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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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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생에 이 나라 사람이었나봐

등록 2007-06-29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한국보다 더 자기 몸에 맞는 곳을 찾아 머무르는 사람들</font>

▣ 엄기호 하자센터 글로벌 학교 팀장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국경을 넘는 경험은 단지 ‘바깥’의 것에 대한 경험의 축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이 일상화된다면 자신의 위치를 ‘바깥’과 ‘안’의 명확한 경계 한쪽이 아닌 모호한 곳에 둔다. 그것은 더 이상 ‘관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그리고 몸에 맞는 친숙한 공간의 발견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발견되면 더 이상 새로운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보다는 시간이 되면 가방을 싸서 그곳으로 가 머무른다. 그곳의 음식이 입에 맞고, 그곳의 옷이 몸에 맞고, 그곳의 하루가 자연스러우며 마음이 머무른다.

볶음밥 때문에 틈만 나면 인도네시아로

“난 전생에 티베트 사람이었나봐.” 일본에서 유럽까지 제법 여행을 많이 해본 A는 이제 시간이 되면 티베트에 간다. 가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거리를 돌아다니고 사원에 가서 기도한다. 티베트를 방문하기 전 특별히 열성적인 불교신자도 아니었다. 티베트식 이름도 스님으로부터 받았다. 한국에 와서는 ‘전생에 티베트 사람’이었던 사람들과 모여 티베트어 공부도 한다.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그이지만 ‘자유 티베트’(Free Tibet)를 외치면서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한다. 그는 티베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다른 어느 곳을 방문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탁 풀어지면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B는 홍콩 ‘마니아’이다. 시끄럽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그가 휴가만 되면 홍콩에 날아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홍콩에서 특별히 쇼핑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는 홍콩의 ‘극단성’을 사랑한다. 한편에는 60층 넘는 빌딩이 천공의 섬 ‘라퓨타’처럼 빽빽이 들어차 있지만 그 골목골목 사이에는 아직도 붓글씨로 쓴 간판을 단 가게가 즐비하다. 지하철을 타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고 무단횡단을 밥 먹듯이 하지만 국제공항이 있는 란타우섬은 남지나해의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호젓하기 그지없는 하이킹 코스이다. 그는 이런 홍콩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을 거꾸로 발견했다.

심지어 시간만 나면 인도네시아에 열심히 가는 친구 중에는 그 이유가 ‘너무나 맛있는 인도네시아의 볶음밥’ 때문이라는 경우도 있다. 이 친구가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볶음밥을 열심히 먹고, 돌아올 때 인도네시아 볶음밥을 만드는 향신료를 잔뜩 사가지고 오는 것이다. 누구는 타이에 가는 유일한 이유가 환상적인 타이 마사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유행하던 문화이론에서 그토록 열심히 이야기하던 ‘몸’이 무엇인지 아무리 책을 읽어도 관념적이기만 했는데 타이에서 마사지를 받으면서 비로소 그 실체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이것이다. “나 아무래도 전생에 이 나라 사람이었나봐.”

그 나라의 정치·사회를 더 걱정

외국을 드나들 때마다 국경을 넘는 여행의 경험이 제법 쌓인 30대들, 혹은 20대 중·후반을 중심으로 점점 전생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이들에게 해외여행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을 찾는 ‘세계여행’이라기보다는 한국보다 더 자기 몸에 맞는 곳으로 가서 머무르는 것이다. 또한 그곳을 방문하는 일은 일상화된다. 국경을 넘는다는 의식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나면 특별한 목적 없이 무박3일 도깨비 여행으로라도 그곳에 ‘가기’ 위해 ‘그냥’ 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소소한 것을 사며 즐거워하고, 별것 아닌 일상적인 공간을 거닐며 마음 편해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기 몸에 맞는 곳을 발견한 사람들끼리 모여 한국에서도 ‘그곳에 있는 것’처럼 노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생겨났다. 과거에 유럽 배낭여행객들 사이에서 ‘파리’파와 ‘런던’파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아시아에서도 무슨무슨 ‘파’들이 여기저기에 숱하게 결성돼 있다.

사실 전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히 재밌는 이야기 방식이다. 전생은 다른 두 공간 사이의 인연을 차이나는 시간의 인연으로 치환해 충돌하는 두 정체성을 완충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인임을 굳이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홍콩인이라거나 타이인이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가끔 여기서 살아볼까라고 말을 하지만 ‘이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정도도 아니다. 전생이기에 이생에서 굳이 꼭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인연의 끈을 놓치지 않고 ‘건강하게’ 관심을 이어나갈 수 있다. 전생이 아닌 이생에서의 삶은 그것이 어디이건 고달프고 구질구질하다.

그래서 재미난 것은 이들이 삶의 터전인 한국의 구질구질한 정치나 사회에 대해서는 “I don’t care”(상관없어!)를 외치지만 ‘전생의 고향’인 그 사회에 대해서 ‘건강한’ 연민과 연대의 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A처럼 그 지역의 언어를 배우고 정치 문제로 시위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곳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기뻐한다. 타이 마니아들 중에는 지난해 타이에서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자신이 만났던 타이인들과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블로그와 카페에 글을 올리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인도네시아 등에서 자연재해가 벌어질 때마다 자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의 눈망울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면서 관심을 호소하는 글들이 더 ‘설득력’ 있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국의 문화재는 무너지든가 말든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곳의 문화재가 그쪽 정부의 무관심이나 관광객의 등쌀에 망가지고 있다는 기사에는 자기 물건이 훼손당하는 것처럼 분노하며 댓글을 달기도 한다. 이들의 마음은 한국보다는 오히려 국경을 넘어 그곳에 닿아 있다.

갇힌 정체성 넘어서기

국경을 넘는 경험이 두터워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한편에서는 한국인이라는 돈을 바탕으로 섹스 관광과 명품 싹쓸이도 더욱 기승을 부리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이 머무는 곳과 소통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한편에서는 인도를 주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더욱더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카스트제도에 신음하는 불가촉천민들의 현실에 눈떠 여성 빈민들이 폐비닐로 만드는 가방을 ‘공정무역’으로 소개하려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좋은 징조이다. 이들에 의해서 신문 국제란에 갇힌 딱딱한 외국의 이야기는 ‘자기’가 있는 좀더 따뜻한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에 공명하는 마음들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국경을 넘는 경험은 전생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국인이라는 갇힌 정체성을 넘어 다른 사회에 대한 건강한 연민으로 조금씩 아래로부터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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