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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에 나타난 ‘양귀신’들

등록 2007-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타클라마칸의 모래더미에 묻혀 있는 고대도시들을 약탈한 고고학자들…“우리가 아니었으면 파괴됐을 것” 부끄러움 없이 도둑질을 정당화해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카라부란이여, 아 공포의 검은 폭풍이여/ 나의 고향을 빼앗고 나의 고향을 파묻고/ 내 사랑하는 처자식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던/ 아 카라부란이여, 너의 검은 마수에 온 누리가 사막이 됐구나/ 아름다운 내 고향이여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랴.’(웨이우얼 구전 ‘카라부란의 노래’)

보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스벤 헤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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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우얼인들은 사막의 검은 모래폭풍을 ‘카라부란’(黑暴風)이라고 부른다. 카라부란은 사막의 도시를 단숨에 삼켜버릴 만큼 거대하다. 이 지역의 전설과 민담은 검은 바람의 공포를 이르며, 타클라마칸사막을 재앙의 지역으로 선포했다. 지금은 사라진 부요의 도시에는 탑과 성벽이 높이 서 있고, 그 안에는 금화와 은화가 가득 쌓여 있다. 하지만 보물을 가져오려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사막의 귀신들이 달라붙는다. 그래서 타클라마칸은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곳’이자 ‘(잃어버린) 옛 고향’이라는 뜻으로 전해진다.

타클라마칸에 걸린 귀신의 마법을 푼 이들은 외국 귀신들이었다. 19세기 말 아편 판매 등 제국주의의 침탈로 달궈진 중국인들의 반외세 감정 속에서 외국인은 ‘외국 귀자’(外國鬼子)나 ‘양귀자’(洋鬼子)로 불렸다. 이런 귀신들은 실크로드에서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였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 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 프랑스의 폴 펠리오, 러시아의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미국의 랭던 워너 그리고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유물을 빼갔다. 간쑤성 둔황석굴에선 엄청난 고문서들이 쏟아져나왔고, 서역 북도의 고창고성·교하고성·아스타나 고분군·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등에서도 유물이 발견됐다. 서역 중도와 남도에서는 누란·니야·단단위리크 등 사막 속에 묻힌 오아시스 도시들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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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스벤 헤딘은 보물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이었다. 1899년 그가 타클라마칸 동쪽 로프노르(뤄부포) 사막을 건너다 마주친 곳은 러우란(누란)이었다.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독립을 유지하다가 4세기쯤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러우란 왕국의 폐허를 발견한 것이다. 목간(나무로 된 편지) 120편과 융단 조각 등을 챙겨 돌아간 스벤 헤딘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1500년보다 훨씬 전에 이 고대도시의 마지막 거주자가 집을 떠나던 때 모습 그대로였다.”

1500년의 침묵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실크로드에 나타난 두 번째 귀신은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아우렐 스타인이었다. 스타인은 단단위리크, 니야와 러우란을 돌며 유물을 수집했다. 그는 열사의 사막에서도 ‘영국 신사’다운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항상 애견을 데리고 다녔으며, 대원들을 거느리고 큰 도시에 입성할 때는 미리 통지해서 도시 입구에 사절이 나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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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는 1904년 고창고성에서 한탕 유물 잔치를 했다. 한 농부의 손에 이끌려간 르코크는 그동안 발견된 적이 없는 마니교 벽화를 목격했다. 그는 여기저기 훼손된 다른 유적들을 보며 자신이 좀더 일찍 왔어야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떤 벽화는 부서져 있었다. 농부들이 벽화에 덧칠한 안료를 거름으로 쓰기 위해 떼어갔기 때문이다. 건물 골재로 쓰였던 나무들은 땔감으로 뽑아가 없어진 상태였다. 그는 벽화를 떼어 독일로 가져가기로 결심했고, 그가 비난했던 농부들 못지않게 야만적인 문화재 파괴자가 되어 있었다.

130파운드 쥐어주고 몰래 빼돌리다

르코크는 나중에 출판한 책에서 벽화 제거 과정을 생생히 묘사했다. 먼저 그는 예리한 칼로 벽화 주변을 깊게 긁었다. 그리고 벽화 둘레에 파인 홈에 망치와 끌을 써서 벽화와 평행하게 구멍을 낸 다음, 그 구멍에 톱을 대고 썰기 시작했다. “회벽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기 때문에 톱질해서 들어내야 할 그림에 종종 펠트를 덮은 널빤지를 대고 눌러야 했다. …이 작업에 들인 육체적 노고는 말할 수 없이 컸다.”

1907년 3월 영국의 스타인은 둔황에 도착한다. 둔황석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왕위안루(왕원록) 도사가 한 동굴 벽 뒤에서 엄청난 분량의 고문서를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스타인은 중국의 고승 현장법사를 존경하는 제자로 위장해 환심을 샀다. 왕 도사는 여느 외국인과 다른 그의 공손한 태도에 감복했고 며칠 뒤 스타인에게 유물 관찰을 허락했다. 스타인은 왕 도사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자신의 텐트로 유물을 가져와 관찰하다가 결국은 손상되지 않은 7천여 종의 문서와 일부만 남아 있는 5천여 종의 문서를 싸서 둔황을 탈출했다. 나중에 목록을 만드는 데만 반세기가 걸린 방대한 분량이었다. 하지만 스타인이 둔황석굴 복원 기금조로 왕 도사에게 쥐어준 돈은 130파운드였다.

다음 차례는 프랑스인 폴 펠리오였다. 그는 스타인이 대박을 터뜨리지 1년 만에 이 동양의 왜소한 승려 앞에 나타나 6천여 종의 문서를 챙겼다. 왕 도사에게 준 돈은 90파운드. 펠리오에 이어 들어온 이들은 일본 오타니 탐험대였다. 그들은 600가지 문헌을 받아갔다. 이어서 러시아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와 미국인 랭던 워너가 차례로 찾아왔다. 중동 쿰란동굴의 사해문서(구약성경) 발견과 비견되는 둔황석굴 17호는 이런 식으로 바닥을 드러냈고, 석굴은 ‘뺑소니 사고현장’으로 전락했다.

둔황석굴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대해 웨이우얼인들은 100년 내내 부끄러워하며 서양의 귀신들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당시 탐험대는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본국에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고, 생사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출판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이런 태도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실크로드에서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 ‘고고학 경쟁’을 그린 책들은 탐험대의 문화재 약탈을 지적하면서도, 약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읊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문화유산이 세계에 알려졌다는 것, 만약 그대로 놔두었다면 현지인들에게 도굴됐거나 파괴됐을 것이라는 가정법으로 이어진다. 자주 읽히는 실크로드 책들 역시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다.

“심지어 둔황 사람들은 스타인의 습격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이 도시는 ‘애국적으로 자행된 불의의 순례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사람들의 입에 거의 오르내리지도 않고 보존에 필요한 돈도 전혀 흘러들지 않는 석굴들이 대단히 많다.”(베른트 리프너, )

실크로드 ‘문화전파론’도 제국주의적 시선

또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실크로드의 수수께끼는 현지인이나 중국인이 아닌 서양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풀렸다. 이로 인해 ‘문화전파론’이 실크로드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자리잡게 됐다. 서양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문명이 인도와 실크로드를 지나 동양에 전래됐다는 문화전파론은 제국주의적 성격이 내재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실크로드도 오리엔탈리즘이 투영된 이름이다. 중국에서 원래 ‘서역’이라고 부르던 이곳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에 의해 ‘실크로드’로 통칭되기 시작했다. 를 지은 김영종(51)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 지역 민족의 역사 속에서 유물이 해석돼야 하고, 유물에서 그들의 사회적·미적 욕망을 밝혀내야 한다.” 이는 어쩌면 구한말 여러 제국에 유물을 내주었던 한국이 실크로드를 바라봐야 할 관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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