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이면 하루가 훌쩍” 수도권 당일치기 여행 떠나는 ‘실버 전철족’… 빈약한 노인복지와 시간 때우기로 전락한 노후, 우아한 외출은 불가능한가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5월16일 오전 10시52분 청량리발 천안행 경부선 전철. 1시간을 달려 수원역을 통과하자 전동차 안은 한산해졌다. 선캡과 건강 깔창을 팔러 온 잡상인이 전동차 안으로 차례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대학생들은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노인들은 하염없이 창밖만 쳐다봤다.
“친구 친척이 천안에 있다고 해서 가는 길이에요. 차비도 안 들고 해서 나들이 나온 거죠. 그런데 독립기념관에 갈까, 병천 순대 먹으러 갈까?”
전철 개통 뒤 식당 매상 늘어
1호차 경로우대석에 앉은 김정자(65)씨는 옆에 앉은 복지관 친구 2명에게 물었다. 김씨는 주중에는 동네 노인복지관에 가서 포켓볼과 장구, 맷돌체조를 하고 주말에는 아들 내외가 놀러가는 사이 집을 봐준다고 했다. 그러다가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2호차 안에는 김철수(75)씨가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김씨는 이화여대 입구 근처 집에서 10시쯤 나와 천안행 전철에 올랐다. “천안 가는 게 대여섯 번쯤 되려나. 이대 입구에서 천안까지 가는 데 2시간, 점심 먹는 데 1시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데 2시간, 이렇게 5시간이면 하루가 훌쩍이야.”
김씨는 경로석에 앉아 창밖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그는 천안역 광장에서 2천원짜리 국수를 말아먹은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전동차는 오후 1시가 다 되어 천안역에 도착했다. 젊은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갔고, 노인들 10여 명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몰려들었다. 몇몇 할아버지들은 플랫폼에 나와 잠깐 햇살을 맞은 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전동차 안에 몸을 실었다.
“지난해 전철 개통 뒤로는 어르신들이 많이 오셔서 어디 갈 곳이 없냐고 물으세요. 순대가 유명한 병천이나 독립기념관 가는 길을 알려드리죠.”
천안역의 공익근무요원들은 이미 ‘실버 전철족’들을 위한 안내 매뉴얼을 숙지하고 있었다. 공익근무요원이 알려준 대로 천안역 광장 앞 버스 정류장에 가니, 20여 명의 노인들이 북적댔다. 423번 버스가 들어오자 노인들은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단체로 온 할머니들은 뒷자리에 앉아 왁자지껄 떠들었다. 9명이 한꺼번에 온 계모임도 있었다. 혼자 온 할머니 한 명은 상도동에서 온 2명의 할머니들과 말을 트고 일행이 됐다. 그러나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혼자였고, 많아야 둘이었다. 40여 분 지나자 버스는 병천에 도착했다. 노인들은 시장 곳곳에 있는 순댓집으로 흩어졌다.
아우내 장터 근처의 자매순대에는 노인 일행 둘이 와 있었다. 주인 김미란(29)씨는 주말에는 식당 앞으로 긴 줄을 선다며 웃었다. “천안 전철이 개통된 뒤 병천의 순대 식당 매상이 늘었어요. 우리 집은 평일에는 40만~80만원, 주말에는 100만~150만원을 벌죠.”
서울 당산동에 사는 김익교(67)씨와 이종빈(67)씨도 전철을 타고 천안에 왔다. 평소에는 분당선을 타고 성남 모란시장에 자주 간다.
“모란 장날에 점심 먹고 오는 거야. 원숭이 묘기 보여주는 옷장사, 약장사 구경하는 거지. 두 명이서 9천원이면 돼. 3천원짜리 국수 한 그릇씩 6천원, 소주 한 병 3천원이지. 두 명이서 하루 9천원으로 놀 수 있어.” 김씨와 이씨는 소주 한 병을 비운 뒤, 서너 개 남은 순대를 봉투에 싸 식당을 빠져나갔다.
복지관족, 공원족, 환불족…
실버 전철족은 수도권 당일치기 여행객들이다. 월미도·자유공원(인천역), 천안시 병천면·독립기념관(천안역), 성남 모란시장(모란역), 안산 오이도(오이도역) 등은 실버 전철족의 명소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천안역이다. 한국철도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천안역 승차 승객 가운데 71만 명이 65살 이상 노인이었다. 전체 승객 가운데 18.3%가 경로 무임승차권을 들고 전철에 오른 셈이다. 인천역에선 30.7%가 무임승차권을 썼고, 모두 52만3천 명이었다. 일산 호수공원이 있는 주엽역은 27%, 도봉산역은 26%, 모란역은 19.1%가 노인들이 차지했다. 전체 평균 노인 무임승차 비율 12.4%에 비해 많다. 한국철도 관계자는 “지난해 노인 무임승차권 승객은 8천만 명으로, 이는 모두 578억원 정도 되는 금액”이라고 말했다.
여가 활용 방식에 따라 노인들은 몇 가지 부류가 있다. 전철족, 복지관족, 공원족, 환불족 등. 김익교씨는 “복지관에 가면 나이가 어려 심부름만 해야 해서 주로 전철을 타고 수도권을 다닌다”고 말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전철 여행은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침 새벽 5시에 일어나 4층짜리 빌딩 청소를 해서 25만원을 번다. 낮에는 이렇게 천안역으로 나들이를 나온다. 그 시간에 할머니는 식당에 나가 생활비를 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수입이 120만원이야. 자식들은 도와줄 형편은 안 되고.” 그런지라 노는 것도 조심스럽다.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전철 여행이 제격이다. “결국은 돈 문제”라고 옆에 앉은 이종빈씨가 훈수를 뒀다.
중산층 이하 노인의 여가는 ‘시간 때우기’로 전락했다. 퇴직 뒤 밀물처럼 차온 시간을 맞은 뒤, 병장이 제대 날을 기다리듯 달력 날짜를 지우며 하루를 버틴다. 어떤 노인들은 ‘환불족’이 되기도 한다. 할인매장이나 홈쇼핑에서 많은 물건을 사들인 뒤, 바꾸는 행위를 지속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코휀은 노인들이 상품을 돌려줌으로써 사회의 경제활동에 참가한다는 만족감을 얻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돈-상품-돈’으로 이어지는 ‘환불’의 순환은 적은 값에 다수의 소비행위로 다량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프랑크 쉬르마허, )
“이렇다 할 취미도 없이 모든 시간을 노동에 바쳤다가 노인이 되면 정작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될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전철이나 공원, 할인매장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거예요.”
김근홍 강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빈약한 사회적 시스템이 노인의 시간을 풍요롭게 메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정부 일반회계 예산 가운데 노인복지 예산은 0.4%. 일본 예산 비율 15%의 3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대만의 3%에도 한참 뒤진다. 이마저도 절반 이상은 저소득층을 위한 경로연금과 시내버스 교통비로 소요된다. 노인 계층을 위한 문화 예산은 제로에 가깝다.
무료 정책보다는 급여 정책으로
노인들이 찾는 유일한 문화공간은 노인복지관과 경로당이다. 정부가 투입하는 예산도 여기에 한정돼 있다. 최근 들어 무료로 운영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호응을 얻고 있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복지관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교관계를 맺기 때문에 성격이나 경제적 능력이 또래 집단에 들어가는 데 영향을 끼친다. 근본적인 한계는 복지관이 일반 사회와 소통이 단절된 노인들만의 ‘갇힌 공간’이라는 점이다.
김 교수는 “공공시설에 대한 무료 정책보다는 노인 직접 급여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돼야 한다”며 “노인들이 자신의 돈으로 여가를 선택해 소비함으로써 경제활동의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인들이 경로당이나 복지관, 전철이나 탑골공원 등 노인들로 한정된 ‘무료 공간’이 아닌 개인의 기호에 따라 사회와 교류할 수 다양한 통로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노인과 젊은이, 그리고 부유한 노인과 저소득층 노인의 공간이 지나치게 구획돼 있다.
“노인들은 언제나 싸구려 취급이야. 서울대공원에는 갈 수 있어도 그 옆의 서울랜드는 못 가지. 잠실야구장에서 야구는 볼 수 있어도 상암경기장에서 보긴 힘들어. 예술의전당 음악회는 꿈도 못 꿔. 후진 곳은 무료 입장이고 젊은이들 가는 좋은 곳은 돈을 내야 돼.”
이 사회는 노인들이 경로당과 전철과 탑골공원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노인들은 예전부터 우아한 외출을 꿈꿔왔다. 박하일(80)씨가 쓴소리를 뱉으며 전철에서 내렸다. 젊은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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