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태 광주 민족미술인협회 사무국장은 ‘오월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장소는 옛 전남도청 본관이었다. 해마다 5월 중순이면 광주에서는 오월전이 열렸다. 올해 오월전의 부제는 ‘벽을 문으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일방적 시장 논리에 가로막힌 불통의 한국 사회를 소통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그에게 오늘의 호남을 물었다. ‘호남은 개혁적인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그는 말했다. “호남 밖에서는 호남을 여전히 민주화의 성지, 개혁의 상징으로 보려 하는 것 같다. 남의 샅바로 씨름해보겠다는 분위기다. 이제는 ‘광주조차도’라는 말을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진보는 항상 스스로 진보해야 하는데, 지금 광주의 문화운동은 관료화됐고 정치는 정당 이기주의에 매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옛 전남도청 별관을 가리켰다. 도청 별관은 지금 철거 문제로 신음하고 있다. 5·18 단체 간 볼썽사나운 갈등도 빚어지고 있다. “일부 시민사회단체는 광주의 오월을 사유화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이 판에 왜 있을까’ 하는 회의가 슬며시 든다.” 그의 손끝에서 도청 별관을 휘감은 검은 비닐천이 나부꼈다.
‘호남은 개혁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호남의 대답도 조 사무국장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월12일 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호남 지역 20살 이상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호남이 ‘예전에도 개혁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은 37.0%에 그쳤다. 반면 ‘예전에는 개혁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30.2%)와 ‘예전에도 개혁적이지 않았고, 지금도 아니다’(24.5%)는 응답은 절반을 훌쩍 넘었다. 54.7%였다. 호남 스스로 더 이상 개혁의 상징이 아니라고 밝힌 셈이다.
민주당 이광철 전 의원의 전주 완산갑 재선거 낙선이 오늘의 호남 민심을 보여주는 단면일 수 있다. 그는 1974년 전북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35년간 전주에서 잔뼈가 굵었다. 1980년 5월 항쟁 때 시위 주도 혐의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삶의 절반을 바쳤고, 민주화 이후에는 전북 시민사회운동에 매달렸다. 17대 국회에 진출한 뒤로도 그는 개혁 성향이 뚜렷한 인물로 꼽혔다. 하지만 그는 4·29 재보선에서 18%포인트 차이로 졌다. 상대는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데다 재산 축소 신고와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은 신건 무소속 후보였다.
5월12일 만난 그는 선거 결과에 대해 “황당했다”고 말했다. “독점적 지위를 갖는 정당의 패권 의식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지역활동과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 선거에는 오직 정동영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이 있다.”
호남이 변한 걸까? 광주 옛 전남도청 앞에서 두 달 넘게 농성 중인 로케트전기 해고 노동자 김길호(40)씨는 이에 대해 “내 경우 호남이 변했다기보다 MB 정권 들어서면서 ‘회사가 어렵다면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간 농성에 지친 김씨는 광주에 대한 아쉬움을 돌려 말했다.
광주 북구에 사는 택시기사 조아무개씨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조씨는 “일부만 보고 호남이 보수화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호남은 여전히 개혁적”이라고 말했다. 대신 그는 “정치하는 행태를 보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똑같다”며 “지금까지는 모든 선거에서 90% 이상 민주당을 찍어왔지만 앞으로는 인물을 보고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 53.8%, 호남 신당 지지 51.3%의 모순4월29일 광주 서구 기초의원과 전남 장흥 광역의원 보궐선거는 택시기사 조씨의 다짐대로 됐다. 두 곳 모두에서 민주당 후보는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완패했다. 광주 서구에서 민주당 고경애 후보는 민노당 류정수 후보에게 8%포인트 차이로 졌고, 장흥에서도 민주당 김성 후보가 민노당 정우태 후보에게 큰 표 차로 졌다.
강기수 민노당 광주시당위원장은 호남 승리의 요인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민노당은 광주의 모든 당원을 총동원하는 등 치밀하게 선거를 준비한 반면, 민주당은 공천 과정부터 오만했다는 것이 강 위원장의 분석이었다. “민주당은 각 계파 조직이 서로 찢어졌다. 실제 선거에 나선 고경애 후보는 구민주계이다 보니 다른 계파는 그다지 움직이지 않는 눈치였다. 덕분에 우리에게는 쉬운 싸움이 됐다.” 강 위원장은 “이번 재보선은 MB 정부의 독주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민주당에 대한 호남의 경고일 것”이라면서도 “다만 2010년 지방선거를 전망한다면 민노당은 여전히 민주당과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여론조사를 보면 호남에서 여전히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는 정당은 민주당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 정당을 묻는 설문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53.8%)은 여전히 민주당을 꼽았다. 민주노동당(8.1%)과 한나라당(7.9%)은 민주당과 큰 격차를 보였다. 심지어 ‘정동영·신건’ 무소속 후보를 나란히 당선시킨 전북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53.9%로 나타났다.
반면 ‘호남을 기반으로 한 신당이 출현했을 때 지지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지지 의사가 있다고 대답한 유권자가 전체의 51.3%였다. 호남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호남 신당’에 대한 과반수 지지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희웅 KSOI 팀장은 “호남 전체에서 절반 이상이 신당 지지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은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이 ‘호남당’ 창당의 유혹을 느낄 만한 수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영태 목포대 교수(정치행정학부)는 “호남 신당을 지지하겠다는 응답을 그대로 해석하기보다는 워낙 약세인 민주당에 선명성 강화를 주문하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신당 창당보다는 민주당 선명성 강화 주문”호남 신당이 등장하면 지지하겠다는 여론과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여론을 종합하면, 지금의 민주당에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호남의 이중적 태도가 엿보인다. 위성부 민주당 광주시당 사무처장의 말이다.
“호남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의 출현을 기대하는 흐름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그건 현 질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견 정도로 봐야 옳다. 지방의회를 민주당이 독식하고 있고, 지방의회 운영 과정에서 일정 부분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신당 창당으로 이어지리라는 해석으로 연결짓는 것은 조금 과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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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주=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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