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허약한 직접민주주의를 보여준 서울시 학교급식조례 좌초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중학교 사회 과목 기말고사에 “우리나라 국체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나온다면 정답은 당연히 ‘민주공화국’이 돼야겠지만, 우리 사회가 국민의 뜻을 반영해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국민의 이해는 각자가 놓인 정치·경제·사회적 위치에 따라 잘게 파편화돼 있고, 권력을 쥔 정치집단과 자본의 이해는 늘 명확하고 압도적이다. ‘민(民)이 주인(主人)’이라는 민주주의의 뜻과 실제 민주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자신들의 뜻을 정치 과정에 반영하기 바라는 시민들에게 참기 힘든 정치적 박탈감을 안겨준다. ‘87년 체제의 위기’라는 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평택 미군기지 확장 과정에서 드러나듯 관의 주도로, 그것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우리 일상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이다.
최소 서명인원 14만 명
그렇지만 1995년 민선자치장 시대가 시작되면서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계된 지방자치 사무에 대한 참여 통로는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우리 법 체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지방자치 사무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는 △주민발의 △주민감사 △주민소송 △주민투표 등이 있고, 2007년 7월부터 주민소환제가 도입됐다.
실제 현장에서 이들 제도는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얼마나 구현하고 있을까. 20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들의 참여로 발의된 서울시 학교급식조례가 좌초하는 5년 역사를 뒤돌아보면, 직접민주주의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제도인지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서 아이들에게 ‘우리 농산물’로 만든 좋은 급식을 먹이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3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옥병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상임대표는 “국회에 제출한 급식법 개정안이 잠자고 있어 이 문제를 풀뿌리 민주주의로 풀어보자는 논의가 2002년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은 일정 수 이상의 시민들이 서명을 모아 그들이 원하는 내용이 담긴 조례를 만들거나 없애달라고 요구하는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 이를 주민발의제 또는 ‘조례의 제정과 개폐청구권’이라고 부른다. 학교급식네트워크,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민주노동당 서울시지부 등은 아이들에게 우리 농산물을 먹이는 것을 뼈대로 한 ‘서울시학교급식지원조례안’을 주민발의제를 통해 만들어보기로 결정하고, 2003년 10월1일 ‘서울시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참여는 시민들의 헌신을 뜻한다. 서울시에 제출하는 서명에는 서명자의 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서명일자·서명날인이 포함돼야 한다. 서울시에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최소 서명인원은 14만 명이었다. 거리에서 한 번이라도 서명운동을 벌여본 사람이라면 정해진 용지에 14만 명의 이름과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채우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운동본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44개 단체가 매달려 “아이들에게 좋은 급식을 먹이자”는 구호 아래 6개월 동안 서명 작업을 벌였다. 14만6258명의 서명이 모였다. 그 서명 용지를 커다란 라면박스에 담아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2004년 3월30일 명단을 제출했다. 서울시를 상대로 주민들이 조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사례는 그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한 번도 없다.
이름-주민번호 대조해 퇴짜
서울시는 주민들의 요구를 당혹스러워했다. 조례 시행에 예산 부담이 큰데다, ‘학교급식엔 우리 농산물을 사용한다’는 표현이 ‘내국민 대우’를 주요 원칙으로 내세우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운동본부가 제출한 주민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정밀 대조해 2만4476명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은 명단에 오류가 있을 경우 이를 보충할 시한을 ‘5일’로 정해두고 있었고, 모자라는 서명은 1만7천여 명이나 됐다. 당시 서울시 의원으로 서명운동에 참여한 심재옥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위원장은 “너무 당황해 조례 제정이 물 건너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먼저 나선 이들은 아이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뻔히 지켜보고 있는 교사들이었다. 창신초등학교에서는 교장과 교사들이 “조례를 꼭 만들어야 한다”고 학부모들을 설득해 3177명의 명단을 운동본부에 전달했고, 원묵초(1638명)·한남초(847명)·증산초(171명) 등에서도 서명 용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법원 도서관, 민주노총 전국엔지니어링노조, 태광산업, 서원이엔시, 청소년 내일여성센터, 송파구 둔촌동 주공아파트 4단지, 동작구 노량진2동 주민 등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 잇따랐다. 운동본부는 2004년 5월3일에서 5월7일까지 6만7101명의 서명을 모았다. 결국 총 서명자는 21만3359명이나 됐다.
이후 서울시와 운동본부, 서울시의회와 행정자치부 사이에 오간 공방은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서울시와 운동본부는 ‘우리 농산물’을 두고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서울시는 운동본부의 조례안을 시의회에 부의하면서, ‘우리 농산물’이라는 구절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잊지 않았다. 시의회는 격론 끝에 2004년 12월2일 본회의에서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서울시는 시의회에 이를 재의결할 것을 요구했고, 시의회는 2005년 2월24일 이를 재의결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조례 공포를 거부했다. 결국 조례를 공포한 사람은 서울시의회 의장이었다. 조례는 효력이 생겼지만, 이번엔 행자부가 다시 태클을 걸었다. 행자부는 2005년 4월4일 WTO 협정을 문제 삼아 대법원에 조례를 무효로 만들어달라고 소송을 걸었고, 재판은 2년 넘게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우리 농산물’ 구절 반대, 대법원 소송
20만이 넘는 주민들의 참여는 어디로 갔는가. 운동본부는 2006년 6월 개정된 학교급식법과 문제가 된 ‘우리 농산물’ 표현을 다듬은 새 조례안을 만들어, “법적 하자가 없다”는 교육부의 회신까지 받았다. 그사이 애초 조례안을 통과시킨 시의회의 임기는 만료됐고, 2006년 7월 새 시의원들이 몰려왔다. 새 서울시의회는 운동본부의 새 조례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 심재옥 전 서울시의원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례안을 쥐고 있는 정연희 서울시의회 교육문화위원회 위원장은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도 아니고… 아무튼 할 말이 없다”며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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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주민발의(조례의 개폐청구)
도입 시기 : 1999년8월
관련 규정 : 지방지치법 15조
주민들이 지방자치단체에 원하는 조례를 만들거나, 바꾸거나, 없애달라고 요구할 수 있음
</li><li>주민투표
도입 시기 : 2004년7월
관련 규정 : 지방자치법 14조·국민투표법
지방자치단체장이 주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거나 영향을 주는 문제들을 정하기 위해 투표로 주민들의 의견을 물을 수 있음
</li><li>주민감사청구
도입 시기 : 2000년3월
관련 규정 : 지방자치법 16조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법을 어겼거나 공익과 어긋날 때 주민이 상위 기관에 감사를 벌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음
</li><li>주민소송
도입 시기 : 2006년1월
관련 규정 : 지방자치법 17조
법을 어긴 지방자치단체의 재무 행위에 대해 주민이 직접 소송을 제기해 그 행위를 중단시키고 낭비 예산을 환수할 수 있음
</li><li>주민소환
도입 시기 : 2007년7월
관련 규정 : 지방자치법 20조·주민소환에 관한 법률
주민들이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나 지방의원의 해임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 해임할 수 있음
*자료:행정자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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