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3년차를 맞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월9일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집권 3년차에 토착 비리와 교육 비리, 권력형 비리 이 세 가지 비리에 대해 엄격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과거 ‘비리 척결’ 관련 발언에 비춰보면 이번엔 수위가 상당히 높았다. 청와대 참모들은 “과거 정권을 보면 주로 집권 3년차에 권력형 비리가 발생해 ‘레임덕’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MB “비리 척결” 강조… 검찰 현주소는?
여론의 시선은 자연스레 사정의 중추기관인 검찰에 쏠릴 수밖에 없다. 검찰은 지난해 노 전 대통령 서거와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의 낙마로 이미 국민의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다. 여기에 ‘표적수사’ 논란을 감수하며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기소를 강행해 스스로 시험대에 올라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은 정말 달라졌을까? ‘정치검찰’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딛고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했나? 이명박 대통령의 주문처럼 레임덕을 불러올 게이트의 싹을 자를 수 있을까? 권력형 비리 수사에 적극 나설 준비가 돼 있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려면 검찰이 지난 6개월 동안 무슨 수사를 어떻게 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정치검찰’ ‘스폰서 검찰’ 등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검찰이 휘청거리던 조직을 추스른 게 지난 8월이다. 딱 6개월 됐다. 그즈음 취임한 김준규 검찰총장도 “부패를 뿌리 뽑고, 변모하는 검찰이 되겠다”며 강도 높은 쇄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 6개월간 검찰이 보여준 모습은 부패 척결 구호와 거리가 멀고, 거창했던 변모 의지를 무색하게 한다. 전국 최대 규모의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만 봐도 알 수 있다. 검찰총장의 ‘직할부대’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지난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직접 수사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권과 검찰 수뇌부의 의지는 대부분 서울중앙지검을 통해 ‘발현’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서울중앙지검엔 검사가 193명, 수사관을 포함한 직원이 809명 있다. 핵심 수사 인력이 모여 있어, 주요 사건과 범죄 정보도 여기로 몰린다. 이달 초 열린 전국 특수부장 회의에선 심지어 “주요 범죄 정보가 서울중앙지검으로 몰리는 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안건이 논의되기도 했다. 특수1~3부, 강력부, 첨단범죄수사1~2부, 금융조세조사1~3부 등이 몰려 있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 산하 조직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입맛 맞으면 무리하고, 안 맞으면 내버려두고?이들 부서가 지난 6개월 동안 기소한 주요 사건(표 참조)은 손에 꼽을 정도다. △공경식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대표와 공성진·현경병 한나라당 의원 △안원구 국세청 국장 △대한통운 이국동·곽영욱 사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쌍용차 기술유출 사건 관련자 등을 기소한 게 여론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건이었다. 재판이 진행 중인 공성진, 현경병, 안원구 등 주요 피고인의 유무죄 판단이 나와봐야 더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주요 수사 부서의 성적표가 초라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이 본격화되면서 검찰은 더 코너에 몰리고 있다. 유죄를 입증해줄 유일한 증인인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핵심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검찰의 ‘입맛’에 맞는 수사를 무리하게 끌고 간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검찰은 정권이 꺼려할 만한 주요 사건의 수사는 한없이 오래 끌고 있다. 이런 행태는 대통령이 강조하는 ‘비리와의 전쟁’이나 ‘권력형 비리 발본색원’과는 거리가 멀다. 정권이 반길 만한 수사, 정권이 찍어준 수사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사는 이유다.
지난해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의 주요 이슈였던 효성그룹 창업주 3세들의 국외 부동산 매입 수사가 대표적인 경우다. 효성그룹 수사는 2006년 시작돼 수년간 진행되다 지난해 상반기 몇몇 임직원을 기소하며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하반기 국정감사 때 효성 3세들의 미국 고급 빌라 구입 사실이 불거져 수사가 다시 시작됐다. 검찰은 지난해 말 조현준 (주)효성 사장의 일부 혐의(외환거래법 위반)를 밝혀내 기소했지만, 5개월째 “국외 거래라 조사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며 사건의 본체인 자금 출처 조사를 매듭짓지 않고 있다. 불과 1년 전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의 해외(홍콩) 비자금을 귀신처럼 찾아낸 ‘실력’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림 로비’ 수사도 장기 미제 사건의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2월 의혹이 제기됐을 때 검찰은 “청와대 조사가 끝나면 보겠다”며 늑장을 부렸다. 한 전 청장이 미국으로 출국한 뒤에는 “불러올 방법이 없다”며 손을 놓았다. 한 전 청장이 정권 실세에게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나, 정권 실세에게 잘 보이려고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기획했다는 의혹,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해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그림 로비를 했다는 의혹, 그 어느 하나 해소된 게 없다. 반면 “한 전 청장이 현 정권 실세에게 연임 로비를 하려고 나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고 폭로한 안원구 국장은 재빨리 잡아들여 사건을 끝내버렸다. “검찰이 안 국장의 입을 막으려 한 것 아니냐”는 표적수사 의혹이 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대통령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 수사와 정권 실세에 로비를 한 의혹을 받고 있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 수사는 둘 다 정권에 부담스러운 사건이라는 점 외에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건 찢기’다. 검찰 수뇌부는 효성 3세들에 대한 수사를 애초 효성그룹을 수사하던 특수1부가 아닌 외사부에 배당했다. 한 청장에 대한 의혹을 폭로한 안원구 국장 사건도 한 전 청장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특수2부를 배제한 채 특수1부에 별도로 배당했다. 수사의 효율성 등에 비춰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두 사건 외에도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6월 금융감독원에서 통보받은 ‘동아일보 사주 및 OCI(옛 동양제철화학) 경영진의 미공개 정보 이용 주식 거래 의혹 사건’ 수사를 9개월이 넘도록 끌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청와대 행정관이 기업체 2곳에서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돼 청와대가 수사를 의뢰한 사건도 별다른 진척이 없다.
특히 OCI 사건의 경우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이나 당시 한국경영자총연합회장인 이수영 OCI 회장뿐 아니라 한승수 전 총리 아들 부부가 관련됐다는 의혹도 불거진 상태다. 이 사건을 맡고 있는 전현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장은 지난 3월10일 “기술적으로 복잡한 미공개 정보의 생성 단계별로 확인해야 할 사항도 많고, 관련자들도 하나하나 조사한 뒤 다시 대질신문을 하는 등 시간이 많이 필요한 수사”라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오는 3월 말까지는 결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9개월 동안 진행한 수사를 통해 과연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또 예고대로 이달 말에는 정말로 결론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검찰의 생리를 잘 아는 이들은 최근의 이런 상황에 대해 “검찰의 수사 능력이 하루아침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능력보다 의지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수뇌부의 의지가 강력하지 않으니, 주요 사건들의 수사가 미적댄다는 것이다. “의사가 환부만을 도려내듯 정교하고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신사다운 검찰이 되겠다”는 게 김준규 총장의 지론이다. 이런 지론을 빗대 한 전직 검찰간부는 “수술하는 의사의 메스가 무뎌진 것도 무뎌진 것이지만, 그보다는 수술 건수 자체가 너무 줄어든 게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의 주요 수사 부서가 내사하고 있는 사건 중에는 SK건설·태광그룹·한진그룹 등과 관련한 굵직한 기업 관련 사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이런 내사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경우는 아직 없다.
“수사 능력의 급속 퇴보? 의지가 문제”검찰 일각에서는 수뇌부가 ‘숨은 비리’나 ‘신종 부패’ 적발을 강조해, 정작 검찰의 신뢰와 명예가 달린 의혹 사건 수사에 힘이 빠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검찰 관계자는 “신종 비리 수사를 강조하다 보니 일선에서는 눈에 확 띄는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경향이나 부담이 있다”고 전했다.
직접 수사 방향을 지시하는 듯한 대통령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검사들도 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검사는 “검사들이 되도록이면 대통령이 직접 찍어 말하는 토착 비리나 교육 비리 등의 분야에 집중하고 싶어하지, 다른 어렵고 껄끄러운 수사를 하고 싶어하겠느냐”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3년차에 발생하는 권력형 게이트를 근절하겠다”고 말한 데 대해서도, 전직 검찰 고위간부는 “게이트 근절이란 요구가 일선에서 권력형 게이트로 번질 만한 수사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때마침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검찰 수사가 심각한 불균형을 보였다는 분석도 나왔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지난 10일 펴낸 ‘이명박 정부 2년 검찰 보고서’를 보면, 지난 2년 동안 진행된 검찰 수사가 양과 질 모두에서 정치적 편향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연대는 주요 사건을 유형별로 분석했는데, △〈PD수첩〉 사건 등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수사 10건 △한명숙 전 총리 수사 등 전 정부 관계자 수사 7건 △공성진 한나라당 의원 등 집권 세력에 대한 수사 8건 △용산 참사 등 공안 사건 5건 △한상률 전 국세청장을 비판한 나주세무서 김동일 계장 수사 등 선거 및 기타 수사 8건이었다.
공소장서 뺀 ‘천신일 로비’, 판결문서 적시현 정권 비리에 대한 수사는 8건에 그친 반면, 정권 비판 세력과 전 정부 관계자에 대한 수사는 그 2배가 넘는 17건에 달하는 셈이다. 더구나 집권 세력에 대한 수사 8건 가운데 이 대통령의 사촌처형 김옥희(72)씨 사건과 유한열(72) 전 한나라당 고문의 국방부 로비 사건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참여연대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천신일(67) 세중나모그룹 회장 사건을 들고 있다. 검찰은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 회장이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에게 박연차(65) 전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여러 차례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를 공소장에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2월5일 천 회장의 1심 선고 때 재판부가 구체적인 청탁 사실을 판결문에 적는 바람에 외부로 알려졌다.
이렇게 덮어두고 봐줘서 그냥 넘어간 사례가 얼마나 더 있는지는 검찰만 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국민의 신뢰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은 검찰만 모르는 것 같다.
석진환 기자 한겨레 법조팀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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