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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에는 다 없어질거예요

등록 2008-08-01 00:00 수정 2020-05-03 04:25

38가구 중 학생은 단 하나, 취학전 아동은 3명… 불과 10년 사이 5곳이던 초등학교는 1 곳으로

▣ 부여=글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4리에 살고 있는 38가구 76명 주민 가운데 초·중·고생은 몇 명이나 될까?

정답은 1명이다. 이 동네에서 유일무이한 학생은 버섯 가공식품을 생산하는 조계연(51)·김솔예(44)씨 부부의 아들인 조인완(18·부여고 3년)군. 조군은 서울 인근에서 태어나 살다가 6살 때인 1996년 귀농한 부모를 따라 두 살 터울인 누나와 함께 이곳 마을로 내려왔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고교 3학년인 만큼 조군은 공부하느라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김씨는 “아침 7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서는데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면 밤 12시가 다 돼서 집에 온다”고 말했다. 부여 읍내까지 통학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학생들 몇몇과 함께 봉고차를 이용한다.

상황이 이쯤 되면 마을 사람들이 조군의 얼굴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장인 이춘식(61)씨조차도 “(조군이 안 보이는 것을 보니)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상 학생은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인 셈이다.

신생아의 엄마는 모두 외국 출신

다행히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어린아이는 세 명이 있었다. 소를 기르는 조성훈(59)씨의 늦둥이 딸 조아무개(6)양은 읍내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데 내년에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고, 지한선(46)씨와 최종찬(35)씨가 2006년과 올해 각각 아기를 얻었다(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엄마가 모두 외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조양의 엄마 응우엔티칸중(36)씨는 베트남 출신이고, 지한선씨 부인 엘라이자(26)씨와 최종찬씨 부인 에밀린 누피아노(30)씨는 필리핀인이다). 하지만 마을에서 머무른 3박4일 동안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나 웃음소리, 울음소리 등은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너무 어린 갓난아기이거나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어 동네를 돌아다닐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이나 학생을 찾아보기 힘는 것은 이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86가구 176명이 살고 있는 구교1리에 학생은 초등학교 1학년인 강윤구(7)군 하나였고, 32가구 62명이 살고 있는 구교3리에도 학생이라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1학년인 신혜선(7)양이 전부였다. 강군 아버지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어서 사실 교육에 신경쓸 일은 없었다”면서도 “마을에 또래 친구가 거의 없다 보니 그냥 텔레비전 보고 혼자 노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혜선이 엄마 사와이(48·타이 출신)씨도 “마을에 친구가 없어 심심하니 만날 강아지, 고양이와 함께 논다”며 “어떤 때는 내가 논이나 밭에 일하러 나가면 따라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와이씨는 어려운 형편에도 혜선이를 일주일에 세 번씩 읍내에 있는 영어학원에 보내고, 주말에는 인근 양화면에 있는 친구집에 일부러 데려다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혜선이가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를 조금이라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친구가 없는데 심심하지 않아?’라는 질문에 혜선이는 쑥쓰러운 듯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며 엄마 품으로 달려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인 듯 했다.

아이들이 없는 만큼 학교도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구교리에 있던 임주초등학교는 1995년 임천초등학교에 통합돼 폐교됐으며, 인근에 있던 가림초등학교 보광분교와 가림초등학교도 1999년과 2000년 임천초등학교에 통합됐다. 올해 3월에도 칠산초등학교가 임천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 불과 10여 년 사이 5곳이던 임천면 내 초등학교가 1곳으로 줄었든 것이다. 1913년 개교해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는 임천초등학교 또한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이 학교 유창열 교감은 “한 번 통합을 해 학생 수가 20~30명가량 늘어났다가 또다시 학생 수가 차츰차츰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 학교 학생은 158명(초등학생 150명, 병설유치원생 8명)이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임천면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가 연간 12~14명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학생 수가 100명 미만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20학급 넘던 중학교는 네 학급으로

학생 부족에 따른 학교의 축소 또는 통폐합은 초등학교만의 일은 아니다. 면내에서 유일한 중학교인 임천중학교는 2006년 남성중학교 충화분교와 통합하고도 학생 수가 겨우 80명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이 학교 한 선생님은 “1970년대 초반 학교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20학급을 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3학년 두 학급과 1, 2학년 한 학급씩 네 학급이 전부”라고 말했다. 이 학교도 3학년은 30명이 넘지만 1학년은 10여 명에 불과해, 학생 수는 더욱 줄어들 전망이다. 1974년 문을 연 임천고등학교는 전문계로 전환한 뒤 1999년 부여전자고로 이름을 바꾸고 부여군 전체에서 학생을 모집해 명맥을 유지해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 말고도 문제는 많았다. 우선 교사와 학부모들은 도시와의 교육 격차를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유창열 교감은 “교실마다 냉온풍기가 다 설치돼 있고, 컴퓨터실과 도서실, 과학실도 현대화하고, 화장실에 비데까지 설치하는 등 솔직히 시설 면에서는 할 만큼 다 했다. 문제는 좋은 인력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방과후 활동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도 이런 시골까지 좋은 선생님이 찾아오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학교는 현재 일본어와 합창 등의 방과후 학교를 운영 중인데, 강사 문제 등으로 다른 과목 개설을 바라는 학부모들의 요청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런 문제는 학업성취도의 차이로도 이어졌다. 구교4리의 유일한 학부모인 김솔예씨는 “귀농한 뒤 아이들이 자연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았고 아이들 또한 시골로 이사오기를 잘했다고 좋아했었다”며 “그런데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왜 시골로 왔냐’고 원망스러워했다. 여기서는 돈이 있어도 학원을 보낼 수 없다. 아이들 공부를 생각하면 귀농한 것에 만족 반, 후회 반쯤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학생들의 열의와 부모들의 경제적 뒷받침 등이 시골로 내려올수록 덜하지 않겠냐”며 “서울에서 강북과 강남이 차이가 나듯이 여기 임천면만 해도 부여읍과 (학업성취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입을 모았다.

방과후 학교와 병설유치원은 안정적

하지만 구교리나 임천 지역은 교통이 편리한 편이어서 농어촌 중에서는 그나마 교육 여건이 나은 편에 속했다. 전국 1418개 읍·면의 35%가량인 500여 개 읍·면에는 보육시설조차도 전무한 것이 현실이지만, 적어도 임천면에선 방과후 학교와 병설유치원 등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적 재생산 사이클이 무너진 상황에서 희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취재 협조차 찾아간 임천면사무소에서 만난 한 직원은 “뭐하러 이런 데를 다…. 농촌에는 희망이 없어요. 정말로 특단의 조처가 없다면 이런 시골은 10년, 20년 뒤에는 다 없어질 거예요”라고 말했다.



삼남매 미영이네

70 넘은 할머니가 세 아이 거둬

아주 드물지만 시골에도 아이나 학생이 많은 집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집에는 대개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구교2리 미영(13·가명)이네 집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임천중학교에 다니는 미영이네는 미영이와 증조할머니, 할머니, 큰오빠(부여고 2년), 작은오빠(부여전자고 1년), 이렇게 다섯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병으로 숨졌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 인연이 끊긴 지 오래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고 대전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가 일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생활은 빠듯하기만 하다.



미영이 할머니(73)는 “아흔이 넘은 친정 어머니가 거동이 불편해 내가 모시고 살고 있어. 그리고 애들이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 때 큰아들이 이 어린 것들을 놔두고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떴지. 잘 먹이지도 못했는데 다행히도 지금까지 올바르게 자라줘 고맙워”라고 말했다.
사실 농촌 지역에서 조부모와 손자·손녀가 함께 사는 조손가정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95년 3만5194가구였던 전국 조손가정 수는 2000년 4만5225가구, 2005년 5만8101가구로 크게 늘었다. 전체 조손가정 가운데 농어촌 지역(읍·면 단위)에 사는 가정의 비율은 2000년 42.5%(1만9229 가구)였으며, 2005년엔 37.2%(2만1633 가구)였다. 2005년 기준으로 전국 가구수(1599만 가구) 대비 읍·면 지역 거주 가구(316만 가구) 비율이 20%가 채 안되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농어촌에 조손가정이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농어촌 지역에 조손가정이 많은 이유는 생활고와 실업난, 이혼, 학대, 폭력 등으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면서 갈데가 없어진 아이들을 농어촌에 살고 있던 조부모가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큰 문제는 농촌지역 조손가정은 도시지역 아이들보다도 더 방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역아동센터 등 정부나 민간 복지시설의 손이 닿기 어렵기 때문에 방과후 집에 돌아와 하릴없이 놀거나 컴퓨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시골 조부모에게 맡겨졌다가 개에 물려 죽은 아이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또 양육 책임자인 조부모의 경우 상대적으로 낮은 학력과 교육에 대한 의지나 지식 부족으로 인해, 아이 학업 수준도 평균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은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것부터 챙길 수밖에 없다. ‘혹시 소원 같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미영이 할머니는 “삼시 세끼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고 겨울에 등 따습게 지낼 수 있으면 뭐가 더 바랄 게 있나. 그런데 요새 기름값이 너무 많이 올랐다며? 올겨울에 기름이라도 맘 놓고 땔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지”라고 말했다. 같은 질문에 미영이는 수줍은 표정으로 “그냥 지금, 할머니랑 사는 게 좋아요”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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