갔는지 등의 기록을 담고 있다. 교신기록도 공개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합조단은 “항적기록이나 교신과 관련된 내용은 전부 무선으로 보내는데 군사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암호장비를 사용한다”며 “보안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고 답했다.

TOD

정부가 가장 곤욕을 치른 대목이 바로 열상감시장비(TOD) 동영상이다. 봤다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없다는 논리가 더는 먹히지 않게 됐고, 없다던 동영상은 결국 공개됐다. 하지만 때론 짧게, 그보다 조금 길게, 결국 사고 당시 장면만 빼고 존재하는 것으로 TOD 영상은 공개됐다.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증거 제시 과정이었다.

합조단 발표 하루 전인 5월19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은 “국방부는 함수·함미 분리 장면을 담은 TOD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왔지만, 동영상이 없다고 잡아떼는 합동참모본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사고 발생 순간의 동영상을 봤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발표 당일 TOD는 논란 없이 넘어갔다. TOD는 초병 한 사람이 봤다는 물기둥을 국민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함미 절단면 옆쪽 긁힌 흔적, 안쪽으로 말린 스크루

어뢰 피격을 인정하지 않는 가설들은 대부분 천안함의 긁힌 흔적을 주요한 근거로 든다. 합조단은 천안함의 좌현은 언급하지 않고 우현을 중심으로 해명했다. 합조단 문병옥 대변인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우현의 흔적에 대해서만 “긁힌 흔적이 아니라 선체 하부의 강력한 힘이 발생해서 접힌 자국”이라고 설명했다. 합조단에 민간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상철씨는 인양 뒤 인위적인 상태 변경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합조단에 가서 직접 확인해보니 인양 당시에 존재했던 좌현의 긁힌 흔적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뢰 이외의 원인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또 다른 증거는 천안함 스크루 상태다. 스크루가 안쪽으로 찌그러진 것은 좌초 뒤 후진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크루에 대해서도 최종 발표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합조단은 스크루의 변형은 천안함 함미가 바닥에 가라앉으면서 손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크루부터 떨어지지 않고 함미의 앞부분부터 떨어진 다음 스크루가 바닥에 충돌하면서 찌그러졌다는 것이다. 신씨는 이에 대해서도 “물에 가라앉으면서 조류로 스크루가 돌다가 바닥에 충돌하면서 생긴 변형이라는 합조단의 주장은 맞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바닥에 충돌했다면 스크루 날개 하나 정도가 손상됐을 것”이라며 좌초로 인한 변형임을 강조했다.

가스터빈실 인양

천안함에서 유실된 가스터빈실은 5월19일에야 인양돼 평택 2함대사령부로 옮겨졌다. 가스터빈실은 어뢰 공격을 입증할 만한 증거로 다른 가설까지 일축할 수 있는 사건의 결정적 열쇠였다. 가스터빈실은 좌현 3.2m, 우현 9.9m로 함수와 함미를 제외하면 천안함 유실물 가운데 가장 크다. 군 당국이 첨단 음파탐지기로 3~4mm의 초소형 파편까지 찾아냈음에도 가스터빈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가스터빈실의 뒤늦은 인양은 시뮬레이션 결과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함수·함미 수색

천안함 침몰 직후 함수와 함미는 분리됐다. 함수는 끝이 바다 위로 노출됐지만 함미는 자취를 감췄다. 당시는 장병들의 생존 가능성이 언급되던 시기라 모두 함수·함미 확인에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결국 함수는 발생 지점에서 7km, 구조 지점에서 2km 떨어진 곳에서 3월29일 발견됐고, 함미는 최초 사고 지점 인근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3월26일부터 29일까지 4일 동안 1200t급 군함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이러한 의문은 백령도 인근 해도와 조류의 방향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함미가 가라앉은 지점은 사고 지점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이다. 또 함수는 7km 정도를 흘러 못 찾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흐른 궤적은 구조 당시 사고 지점에서 흘러온 궤적과 흡사하다. 사고 지점부터 흘러온 방향 그대로 2km를 더 흘러간 지점이어서 해도를 중심으로 수색했다면 어렵지 않게 발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납득 못한다, 아니 납득하고 싶지 않다
북한제 어뢰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1번’ 표시. 글자의 파란색이 너무 선명하다는 점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북한제 어뢰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1번’ 표시. 글자의 파란색이 너무 선명하다는 점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이제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얄궂다. 합조단의 조사 결과를 모두 사실로 인정할 때 가장 올돌하게 부상한다. 손기화 합조단 정보분석과장은 “이번 사건 2~3일을 전후해 북한군 잠수함정 두 척이 기지를 이탈했고 저희가 식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사건 당시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이었다. 한국보다는 미군이 몰랐다는 게 더 정확하고, 그래서 의문을 더 증폭시킨다.

한-미 정보 당국은 미국의 정찰위성(KH-12)·정찰기(U-2) 등으로 북의 침투자산 기지를 집중 감시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잠항 이동 중에야말로 추적이 어렵기 때문이다. 국방부도 지난 4월1일 “잠수함정·반잠수정 등과 같은 북한 선박의 움직임을 철저히 추적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신 감청도 활용된다. 김학송 국회 국방위원장은 지난 4월5일 “사고 당일 잠수함 1대는 비파곶 인근에서 북측 기지와 교신을 한 것으로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물론 기지 감시에는 기상 상황 등 여러 제약이 있다. 그런데 3월 말부터 “북한 잠수함이 3월26일을 전후해 기지를 이탈했다 복귀했다”는 군 정보가 언론에 보도됐다. 군 정보는 사후 추적만 가능하고, 실시간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기지 감시를 놓쳤다면 작전구역에서의 경계가 남는다. 합조단은 잠수정이 3km 떨어져 어뢰를 쏜 것으로 발표했다. 이 조건에서 초계함 등이 적을 탐지할 수 있는 공산이 얼마나 될지는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국방부는 지난 4월5일 “사건 당시의 수심 30m 해양환경을 대입해 시뮬레이션한 결과 약 2km 전후에서 잠수함을 탐지할 수 있는 확률은 70% 이상”이라고 했다.

이 또한 놓칠 수 있다. 어뢰 탐지·방어가 남는다. 천안함은 특히 대잠 초계함이다. 현대중공업 특수선사업부 김태욱 상무는 사건 초기 “어뢰는 맞을 때 맞더라도 ‘야, 이거 맞는구나’라는 건 알 수 있다”고, 송영무 전 해군참모총장은 “소나실에서 24시간 감시하는데 어뢰 소음이 매우 크기 때문에 분명 포착됐을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말한 바 있다. 당시 천안함 소나병은 “사건 당시 동향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보당국은 소나와 어뢰의 주파수가 달랐다고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북의 잠수정은 한-미 군 당국의 예방·대응 체계를 모두 무력화한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기보다 납득하고 싶지 않은 대표적 쟁점이 되는 셈이다. 오늘도, 내일도 북 잠수정이 우리 군함을 부수고 “신속하게 왔던 경로로 복귀”할 수 있다는 농담이 비극적으로 떠도는 이유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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