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0일 밤(미국시각)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 내놓은 7천억달러짜리 구제금융 법안은 A4용지 3쪽 분량이었다. 미 하원이 9월29일 찬성 228 대 반대 205로 부결시킨 구제금융 법안은 110쪽 분량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10월1일 저녁 9시께 미 상원이 ‘2008 긴급 경제 안정화 법안’을 표결에 부쳤다. 이틀 새 451쪽으로 훨씬 두툼해져 있었다. 개인과 기업에 세액공제·세금감면 혜택을 주는 한편 예금지급 보증한도를 높이는 등 예금자 보호조처를 하원 안보다 대폭 강화한 게다. 뇌종양 치료를 받고 있는 테드 케네디 의원(민주당)을 뺀 상원의원 전원이 이날 저녁 표결에 참여했고, 법안은 찬성 74 대 반대 25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됐다. 격동의 열하루였다.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납치된 피해자가 억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납치범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증상)에 허덕이는 것 같다. 애초 재무부가 내놓은 안에 워낙 문제가 많았다. 하원이 부결시킨 법안은 그보다 약간 개선된 것이고, 상원이 통과시킨 법안은 또 하원 안에 비해 조금 나아졌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미 상원이 구제금융 법안을 통과시킨 직후 〈MSN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문제가 많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며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급속도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선 이 정도 법안이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도 비슷한 생각이다. 나이 교수는 인터넷 매체 와 한 인터뷰에서 “법안 자체가 훌륭하다고 말할 순 없고, 단기간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며 “그럼에도 (금융시장이) 총체적 붕괴에 직면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했다. 민주당 선거전략가인 로버트 슈럼은 아예 “구제금융 법안의 목적은 현 상황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아 미국 경제가 침체기를 넘어 공황으로 빠져드는 걸 막기 위한 조처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체 구제금융은 미국 경제에 어떤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미 금융시장은 현재 네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구제금융 법안 통과에 앞서 진보적 시사주간지 인터넷판에 올린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문제의 근원’으로 △자산 부실화에 따른 신용경색 △무분별한 대출에 따른 상환불능 사태 △부동산 거품 붕괴와 주택 압류 폭증, 이에 따른 부동산 가격 추가 하락 △시장뿐 아니라 금융 당국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진 총체적 신뢰의 위기 등을 꼽았다. 그는 이어 “구제금융 법안은 이 가운데 오직 한 가지, 자산 부실화에 따른 신용경색에 대한 처방만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트 주커먼 편집장이 “구제금융 법안 통과는 금융위기가 ‘시작의 끝’에 다다랐음을 뜻할 뿐”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닥쳐오지도 않았다”는 게 주커먼 편집장의 판단이다. 그는 “매우 힘겨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이를 피하거나 막을 순 없다”며 “구제금융으로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국면은 어느 정도 누그려뜨릴 수 있겠지만,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바꿀 순 없다”고 말했다.
4가지 문제중 1가지 처방만 담아이를 두고 미 경제 전문가들은 “폭음을 한 다음날 타이레놀(진통제)을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표현한다. 숙취로 인한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도록 해줄 순 있겠지만, 진통제가 숙취 자체를 없애줄 수 있는 건 아니란 게다. 이를테면 “구제금융 없이 경기를 회복하는 데 5년 정도 걸린다고 할 때, 구제금융을 통해 그 기간을 절반 정도는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상원이 구제금융 법안을 통과시킨 다음날 미 증시가 급반등하는 대신 폭락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게다. 10월2일 다우존스 지수는 전날보다 348.22포인트 떨어진 1만482.85에 마감됐고,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도 92.68(4.48%) 떨어진 1976.72에 거래를 마쳤다.
부실 채권이란 콜레스테롤이 쌓여 신용경색이란 동맥경화를 불러왔다. 이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환자가 지금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다. 구제금융은, 막힌 혈관을 뚫기 위해 강력한 혈전용해제를 투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자는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여러 가지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다. 지속적인 재활치료가 필요함은 물론, 원인 치료를 위해 외과적 시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10월1일 〈PBS방송〉의 인기 토크쇼 ‘찰리 로즈’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이 정도로 ‘경제적 공포’에 떨었던 적은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는 환자는 월스트리트가 아니라 미국 경제 전체다. 심폐소생술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진작 혈압도 재고 건강관리를 했어야 한다고 환자를 비난해서도 안 된다.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이고, 주가와 부동산 가격도 하강 곡선을 이어갈 것이다. 실업률이 7%에서 9%로 올라가기만 해도 약 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현 상황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진주만 습격 사건’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월가가 아니라 미국경제가 쓰러져돌파구는 없는 걸까? 버핏 회장은 “현재 시장가격으로 부실화한 채권을 ‘현명하게’ 사들인다면, 미 연방정부는 장기적으로 경제가 회복되면 되레 큰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 회복에 필요한 ‘기간’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현명한 투자’의 사례는 이미 제시한 바 있다. 버핏 회장은 지난 9월23일 영구우선주를 매입하는 형태로 골드만삭스에 50억달러를 투자했다. 이와 함께 50억달러에 이르는 보통주를 주당 115달러의 가격에 앞으로 5년간 언제든 매입할 수 있는 ‘옵션’도 확보했다. 긴급 수혈을 받은 골드만삭스가 안정을 되찾으면, 주가는 당연히 오를 것이고 버크셔해서웨이는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 구제금융도 이런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데 미 경제·금융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물론 ‘신뢰의 위기’에 허덕이는 미 재무부가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상원에서 구제금융 법안이 통과된 10월1일 미국의 국가채무는 10조달러를 넘어섰다. 2001년 1월19일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미국의 국가채무는 약 5조7천억달러였으니, 그의 임기 동안 무려 4조3천억달러가량의 국가채무가 늘어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날 1만587.59로 거래를 마쳤던 다우존스 지수는 미 하원이 구제금융 법안을 부결시킨 2008년 9월29일 전날보다 777.68포인트 떨어진 1만365.35에 마감됐다. ‘잃어버린 8년’ 세월인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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