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강화가 유일한 대안일까…학대에서 어린이를 보호하는 것이 미래 범죄자 막는 길
▣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지난 2000년 9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중상을 입혀 세상을 뒤집어놓은 정두영(당시 21살). 그는 출생부터가 불우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없는 집안의 넷째였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삼촌집에 맡겨졌지만 삼촌마저 조카를 감당하지 못했고 정두영은 다섯 살 때 고아원에 들어갔다. 버림받은 것이다. 2년 뒤 어머니는 그를 재혼한 집으로 데리고 갔지만 몇 달을 견디지 못했다. 부부 갈등 끝에 어린 정두영을 다시 고아원에 맡겨버린 것. 어머니와 삼촌에 의해 반복적으로 버려졌다는 느낌은 평생 정두영의 생각을 지배했다. 고아원에서도 그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아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어른 정두영은 흉악범이 되었다.
온 사회를 경악하게 한 납치·유괴·성폭력·살인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이처럼 대부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의 이력을 갖고 있다. 온전치 않은 가정환경과 일상화된 가정폭력, 어른에 의한 신체적·언어적·성적 학대 등에 노출된 경우가 많다. 부모 가운데 한쪽에게서 처절하게 버림받았다는 것도 한 특징으로 꼽힌다. 2000년 고창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김해선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가출하면서 인생 항로에 빨간불을 켰다. 유영철도 월남전 참전군인 출신인 아버지가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일삼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펴낸 ‘성폭력 범죄의 유형과 재범 억제 방안’을 보면, 어린이 대상 성범죄자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거나 성인이 돼서도 성적 소외를 경험한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이 대상 성폭력 범죄자 44명을 대상으로 아동·청소년기의 신체 학대 경험을 물은 결과 ‘조금 있었다’가 50.5%로 절반을 넘었으며 4.5%가 ‘매우 자주 있었다’고 응답했다. 성 학대 경험에 대해서도 15.9%가 ‘있다’고 대답했다. 정서적 학대의 일종인 ‘방임’도 많이 당했다고 응답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아기호증 환자와 일반인 각 5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소아기호증 환자가 어릴 적 훨씬 더 많은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연구도 있고 미국 청소년 성범죄자 200명의 발달력을 조사해보니 어릴 적 성적 학대가 가장 큰 범죄 요인인 것으로 드러난 연구도 있다”며 “유전이나 폭력적 매체 노출 등 다른 요인보다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와 폭력 경험이 성범죄자를 만드는데 장기적인 영향을 준다는 게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고 말했다.
“20%를 5%로 줄이는 효과”
전문가들은 이런 부정적 환경이 자라나는 아이에게 애착감, 자존감, 타인의 정서에 공감하는 능력 등의 결핍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즉, 자신이 부모 등 가족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이 사회에서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 사회의 가치 기준에도 둔감해지게 된다. 이는 곧 성인이 돼 범죄를 저지르면서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사회규범에서 일탈하면서도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는 원인이 된다.
이런 요인들이 잠재된 가운데 주변의 여성 문제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이 발생하면 손쉽게 부녀자나 아동을 상대로 한 흉악 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경기 안양에서 초등학생 2명과 전화방 도우미 등을 살해한 정아무개씨도 경찰 조사에서 “3명의 여성과 결혼을 염두에 두고 교제했으나 일방적으로 실연을 당한 뒤 여성에 대한 경멸과 멸시, 타인에 대한 증오가 생겼다”고 진술한 바 있다. 유영철이 무려 20명을 잇달아 살해하기 직전 부닥친 상황도 특수절도 혐의로 수감 중이던 2002년 5월 부인의 일방적인 이혼 통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요인들은 범죄를 촉발한 ‘방아쇠’ 구실을 할 뿐, 흉악 범죄의 ‘뇌관’은 여전히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돼온 내면의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런 점에서 어린이 대상 흉악 범죄를 막겠다며 최근 우리 사회가 쏟아내고 있는 대책들은 단편적이다. 검거와 처벌 강화가 중심이다.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환경적 요인들은 도외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래의 유사 범죄 발생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들이 일고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과의 김붕년 교수는 부모의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은 경우 부정적인 사회환경적 요인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거나 빈곤 가정을 도움으로써 20%에 이를 범죄자 발생률을 5%로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일제고사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엄마나 아이의 다른 정서적 욕구에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 아래서 자라는 아이라면 월수입 2천만원짜리 가정이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만큼 똑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 탓, 책임 전가의 심리
이웅혁 경찰대 교수는 “가장 효과적인 범죄 대책은 바로 복지정책”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복지정책을 폄으로써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충분한 애착감과 자존감, 공감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게 앞으로 우리 사회에 닥칠 또 다른 흉악 범죄를 막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지정책에다 사회범죄에 대한 예방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찰과 교도소를 늘리고 강력한 처벌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화당식 접근’보다는 방과 후 아이들의 교육 복지 프로그램을 늘리거나 지역사회 네트워크 형성에 필요한 예산을 확충하는 식의 ‘민주당식 접근’이 범죄 토양의 확산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부모의 적극적인 구실이 가장 현실적인 범죄 예방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정화 한국아동심리코치센터 대표는 “안양 어린이 살해범 정씨나 유영철이나 어릴 적 온전한 신뢰감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기반을 만들지 못했다”며 “살아가면서 자신의 가치와 강점들을 단련할 수 있는 멘토나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우리 사회가 여성, 특히 여자 어린이에 대한 폭력에 여전히 관대하고 허용적인 관습을 갖고 있는 점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점으로 지적된다. 김붕년 교수는 “여성 문화의 발달과 양성 평등에 대한 신념, 장애인 보호 등에 대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시민 각자와 공동체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세심한 사랑과 배려를 쏟고 아이들이 폭력·학대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대신, 사건이 터진 뒤 경찰 탓만 반짝 하는 건 일종의 자기중심적 편의주의, 책임 전가의 심리에 바탕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범죄는 여드름과 같아서, 하나의 현상이지만 그 밑에는 오래된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며 “언론과 사회가 겉으로 알려진 사건에 대한 대응에만 비평의 초점을 맞추는 까닭은 더 깊이 파고들면 사회 균형의 문제나 나 자신의 변화가 필요한 문제 등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과 맞닿게 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진정 미래의 어린이를 구하고 싶다면, 더 힘들고 더 비싸고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근본 대책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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