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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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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충분조건 아니다

진보적 시사주간지의 미래전략 제언… 관점의 차이 넘어 영역의 전문화로
등록 2009-11-25 17:44 수정 2020-05-03 04:25

진보언론이 겪는 위기는 전면적이다.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진보언론의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광고 수익에 의존하는 경영방식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신문, 인터넷언론, 시사주간지 등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진보언론의 위기는 총체적이다. 을 비롯한 진보적 시사주간지의 미래전략에 대한 제안을 들어봤다. 독자 여러분의 충심 어린 제안도 기다린다. 편집자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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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으로 맥락과 이면 끌어내야”

김종배 시사평론가·전 편집국장

종종 목도한다.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배타성을 낳고, 배타성이 정체를 촉진하는 현상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시사종합주간지도 비슷한 사례에 속한다. 시사종합주간지라는 정체성이 시사종합주간지 행보에 족쇄를 채운다. ‘시사’와 ‘주간’이 충돌하고, ‘종합’이 충돌의 물리력을 배가하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여전히 ‘시사종합주간지’를 고수한다.

그렇다고 일간지화할 수도 없고, 월간지화할 수도 없다. 죽으나 사나 주간지 울타리 안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일부 시사종합주간지가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이슈에서 일상으로 뉴스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고 있다. ‘주간’을 유지하기 위해 ‘시사’를 담보 잡히는 것이다.

그럼 뭘까? 이런 움직임이 대안이 될 수 없다면 어떤 게 해법이 될 수 있을까? 발랄한 감각으로 이슈의 틈새를 헤집고 시각을 비트는 걸까? 그렇게 창발성을 드높이는 걸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대안이 될 수 없다. 틈새 헤집기와 비틀기가 효과를 보려면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실시간’이라는 조건이다. 남들이 다 똑같은, 그저 그런 해설과 분석을 할 때 헤집고 비틀어야 빛이 난다. 동시간대에, 동렬에서 헤집기와 비틀기가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자명하다. 이런 콘셉트는 주간지가 아니라 일간지, 또는 ‘초간지’인 인터넷 매체의 콘셉트다.

해법은 ‘호흡’에서 찾아야 한다. ‘천형’으로 여겨지는 ‘주간’의 한계를 ‘천부’의 무기로 전환시킬 수 있는 단전호흡법을 익혀야 한다. 일간지와 ‘초간지’가 단타를 칠 때 주간지는 2루타를 쳐야 한다. 그게 바로 끌어내기다. 깊숙이 숨어 있는 맥락을 끌어내고,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이면을 끌어내는 것이다. 개별 이슈에 매몰되는 게 아니고 개별 이슈를, 흐름을 드러내는 소재로 배열하는 것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닐 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낳는 원리를 살피는 것이다. 다른 매체가 박근혜 의원의 세종시 수정 반대 입장 배경을 살필 때 박근혜 의원의 ‘안티 행보’ 패턴을 분석하는 것이다.

대중매체의 접근법치고는 너무 무겁다는 반박이 나올까봐 한마디 덧붙이자. 시사종합주간지 독자처럼 준비된 독자는 없다. 그들은 고급 독자다.

“외부 전문가 네트워크로 보완”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과

등은 ‘진보적’이기 때문에 다른 시사주간지와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굴레이자 디딤돌이다. 우선 멀티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요즘 출판계를 보면, 오프라인으로 교재를 보게 하고 온라인에서는 강의와 토론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동일 매체 시장에서 콘텐츠를 차별화해서 자기 몫을 늘리는 경쟁을 했지만 지금은 시장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활로를 찾기 힘들다. 날 때부터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었던 세대와 소통해야 한다. 보리밥을 먹어본 세대는 햄버거 먹다 다시 보리밥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햄버거 먹은 세대는 보리밥에 대한 개념이 없다.

등의 콘텐츠는 차이를 넘어 전문화되어야 한다. 관점이 다른 시사 심층보도만으로 전문성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컨텐츠의 정보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관점도 다르고 전문성도 있는 콘텐츠를 바탕으로 온라인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동영상 서비스를 비롯한 뉴미디어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래가 육지에서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자들이 보다 전문화된 영역을 구축해 활자매체를 지속적으로 소비할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한편, 온라인과 오프라인 순환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블로그 등을 활용해 기자가 기사 이외의 부문에서 다양한 정보와 재미를 주는 한편, 부족한 부분은 외부 전문가들을 활용한 네트워크로 보완할 수 있다. 이른바 포털의 형식적 허브 개념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사이트 유료화와 같은 온라인 사업의 성패는 컨텐츠 차별성에 달려 있다.

“지식인보다 시민을 담론의 주체로”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

매체 환경의 변화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향은 다른 시사주간지들처럼 가볍고 연성화되는 쪽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진실을 예리하고 깊게 보는 한편 대안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이어야 한다. 또한 시사주간지가 백화점식 구성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영역을 전문화해서 독자에게 좀더 품격 높은 정보와 담론 제공의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텔리 지식인들의 논장이 아니라 시민을 담론 생산 주체로 결합시키는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은 다른 시사주간지에 비해 시각의 차이는 있지만, 다루는 방식이나 위상은 큰 차이가 없다. 이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 전문지나 사회 전문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가 오프라인 기획 토론을 하는데, 이 정치 전문 주간지라면 토론회에서 제기되는 의제들을 다시 자체 토론의 장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뛰어난 정보와 논리를 갖춘 논객들을 필진으로 섭외하거나 오프라인 좌담을 연다던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볼 때, 그 시대의 정치 담론을 뛰어넘는 정치인이 나오기는 힘들다. 내가 안타까운 건 정치 뉴스가 인물과 정치공학만을 다룬다는 점이다. 왜 청소년의 정치의식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는가. 청소년의 정치 참여의 문제를 분석할 수도 있고, 전세계 여성 리더십에 대한 분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공학적 시선을 배제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시민정치 측면에서 바라보는 다양한 분석 기사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투표율 제고 방안에 대해 토론회를 열 수도 있다. 같은 진보 언론에서도 그런 측면이 많이 부족하다. 이 시민참여형 정치 담론지로 가라고 권하고 싶다.

“가벼우면서도 깊이 있게 진실을 말하라”

전규찬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과 같은 비판적 시사주간지들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답답한 현실에 분개하고 참담한 심경을 함께 토로할 수 있는 선한 채널이다. 그렇지만 뚜렷한 애정과 지지, 선호의 차원을 떠나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물어보자. 권력을 견제하고 모순을 고발하며 진실을 밝혀내는 활동의 힘을 이들 매체는 과연 충분히 내고 있는가? 진보적 담론 생산의 책무, 사회적 의제 설정의 역할을 만족스럽게 수행하고 있나? 이에 대해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위기는 이미 시작된 것과 같다.

매체환경의 빠른 변화가 진보적 주간지의 입지를 크게 추락시켜버렸다. 를 포함한 월간지의 운명을 보라. 순식간에 정치적 존재감을 상실했다. 그러한 운명을 진보적 주간지라고 해서 겪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가 빠른 속도로 유통되고, 이에 관한 대중의 그럴듯한 해설이 순식간에 생산된다. 대중이 지식 생산자와 현실 해설가, 뉴스 생산자 역할을 자임한다. 이런 대중이 언제까지 진보적 주간지의 ‘시사’를 고대하거나 비판적 해설을 기다려 주겠는가?

매체 환경 자체가 진보적 주간지들을 막판으로 내몰고 있다. 물론 이들의 고유한 역할이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비참을 구체적으로 포착한 ‘노동OTL’과 같은 기획물은 이 아니면 누가 하겠나? 그렇기 때문에라도 형식적으로 매체 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내용적으로 사회 현실을 집요하게 따라잡는 이중전략적 고민이 불가피하다. 어떻게 진지하면서도 기민하게, 가벼우면서도 깊이 있게 진실을 말하고 세계를 해설하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대중과 의미 있게 교제할 것인가?

진보적 의제, 비판적 시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시대는 끝났다. 진보적 시사주간지라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고는 독자의 성원을 계속해 기대할 수 없다. 한 마디로 갑갑한 시절이다. 조·중·동이 야심만만 종편 진출을 꿈꾸는 미디어 독과점 시대에, 진보적 주간지들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승부를 펼쳐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시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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