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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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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를 보호해줄 수 없다

등록 2006-12-27 00:00 수정 2020-05-02 04:24

외환위기 10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고립과 불안의 그림자…자영업자·비정규직·정규직 3명의 발자취로 그려본 사회 변화

“외환 및 금융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조절자금(긴급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임창렬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의 형식을 빌려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한 것은 1997년 11월21일 밤이었다. ‘외환위기 사태’ 또는 ‘IMF 구제금융 사태’는 그렇게 시작됐다.
임 부총리는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직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런 의사를 정식으로 통보했다. 그해 12월3일엔 임 부총리와 캉드쉬 총재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은 ‘IMF 관리 체제’에 편입됐다. 한국은 IMF의 처방에 따라 고금리 정책과 재정 긴축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경상수지 흑자를 이뤄 2001년 8월23일 1억4천만달러의 상환을 끝으로 195억달러에 이르는 IMF 구제금융을 모두 갚아 ‘IMF (경제 신탁통치) 졸업’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예정(2004년 5월)보다 3년 가까이 이르게 IMF 빚은 정리했지만, 그 기간 중 이뤄진 구조조정 과정에서 겪은 고통은 컸다. ‘IMF식 처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후유증은 경제, 사회 각 부문의 ‘양극화’로 이어져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외환위기 뒤 강화된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흐름은 ‘평생 직장’의 개념을 무너뜨렸고 개인들은 파편화했다. 평생 직장을 대신할 사회 안전망은 여전히 부실해 사람들은 ‘고립’되고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은 외환위기를 고비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던 자영업자, 비정규직, 정규직 회사원 등 3명의 삶을 추적해 ‘외환위기 10년’이 빚어낸 우리 사회 변화의 단면을 짚어보았다. 편집자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기아차 떠나 자영업 시작한 김세창씨

부동산 경기에 잠 못 이루는 나날들

위기의 징후를 느낀 건 공교롭게도 이국 땅에서였다. 그것도 보도를 통해서….
“1997년 4~5월께였을 겁니다. 회사(기아자동차) 일로 중국 베이징 근교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 일정이 끝나 호텔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뉴스에 ‘기아’ ‘뱅크럽시’(Bankruptcy·부도) 얘기가 나오더군요.” 기아자동차를 떠나 지금은 인테리어 업체 ADIN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세창(44)씨는 10년 전의 그 일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팀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죠.” 당시 기아자동차 기술센터 선임연구원(과장급)이었던 김 대표는 해외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중국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대회 관련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 뉴스에 화들짝 놀란 팀장은 국내에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런 것 같다’는 얘기를 팀원들에게 들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부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외환위기의 한 빌미였던 이른바 ‘기아차 사태’의 시작이었다.
“회사가 부도난 상태에서도 열심히 일했는데, 자꾸 조바심이 생기더군요. 재정적 문제에 대해…. 어느 순간 보너스가 안 나오고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고 하니, 생계 문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대요.” 6개월쯤 지나면서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고, 상여금을 반납하는 비상 조처가 내려지기도 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도 잘 버티던 그가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건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현대자동차와 합병한다는 얘기가 집중적으로 불거지면서부터였다. “현대로 넘어가면 엔지니어(기술자)로 남아 있기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주대 기계공학과(82학번)를 졸업한 뒤 1988년 기아자동차 중앙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기아맨’ 배지를 단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회사를 떠난 그는 1년 반쯤 국제 자동차 경주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드라이버)들을 후원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매니저 구실을 맡다가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왜 하필 이 일이었느냐고요? ‘집사람’이 프리랜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부부 둘이서 단출하게 시작한 회사 이름 ADIN에는 ‘진일보한(ADvanced) 인테리어(INterior)’라는 뜻을 담았다. 회사 규모가 커져 어느덧 4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지금도 그의 아내는 디자인 실장으로 경영에 공동 참여하고 있다.
지난 12월15일 밤 경기도 분당의 ADIN 사무실에서 두런두런 옛 기억을 더듬던 중 김 대표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가 자못 쩌렁쩌렁했다. “아빠~! 내일 축구 시합에 올 거지?” “그래, 갈게.” 전화기를 내려놓는 김 대표의 표정이 환해 보였다. 지역 유소년축구단의 골키퍼로 활약 중인 4학년짜리 아들은 아버지랑, 6살짜리 딸은 엄마하고 친하다며 웃었다.

현대의 합병 소식 듣고 기아 떠나

김 대표의 ADIN은 분당 지역에만 600개 안팎에 이르는 인테리어 업체 가운데 메이저(유력)급에 든다고 한다. “이제 먹고살고 아이들 공부시킬 정도는 된다”는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은 2003년 하반기였다. 매장을 넓혀 지금의 서현동으로 옮아오면서 수입가구 유통에 뛰어든 터에 ‘8·31’(정부 부동산 대책)의 파편을 맞았다. “사람들이 이사를 해야 가구를 바꾸고, 커튼도 바꿔 달고 할 텐데, 부동산 경기가 식으니 ‘올 스톱’(완전 중단) 상태에 들어갔죠. 서너 달 동안 주문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이뤄 새벽 3시에 누웠다가 4시 반에 깨는 식이었습니다. 3개월쯤 지나니까 미안했던지 5명 직원 가운데 3명은 알아서 떠나더군요. 나중엔 나머지 2명 중 또 1명이 떠났고…. 이듬해 봄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서 좀 나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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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 때문에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일이 있었다. 학교에 훌라후프를 갖고 가야 된다기에 지압 기능을 갖춘 커다란 아줌마용 훌라후프를 들려주려 했다가 아내로부터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는 울음 섞인 핀잔을 들었다. 주머니 잔돈까지 뒤져 겨우 3천원을 만들어 아들 손에 쥐어보내고선 사무실에 나와 한 시간 동안 울었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늘 벗어나지 못하는 건 그런 아픈 기억 때문일 터이다. “이 사업은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아파트 짓는 것과 달리 A라는 집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B아파트에 적용할 수 없죠. 그게 약점입니다.”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사업가로서 당연한 대응 심리인 동시에 외환위기의 우울한 기억에서 비롯된 면도 있어 보였다. “국가도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는 걸 목격했지 않습니까? 국가적 위기, 경기 불황 때 ‘누구도 날 보호해줄 수 없다’는 걸 느꼈으니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감에도 김 대표는 “자꾸 외도(다른 사업)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은행 정규직에서 비정규직 된 한지수씨
같은 은행, 같은 일, 1/3의 월급

김 대표의 10년 세월도 한지수(45·가명)씨 사연에 견주면 순탄했던 편이다. 한씨의 지난 10년은 평범한 직장인이 어느 순간 비정규직으로 뒤바뀌어 신산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상고 출신의 한씨가 당시 잘나가던 A은행에 입사한 건 1980년 초였다. 같은 은행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 사내 결혼를 했고, 자신과 남편 둘 다 선망받는 은행원이었기에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렸다.



평온한 가정에 IMF 경제 위기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은행에는 ‘명예퇴직’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칼바람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한국 경제가 망하고 있는데, 우리가 다니는 은행도 곧 문 닫게 될 것이다.” “은행이 유동성 위기에 처했으니 은행을 살리려면 누군가는 배에서 내려야 한다.” 온갖 흉흉한 말들이 날마다 은행 안팎에 퍼졌다. “몇 달치 퇴직위로금을 받고 빨리 떠나는 게 더 낫다”는 사람도 있었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하는 동료도 있었다.
처음엔 버티던 남편도 상고 출신 동료들이 무리지어 은행을 그만두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98년 초 결국 은행을 떠났다. “전업주부였다면 누구나 바짓가랑이 잡고 명퇴를 말렸을 텐데, 제가 은행에 다녀봤기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워낙 부지런해서 은행을 나와도 다른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죠.” 남편은 퇴직위로금으로 무역 일도 하고 쓰레기 재활용 사업도 해보는 등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댔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한씨는 외환위기 전인 1995년 아이들 문제로 잠깐 휴직했다가 이미 은행을 그만둔 터였다.

15년 다닌 은행, 옛정 따윈 없었네

남편이 은행을 나온 뒤 1년쯤 지났을까? 남편 사업이 잘 안 풀리면서 김씨는 재취업에 나섰다. B은행에 들어갔는데, 영업점에서 입출금 업무를 맡는 텔러(창구 직원)였다. 물론 비정규직이었다. “B은행에 다니고 있던 선배 언니가 한 번 나와 일해보라고 해서 처음에는 한 달만 일할까 생각하고 갔어요.” 살림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B은행 일은 더 길어졌고, 2004년까지 4년 정도 계속됐다. 고용불안 속에서 재계약되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일 잘하는 직원’으로 인정받아 은행 VIP 고객을 관리하는 일도 맡겨졌다. “그런데 고용 재계약 신용보증을 할 때 지점장이 기록을 조회했는데 남편의 신용불량 기록이 나타난 거예요. 돈 많은 고객들을 상대하는 제가 혹시 고객 돈을 들고 숨어버릴까봐 동료들이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결국 김씨는 이 은행에 오래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민 끝에 스스로 B은행마저 그만뒀다.
그동안 큰아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남편은 2000년 말 재취업을 위해 혼자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당시 신용불량자가 급증하고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자살하고 그랬어요. 남편 걱정이 컸죠.” 김씨는 2천만원 정도를 어렵사리 마련해 별다른 연고도 없는 동남아시아로 남편을 떠나보냈다. 김씨 가족은 그렇게 흩어져야 했고, 김씨는 친정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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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이를 위해 김씨는 다시 은행을 찾아나섰다. 15년간 다녔던 A은행에 다시 취업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역시 비정규직이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안 잘리려고 일을 더 열심히 했는데….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고 월급은 과거의 3분의 1도 안 됐어요.” 1년 일했을까? 2004년 어느 날 이메일이 한 통 날아들었다. 해고통지서였다. 15년 동안 다녔던 은행이지만 옛정이고 뭐고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1년 일하려고 그 은행에 다시 들어간 게 아닌데….”
지금까지 6년간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에 자리잡고 머물고 있는 남편은 식당일 등을 전전하다가 2년 전부터는 돈을 좀 벌어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한씨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힘든 세월을 통과해왔지만, 돌이켜보면 남편이 해외로 나가 자리잡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국내에 다시 들어와 개인사업 외에 뭐 할 만한 것도 없고…. 나는 여기서 벌고 남편은 그쪽에서 한동안 더 벌고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이 좀더 크면 우리가 그쪽으로 가든지, 남편이 다시 귀국해 합치든지 하고….”
한씨는 2005년 10월부터 보험 영업에 뛰어들었다. 보험은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다. 금융 겸업화에 따라 은행이 방카슈랑스(은행의 보험상품 판매)까지 하고 있는데, 보험업계가 한창 어려울 때 뛰어들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마음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죠. 옛날에는 만날 눈물 쏟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을 정도였어요. 이젠 돈도 조금씩 마련하고 있고…. 하지만 아직 ‘불안’하긴 마찬가지죠, 뭐.”

정규직 자리를 지킨 (주) 만도 서유석 과장
생존을 위해선 오직 개인경쟁력뿐

외환위기 와중에도 비교적 탄탄한 회사에서 정규직 자리를 지킨 이들의 삶은 평온했을까?
서유석(37) (주)만도 과장이 사회에 첫발을 딛던 1995년만 해도 ‘청년 실업’이란 말은 들어보기 어려웠다. 여러 대기업에 동시 합격해 골라서 가는 대학 졸업자들이 그리 귀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경영학과(중앙대 89학번) 출신인 서 과장은 만도기계((주)만도 전신), LG전자, 동부화재를 비롯해 7군데서 합격 통지서를 받고 행복한 고민 끝에 만도기계를 선택했다. 제조업 중에선 장수할 기업이란 외삼촌뻘 되는 이의 권유 때문이었단다. 서 과장은 “(농담조로) 가늘고 길게 가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라며 웃었다.
“외환위기에 임박한 때였지만, 어려워질 것이란 조짐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초봉이 1600만원이라고 들었는데, 성과급까지 포함해 거의 2천만원 가까이 받을 정도로 회사 형편이 좋았거든요. 1996년 12월 말까지 보너스가 잘 나왔습니다.”
이상 신호가 나타난 건 이듬해인 1997년 10월부터였다. 급여가 제때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서 과장은 입사 때부터 줄곧 회사 경영의 핵인 인사팀에 몸담아 위기 조짐을 좀 일찍 느꼈다고 한다. “10월 희망퇴직을 받기 위해 한 달 앞서 인선 작업이 진행됐고, 하반기 공채를 홀딩(유예)한다는 얘기가 미리 나왔거든요.” 상반기까지 흑자를 냈던 힘을 바탕으로 11월까지 급여는 장상 지급되다가 12월부터는 이마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한라그룹 계열이던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에 대규모 지급보증을 선 게 화근이었다. 회사는 자금위기에 빠져 11월 들어 결국 부도에 이르렀고 이듬해 2월까지 제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헉! 소리 날 정도의 곤혹스런 기분을 느낀 건 1999년 회사가 외자 유치를 받은 뒤 사업본부를 매각하면서부터였다. 경주, 아산 등 전국 7곳에 퍼져 있던 사업본부가 하나둘 팔려나가 본사 조직이 줄어드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만도기계의 덩치를 줄여 그해 12월 새로 탄생한 (주)만도의 직원은 3천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만도기계 시절 8천 명을 웃돌던 것에 견주면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가 속해 있던 인사팀(13명)과 인력개발팀(11명), 인사기획팀(6명)이 새 회사 (주)만도에선 인사팀으로 통폐합되면서 8~9명만 남았던 데서 구조조정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다행이었던 건 막무가내로 쫓아내는 게 아니었고, 대부분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외국자본 지분 털고 나가면…

부도 직후 헤드헌터(인력중개)사로부터 이직 제안을 받기도 했던 그가 둥지를 옮기지 않은 건 특별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8년 2월께 인사 담당 임원이 중역회의에서 다른 모든 참석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원들에게 월급은 제대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한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그 임원이 20명 안팎의 직원들을 이끌고 맥줏집에 간 일은 오 과장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회사가 어려움에 빠진 건) 다 내 잘못이다. 정말 미안하다. 다행히 곧 급여는 나올 거 같으니까 앞으로 잘해보자.’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책임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단다. “그래 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다른 참석자들도 그랬을 것이고, 그게 회사가 다시 우뚝 선 바탕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요.”



외국계 자본(JP모건 컨소시엄 73%)에 편입되고 덩치를 줄인 이듬해부터 회사는 ‘돈벼락’을 맞았다. 소비심리 회복으로 자동차 구입이 늘어나면서 부품공급 업체인 (주)만도의 매출이 쑥쑥 불어났다. 2001~2005년에 해마다 두 자릿수 매출 증가를 기록했고, 2004년엔 무려 23.6%의 증가율을 나타냈다. 급여도 크게 올라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보다 높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상여금을 에어컨으로 대신 받던 게 (주)만도엔 이제 아련한 옛일이다.
탄탄한 실적으로 안정돼 있는 (주)만도의 직원들에게는 고민이 없을까? 대주주인 JP모건 컨소시엄이 머지않아 지분을 털고 나갈 예정이어서 (주)만도는 다시 한 번 새 주인을 맞아야 할 처지다. 고위 직급을 중심으로 고용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외환위기 뒤 외자 유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회사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숙제다. 한때 유력한 인수 후보로 떠올랐던 현대자동차가 (주)만도를 인수할 경우 고용 조정폭이 클 것이란 걱정이 퍼져 있다. 사내에선 대체로 우선 인수권을 갖고 있는 옛 주인 한라건설에서 사들이는 구도를 희망하는 정서가 강하다고 한다. 이렇게 될 경우 외국계와 달리 ‘장기 비전’에 따른 경영 전략을 펼 것이란 기대감도 엿보인다.
서 과장은 중간관리자급에 들지만, 고용 불안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 듯했다. 인사 전문가로서 최고경영자로 오르는 게 꿈이라고 밝힐 정도로 자신감도 보였다. 뜻하지 않게 중도 퇴직하게 된다면, 인사제도 관련 컨설턴트(자문역)나 강사로 뛸 생각도 있다고 했다.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점이라면, 조직이 나를 커버(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는 거죠. 조직이라 함은 상사나 회사인데, 회사는 무방비 상태에 빠지고 ‘날 믿고 따라오라’던 상사는 나가떨어지는 걸 봤으니…. ‘개인 경쟁력’이 결정적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된 거죠.” 이런 분위기에선 개인주의와 부서 이기주의 경향이 조금씩 강해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튼튼한 회사로 거듭나 ‘잘나가는’ 대열에 들어서 있는 조직의 구성원들 또한 외환위기의 파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듯하다.





외환위기 사태 일지

(1997년)
-▶1월23일: 한보 부도
-3~6월: 삼미, 진로, 뉴코아 등 대기업 연쇄 부도
-7월2일: 타이 바트화 폭락
-▶7월15일: 기아자동차 사실상 부도(협조융자 신청)
-8월14일: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폭락
-11월5일: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11월14일: 김영삼 대통령, IMF행 결심
-11월16일: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 구제금융 방안 논의
-11월19일: 강경식 부총리 경질, 임창렬 신임 부총리 임명
-▶11월21일: IMF 구제금융 신청 공식 발표
-12월2일: 9개 종금사 업무 정지(청송, 경남, 경일, 고려, 삼삼, 신세계, 쌍용, 한솔, 항도종금)
-12월3일: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12월5일: IMF, 1차 지원금 56억달러 제공
-12월31일: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 설립

(1998년)
-1월30일: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4월1일: 금융감독위원회 출범
-5월20일: 64조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6월18일: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6월29일: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8월12일: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8월28일: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10월19일: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11월5일: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12월7일: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1999년)
-1월1일: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1월25일: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2월12일: 미국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4월19일: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4월21일: 부실 5개 생보사(동아, 태평양,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4월23일: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6월30일: 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빅딜 무산
-8월6일: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8월12일: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13일 시행)
-8월26일: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9월17일: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TOI) 체결
-10월30일~12월1일: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2001년)
-▶8월23일: :IMF 관리 체제 졸업(IMF 구제금융 195억달러 전액 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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