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에는 경험이 스며있다. 지적인 자각이 믿음으로 굳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가 경험이다. 차병직(50) 변호사.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사형 반대는 신념이다. 그에게도 경험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한 인간에게 죽음을 명해본.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돼
1980년대 후반, 그가 전방의 한 육군사단 군법회의(오늘날의 군사법원) 심판관으로 일하던 때의 일이다.
“최전방 초소에서 복무하던 병사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해 내무반에 총을 난사한 사건이었습니다. 3명이 사망하고 6~7명이 중상을 입은 큰 사고였죠.” 군 검찰관은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이 끝나고 재판부를 구성하는 3명의 장교가 앉아 평의를 했고 모두 사형에 합의했습니다. 격론은 없었습니다. 사형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형도 선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항소심(고등군사재판)에서 감형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있었죠.”
후회는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사형에 너무 쉽게 합의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시작되더군요. 항소심에서 사형이 확정되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했죠. 결국 1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초조히 항소심 결과를 기다리게 됐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할 수 있었다.
차 변호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었다면, 원래 사형찬성론자는 아니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법철학자 심재우 교수의 영향으로 사형폐지론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재판에서는 그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거나 진지하게 펼치지 못했습니다.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한, 실제 재판에서는 그런 현상이 쉽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제도가 있으면 개인의 의견이나 사상과 무관하게 선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그가 사형 폐지에 경도된 이유는 뭘까? “잔혹한 범죄와 사형은 선사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범죄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행태이며, 사형 역시 가장 오래된 인간의 형벌제도죠.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인간성의 재인식과 재발견 때문입니다. 사형제 폐지는 실제적 효과도 있겠지만, 상징적 효과가 더 큽니다. 아무리 잔혹한 범죄자가 나타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잔혹한 범죄자는 격리 자체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잔혹한 범죄 행위도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잔혹한 범죄의 책임이 살인범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포함한 사회 구조의 책임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는 사형제도는 이제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사형제 찬반론의 근거는 이미 수백 년 동안 되풀이된 것이어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형제 찬반론의 답안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발표된 이병주의 소설 속에 나오는 법과대학 학생의 답안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오직 폐지냐 존치냐의 결정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사형제 찬성론이 반대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찬성론의 유일한 근거는 피해 유족과 일반 대중의 보복 감정 해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사형제 존치론과 사형 집행의 요구는 대중의 호기심 충족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한 세계의 정신이 줄어든다다독(多讀)과 강기(强記)의 대표답게 조지 오웰을 인용하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조지 오웰의 산문 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오웰이 작가가 되기 전 버마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의 경험담이죠. 그가 사형수를 끌고 집행장으로 가는데, 도중에 물이 고인 얕은 웅덩이가 나오자 사형수는 발이 젖을까봐 옆으로 피해 걷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본 오웰은 ‘그와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다고 적었습니다. 한 인간이 사라지면 이 세계의 정신이 그만큼 줄어들 뿐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지요. 이것이 사형제 폐지의 상징쯤 되지 않을까요.”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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