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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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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차고 온 5월단체

올봄 두 건의 시민단체 충돌이 준 충격…
각종 위원회에 이름 올리는 사람 늘면서 동력 잃은 광주 시민사회
등록 2009-05-22 10:22 수정 2020-05-03 04:25

#장면1: 시민운동의 얼굴이 폭행을 당했다. 지난 3월13일 오후 1시45분 광주 동구 금남로1가 옛 전남도청 앞. 임낙평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가 옛 전남도청 정문의 높이 30m 철탑에 올라가 농성 중인 로케트전기 해고 노동자를 격려하러 방문했다. 그는 이 부근에서 농성 중이던 5·18 유족·부상자 10여 명한테 멱살을 잡힌 채 끌려가 15분 동안 폭언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문화부 앞잡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해코지는 그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설계를 존중하고 옛 전남도청 별관을 철거하자는 소신을 가진 데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30년 남짓 야학운동과 환경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아픔보다는 충격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곧바로 사과를 촉구했다. 농성자 쪽은 “너무나 서운했다”고 반응했고, 시민단체는 “성역은 없다”고 맞받았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은 1998년부터 정초마다 민주가족 합동세배를 마련해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해왔다. 광주인(gwangjuin.com) 제공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은 1998년부터 정초마다 민주가족 합동세배를 마련해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해왔다. 광주인(gwangjuin.com) 제공

#장면2: 5월 운동의 동지가 등을 노렸다. 5월10일 저녁 8시 같은 장소. 5월단체 3곳 중 최대 조직인 구속자회 회원 250여 명이 천막농성장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진행’이라고 쓴 노란 완장을 차고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영락없는 철거용역 직원의 모습이었다. 별관을 지키겠다며 삭발까지 했던 이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출동한 경찰 500여 명이 5월단체들 사이에 인간 방벽을 쌓아 충돌을 막았다. 구속자회는 40여 분간 농성장 진입을 시도하다 철수했다. 한밤의 난입 이후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다. 구속자회는 “진보연대나 민주노총이 합류해 농성이 변질됐다”고 했다. 유족회와 부상자회는 “참담하고 어이없는 배신 행위”라고 되받았다. 5월단체 사이에 벌어진 옛 전남도청 앞 몸싸움은 삽시간에 광주의 공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협치’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의 동반자로

올봄 광주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5월단체를 포함한 광주 지역 시민단체는 늘 민주와 진보의 근거지처럼 비쳐졌다. 올해 초에도 시민단체 대표 130여 명이 광주YMCA에 모여 덕담과 떡국을 나누며 동지애를 다졌다. 올해로 벌써 열한 번째 이어진 민주가족 합동세배였다. 이토록 끈끈하던 광주 지역 시민사회는 어쩌다 서로 등을 돌리게 됐을까?

광주시의 (2008)에는 광주 지역 시민단체 527곳이 올라 있다. 이 가운데 복지·직능 단체를 제외하면 줄잡아 200여 곳이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시민단체다. 대별하면 광주시민단체협의회(개혁), 광주전남진보연대(진보),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보수) 등 세 진영으로 나뉜다. 흔히 시민단체라면 개혁과 진보 두 진영을 이른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80년 5·18을 거친 뒤에는 ‘광주’와 ‘5월’이라는 단어 자체가 민주화의 상징으로 통용됐다. 광주의 시민단체와 5월단체는 손을 맞잡고 끈질긴 진상 규명 투쟁을 벌여 국회 5공 청문회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처벌 등 성과를 거뒀다. 90년대 들어 광주경실련·광주환경련·시민중계실을 열어 분야별 민생 현안을 다뤘고, 5월·종교·노동·농민·교육단체가 단일대오를 형성한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의 깃발 아래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광주의 전통은 1997년 국민의 정부 들어 거리의 최루탄이 사라지자 변화를 요구받았다. 일부 활동가들이 민주당으로 건너갔고, ‘협치’라는 이름으로 동반자가 됐다. 시민단체는 자치단체예산 감시, 주민소환조례 제정, 아파트 하자 보수, 외산 담배 추방, 운림온천 반대 등 풀뿌리 생활운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낙천·낙선 운동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지난해 6월 도청 앞 농성 계기로 이분

이후 시민단체는 뇌물 수수로 구속됐던 박광태 광주시장 퇴진운동이 실패하면서 급격하게 내리막을 걸었다. 중앙과 지방의 ‘제2건국’ ‘1등광주’ ‘지역혁신’ ‘U대회유치’ 등 각종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는 인사가 부쩍 늘었다. ‘민주당 2중대’라는 비판이 고개를 들었다. 특히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출신이 민주당 광주시지부의 공동대표를 맡거나 시민단체 중견 간부가 시당 사무처장으로 거론되면서 뒷말이 무성해졌다. 협치 경쟁이 일면서 공익적 활동들이 주춤해졌다. 본연의 영역인 △광주시청 비정규직 해고 △유니버시아드 예산 비공개 △인화학교 성폭력 교사 처벌 △로케트전기 복직 투쟁 △택배 노동자 무더기 해고 등의 쟁점은 방치되고 말았다.

지난 5월10일 5·18 구속부상자회 회원들이 옛 전남도청 앞 농성장을 철거하려고 노란 완장을 찬 채 들이닥쳤다. 광주인(gwangjuin.com) 제공

지난 5월10일 5·18 구속부상자회 회원들이 옛 전남도청 앞 농성장을 철거하려고 노란 완장을 찬 채 들이닥쳤다. 광주인(gwangjuin.com) 제공

당연히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비아냥이 안팎에서 높아졌다. ‘시민이 없다’는 말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방향과 명망가 중심의 운영이라는 한계를 아울러 꼬집은 표현이다. 개혁 동력을 제공하기는커녕 개혁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한숨이 이어졌다. 반면 보수 진영인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은 늘 한목소리를 내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상석 ‘시민이 만드는 밝은 세상’ 사무처장은 “시민단체 상당수가 정치권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채 야성을 상실해갔다”며 “단체마다 온갖 쟁점에 관여하고 정치적으로 판단해 움직이는 행태를 보였다”고 꼬집었다.

더욱이 지난해 6월 5월단체가 시작한 옛 전남도청 앞 농성은 시민단체를 양쪽으로 갈라놓았다. 시민단체는 농성 넉 달 만에 개입했으나 이견이 거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침묵 속에 자꾸 시간은 흘렀고 분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과정에서 70년대 학번 민주인사들의 모임인 ‘70동지회’가 해체됐고, 시민단체의 위기 상황을 토론 주제로 내세운 방송토론이 반향을 일으켰다.

수술론과 해체론에 직면한 광주시민단체협의회는 최근 사무실을 금남로에서 광천동으로 옮기고 새 출발을 다짐했다. 변화를 추동할 40대 협력사무처장 3명을 두고 외부의 목소리를 대폭 수용하기로 했다.

서정훈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사무처장은 “광주는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중첩된 지역이어서 일단 갈등과 대립이 생기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며 “솔직히 요즘 광주를 보면 자괴감을 느끼지만 질적 발전을 위한 진통으로 알고 변화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내부 개혁론 그리고 비전 제시론

개혁의 동력과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지난 10년 동안의 방향·내용·방법을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고언들도 잇따랐다. 시민단체가 치열하게 토론해 안주와 공생을 청산하자는 내부 개혁론이 한 축이다. 사사건건 반대만 하지 말고 의제 설정을 고민하자는 비전 제시론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광주 출신인 윤난실 진보신당 부대표는 “광주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여태껏 ‘성역’처럼 존재했던 5월단체에 쓴소리를 할 때가 됐다”며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을 깊이 느끼고 10년 앞을 내다보며 세력·세대·인물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한겨레 지역팀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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