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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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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요, 이 다음에 크면 애 안 낳아요”

등록 2005-07-12 00:00 수정 2020-05-02 04:24

스스로를 마루타라 말하는 ‘저주받은 고딩’ 5명의 대담
“통합형 논술이 본고사가 아니라는 건 한마디로 ‘쑈’예요”

▣ 사회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정리 이혜온 인턴기자 eon2222@hanmail.net

참가자

남궁정군=이대부고 3(19)
전누리군=구로고 3(19)
조아무개군=ㅍ고 2(18)
김아무개군=ㅅ고 1(17)
윤아무개군=ㅂ고 1(17)
*학생들의 요청으로 익명 사용.

기말고사가 안 끝난 친구들도 있는데, 참가해줘서 고맙다. 시험은 잘 봤는가.

일동=묻지 마세요. 장난 아니에요. (웃음)

요즘 고1들이 힘들 것 같다. 저주받은 89년생이라는 말도 들리는데, 교실 분위기가 어떤가.

윤아무개(이하 윤)=수업 분위기 좋아졌죠. 선생님들이 너무 좋아해요. 우리는 정말 힘들어요. ‘하필 왜 우리냐?’라는 원성이 자자해요. 오죽하면 촛불 집회를 열었겠어요. 우리 학교에서 어떤 애가 친구 책을 훔쳐서 버렸다가 걸려서 떠들썩해졌거든요. 저주받은 89년생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완전히 마루타예요.

교육부는 코미디 집단

전누리(이하 전)=저는 3학년이라 피부로 못 느끼지만 1학년과 3학년에 같이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1학년이 3학년 같다고 웃어요. 거기다 서울대 ‘통합형 본고사’ 파문이 터진 다음에는 1학년 중심으로 논술 학원 다니기로 했다는 분위기도 있고. 한마디로 살벌하죠.

남궁정(이하 남궁)=저희 학교는 4층에 3학년 자습실이 있거든요. 요즘은 거기 1학년이 몰래 들어와 공부한다니까요. 얼마 전에 중학교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후배들이 많이 힘들어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제 코도 석자지만, 많이 안타깝죠.

김아무개(이하 김)=어제 시험 끝났거든요. 전에는 시험 끝나면 친구들끼리 모여 재미있게 놀았는데 요즘은 못 그래요. 서로 점수를 감추려고 많이 안 알리고. 애들이랑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서로 경계하니까 친구가 적으로 느껴져요.

조아무개(이하 조)=저희 때는 학원에서도 대체로 내신 위주로 갔는데 올해는 학원에서 1학년 대상으로 ‘윤리’ 같은 특별 교재를 만들어서 논술 대비를 해주는 등 신경 많이 써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애들이 수행평가 1점 깎이는 데 대한 스트레스가 굉장해요. 체육, 미술, 음악을 배우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말 다한 거죠.

서울대가 2008학년부터 ‘통합교과형 논술고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내신보다 논술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 같아요. 그거 보면서 얼마 전에 시험 못 봤다고 좌절해서 죽는 애들이 떠올랐는데. 결국 실제 반영 비율이 5%밖에 안 되는 것 때문에 죽었다는 얘기잖아요. 열받죠. 저는 이 다음에 커서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까봐요. 어떻게 이런 고생을 시켜요?

=대학들이 내신과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꾀를 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신 반영 비율을 높이고 본고사도 보고 그런다는 소리 같은데, 그러려면 공교육이 제대로 돌아가야죠. 솔직히 사립고 같은 경우는 선생님들이 철밥통이라서 그런지 게으르거든요. 들어와서 책만 읽다 나가는 선생님들도 있고요. 애들이 학원 가는 거 당연하죠.

=우리나라 교육부는 교육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코미디 집단 같아요. 내신 한다고 했다가 논술 본다고 했다가. 차라리 이럴 바에는 옛날처럼 학력고사를 보는 게 속편할 것 같아요. 자꾸 왔다갔다 하니까 마음만 불안하고. 한마디로 이민 가고 싶다니까요. 사람들이 국적 포기 괜히 하나요.

=애들 내신 준비하기도 바쁜데. 진짜 요즘은 내신 때문에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피곤해요. 또 언제 논술까지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논술 강의 들으려면 비싸다면서요?

동네 교회에서도 논술 강의

자, ‘커밍아웃’ 해봅시다. 학원은 다니나.

=예. 저는 내신 학원 다니는데 내신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전 좀 많이 다니는데요, 확실히 도움이 돼요. 요즘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뭔가 있다니까요. 요즘은 종합학원보다는 전문학원이 추세예요. 저는 4명이 모여 그룹 토의를 하는 논술학원 다니는데요. 시사 문제를 놓고 찬반 토론하고 끝난 다음에 글도 써보고. 확실히 도움이 되죠.

어른들은 ‘통합형 본고사’가 도입되면 강남 애들에게만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하는데.

= 강남이라도 다 돈 많은 건 아니지 않나요? (웃음)

=당연히 걱정되죠. 그런데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글쎄요. 아무래도 유리하겠죠.

= 잘나가는 강남구 같은 데는 구청에서도 여러 가지 챙겨주잖아요. 강남구는 온라인 특강도 있고. 저는 강남쪽 사정은 잘 몰라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강남구 온라인 강의 상당히 도움된다는데.

일동=그래? (잠시 웅성웅성)

=저는 강남쪽 사는데요. 저희 동네 교회는 교회에서 애들 사교육을 시켜줘요. 예배 끝난 다음 2층으로 가면 논술 강의한다니까요. 웃기죠?

어쨌거나 서울대에서는 ‘통합형 논술’이 본고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학생들 반응은?

=전에는 답만 쓰는 거에서 글로 쓰는 것으로 바뀐 건데. 결과적으로 같은 거 아닌가요. 거기다 교육 과정을 뛰어넘어서 문제를 내는 거니까. 한마디로 헛소리 같은데요.

요점 줄줄줄 외우는 ‘쑈’

남궁=논술이라는 게 내용 자체가 어렵잖아요. 애들 준비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죠. 이름이 중요해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해 논하라고 했을 때 그 책을 읽어보고 고민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강남 애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논술 수업 때 배운 요점만을 공부해서 줄줄줄 외우거든요. 완전 ‘쑈’ 아니에요?

=근데 10월에 서울대에서 예시 문항을 제시한다니까 좀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공부하기 어려워진 것만큼은 확실해요.

나름대로 생각하는 대안은.

=교육 패러다임 자체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대학에 들어가려면 제 지적 능력이 어느 수준만 넘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누가 잘하는지를 굳이 왜 따지는지 모르겠어요. 일정 수준이 넘은 학생들을 대학이 뽑아 키우면 되잖아요.

=근데 웃긴 건, 지금처럼 똑똑한 애들이 대학 나와도 기업에서는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남궁=내신이든 본고사든 대학에서 원하는 게 우수한 학생들이잖이요. 그 대학의 이름이 그 사람들 재산이고. 거기 가면 우리나라에서 어깨 펴고 떵떵거릴 수 있고. 교육이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너무 제 욕심만 채우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이기적이죠.

=아까도 얘기했듯이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학원은 경쟁이 심하니까, 못 가르치면 반응이 오거든요. 어쩔 수 없이 자기 개발을 해야 돼요. 선생님들에게도 교원평가제나 이런 것 있어야 한다니까요. 학생이 교사의 지식 수준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성실함은 따져야죠.

=우리도 외국처럼 중·고등학교는 쉽게 나가다 대학 졸업을 힘들게 하면 안 되나?

남궁=그럼 대학생 과외가 또 판을 치지 않을까? (웃음)

=얼마 전에 아는 미국 목사님을 만났는데 한국에 와서 너무 놀랐대요. 모든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개미로 보였대요.

정말 이러다 나라 뒤집어져요!

마지막으로 교육부나 대학쪽에 한마디 한다면.

=학생은 사람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교육을 받는 주체는 학생이거든요. 교육부 장관이나 선생님이나 학부모가 아니잖아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면 더 무서워요. 지난 5월에 촛불시위 때도 그랬고. 정말 이러다 나라 뒤집어져요. (웃음)

=국립 서울대 입시안을 저지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공교육은 복구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것 같아요. 저는 올해 고3이라 솔직히 끝이지만 후배들이 걱정되죠.

남궁=지금 교육 문제를 생각하면 교육에 대한 고민은 없고 대학 입시에 대한 고민만 있는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번만큼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잖아요.

=공교육을 반영하자 그런 소리들을 하는데, 그런 말들을 하기 전에 공교육이 올바른가를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논술이든 내신이든 빨리 결론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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