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라뤼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
“한국 상황이 꽤 복잡해지고 있는 것 같다. 밖에서 보던 것과 사뭇 다르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자리가 아니다. 개별 국가에 대한 ‘판단’을 내비치는 건 ‘관례’를 벗어나는 일일 터다. 10월14일 이른 아침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과 단독으로 만난 프랑크 라뤼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은 그래서 극도로 말을 아꼈다. 아침 식사를 곁들여 1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다만 ‘원칙’을 되풀이 해 강조했다.
원칙은, 그것이 무너진 곳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라뤼 특별보고관이 하나씩 조심스레 꺼내든 ‘인권의 원칙’은 곧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으로 읽혔다. “정부의 정책이나 공직자에 대한 비판은 명예훼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은 문화방송 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연상시킨다. 형사처벌과 민사소송을 통한 비판 여론 죽이기에 대한 비판은 ‘미네르바’ 박대성씨와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에 가닿았다. 미디어 독점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은 미디어법 파동을 떠올리게 했고, 온두라스 쿠데타에 둔감한 국제사회에 대한 질타는 어느새 무뎌진 우리의 권리의식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인권이자 공동체의 권리다. 정보에 접근할 권리, 그에 대한 의견을 형성할 권리, 그리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 나눌 수 있는 권리를 포괄한다. 소극적 의미의 표현의 자유는 주로 언론기관의 자유를 뜻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표현의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게 일반적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정부의 책무로 보는 견해다. 특히 여론 독점을 막고, 다양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알다시피 이번 방한은 (국제인권네트워크 등) 시민사회의 초청으로 이뤄진 비공식 방문이다. 공식 방문이 아닌 경우, 해당 국가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건 부적절하다. 물론 해당국 정부와 개인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고, 상황이 급박하면 특별성명을 내놓는 등 대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원칙적 수준에서 말할 수밖에 없다. 이해해달라.
=글쎄…, 특정 사안에 대해 언급할 순 없다. 다만 원칙을 말한다면, 공직자에 대한 비판은 명예훼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민주국가에서 공직자는 국민의 대리인일 뿐이다. 공직을 맡음과 동시에 감시와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측면에서 투명하게 평가받고 비판받는 것이 공직자의 삶이다. 공직 수행과 관련해 어떤 것도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제한이 따를 수 없다. 공직자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꺾기 위해 법을 동원하는 것은 검열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이를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공직자에 대한 비판이 설령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것일지라도 명예훼손이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그 정보가 잘못됐는지를 판단하는 건 결국 정부가 아닌가.
=세계적인 차원의 현상이다. 두 가지 경향성이 도드라진다. 첫째, 법적 수단을 동원해 표현의 자유를 직접 제한하는 경우다. 형사적으로 처벌할 뿐 아니라, 민사소송을 제기해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위축시키는 사례가 많다. 둘째, 테러와의 전쟁이 만들어낸 낙인찍기가 횡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차별과 검열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나라치고 안보 상황이 나아진 곳은 없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해치게 되고, 이는 곧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경찰력만으로, 정보기관만으로 국가 안보를 지킬 순 없다. 표현의 자유 확산을 통해 소통을 넓혀야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반대 의견을 억압하거나, 범죄화하거나, 처벌이나 소송 등 법적 도구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선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인권침해에 대해 둔감해졌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보자. 지난여름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축출됐다. 헌정 질서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타격받는 게 표현의 자유다. 온두라스에서도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라디오 방송사 2곳을 폐쇄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온두라스를 공식 방문하려 했는데 제네바(유엔) 쪽에서 반응이 미지근했다. 무혈 쿠데타고, 희생자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데타는 쿠데타다. 군을 동원해 헌정 질서를 유린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더구나 군부독재의 어두운 시대를 지나온 중남미에선 과거의 악령을 꺼내드는 셈이었다. 당시 지체 없이 온두라스에 가 현지 언론인들을 만났고, 현지 상황에 대한 우려를 담은 특별성명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별로 인권 상황을 비교하는 건 어찌 보면 무의미하다. 인권 상황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그러니 나라별로 자기 나라의 상황에 맞게 따져봐야 한다. 기준은 하나다. 우리 사회의 인권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후퇴하고 있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다른 나라에 비해 낫지 않느냐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프랑크 라뤼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이 10월14일 이른 아침 서울 중구의 한 일식당에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왼쪽)를 만나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인권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포럼아시아 제공
=인터넷은 모든 이가 자기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개방성이 핵심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권은 인터넷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확산되는 걸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지난 이란 대선 때도 전세계가 인터넷을 통해 시위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나. 정치적 동기에 따른 인터넷 통제는 검열일 뿐이다. 인터넷은 표현의 자유를 확산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각국 정부는 이를 위협으로 느낄 게 아니라, 시민의 정치적 참여 확대를 통해 자국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검열은 검열일 뿐이다. 어떤 주장에 대해 정부가 위법성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검열이다. 표현의 자유는 내용에 따라 차등을 둘 수 있는 게 아니다. 유엔 ‘시민적·정치적 자유에 관한 국제협약’ 제20조가 정하고 있듯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폭력과 갈등·전쟁을 조장하는 내용을 뺀 나머지는 모두 허용해야 한다. 내용에 기반해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것 자체가 검열이다. 설령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주장을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선 안 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수많은 의사소통 채널이 열리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매체 간 통합·수렴 현상이 여론의 독과점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여론의 다양성은 표현의 자유를 떠받치는 중추다. 매체의 독점은 여론의 다양성을 사장시킨다. 시장을 왜곡시키는 독점은 경제적으로도 나쁘다.
이와 관련해 최근 아르헨티나 의회가 통과시킨 방송통신법 개정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중남미 국가는 여론의 독과점이 극심한 상황이다. 과테말라만 해도 3개 텔레비전 방송사를 한 사람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번 법 개정을 통해 방송 주파수를 상업방송·지역방송·공영방송 등 3개 분야로 균등하게 나눴다. 상업방송이 장악하던 독과점적 여론시장에 다양성과 공익성을 불어넣기 위한 방안이었다.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법 개정을 촉구했고, 정부가 개정안을 마련된 뒤에는 각계에 초안을 보내 광범위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수렴된 의견을 바탕으로 의회에서 충분한 협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법안을 마련했다. 개정된 내용 가운데는 그동안 1개 방송사가 독점해오던 축구경기 중계권을 여러 방송사에 고루 나누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웃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힘겨운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뤄온 한국민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인권 일반, 특히 표현의 자유와 직결돼 있다.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했느냐의 정도는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느냐로 계량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사회만이 표현의 자유를 그 최대치까지 보장할 수 있고, 진정한 민주적 지도자만이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완벽히 허용할 수 있다. 이를 이뤄내려면 무엇보다 시민의 참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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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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