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북유럽 정치학] 총리와 교회가 함께 무지개 깃발을 들다

핀란드서 9월 열린 성소수자 축제에 보수정당과 노키아 등 기업들도 참여
등록 2020-10-02 09:53 수정 2020-10-03 23:35
핀란드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을 안내하는 내용으로 만든 유튜브 화면. 핀란드 법무부 유튜브 갈무리

핀란드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을 안내하는 내용으로 만든 유튜브 화면. 핀란드 법무부 유튜브 갈무리

2020년 9월7일부터 13일까지 일주일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문화 축제인 ‘헬싱키 프라이드’가 열렸다. 올해 헬싱키 프라이드의 가장 큰 뉴스는 34살 여성 총리 산나 마린(사회민주당)이 처음으로 행사의 공식 후원자 역할을 한 것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엄마와 엄마의 동성 배우자로 구성된 ‘무지개 가정’에서 자랐고, 정치인이 된 뒤에도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 증진과 평등을 위해 노력해왔다. 마린 총리는 성명에서 “정부는 핀란드에서 인권 증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성과 젠더 소수자들의 지위와 권리가 입법 및 서비스 제공의 영역에서 강화될 것이다. (…) 우리는 또한 평등과 비차별(non-discrimination)을 지원하기 위해 입법과 구조를 폭넓게 개선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좋은, 존엄한 삶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총리 공관에는 무지개 깃발이 나부꼈다.

마린 총리 “성소수자 지위와 권리 강화”

사민당 내에서 생태 좌파 그룹을 대표하며 진보적인 의제와 가치를 적극 선도해온 산나 마린다운 행보이자 담화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민당, 녹색당, 좌파동맹 등 진보 정당만이 아니라 보수 정당인 국민연합당과 소속 의원 다수가 헬싱키 프라이드 축제를 응원한다는 것이다. 9월 둘째 주 들어 이들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는 성소수자 인권과 다양성의 가치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마크가 줄지어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정당들만이 아니었다. 노키아 등 핀란드의 유수한 기업들도 동참하고 있었다. 나아가 70% 넘는 핀란드인이 속해 국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루터리즘 교회도 헬싱키 프라이드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더 살펴보니 교회는 이미 헬싱키 프라이드가 열린 첫해부터 계속 함께해온 중요한 파트너였고, 교회 내부의 논쟁과 별개로 지속적으로 관여해 축제 참가자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단다.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곧 교회다”라는 사상의 실천이다.

이처럼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 특히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들의 인권을 체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는 모두 헌법과 별개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운영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지닌 성평등법 그리고 최근 추가 신설된 장애차별금지법 등도 함께 갖고 있다.

우선 1960~70년대에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과 인종(민족)차별을 막고 고용평등을 법으로 보장하기 위한 시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적 코퍼러티즘(조합주의) 전통에 따라 노사 단체협상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비롯한 제반 문제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북유럽의 노동시장 체제에서 국가의 공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96년 덴마크부터 차별금지법 잇단 도입

긴 논쟁과 숙의 과정을 거쳐 덴마크가 먼저 1976년 동일임금법, 1978년 평등대우법을 제정했고, 이어서 노르웨이(1978년), 스웨덴(1979년)이 성평등 법률을 제정했다. 핀란드는 한 걸음 늦어서 1986년 관련 입법을 성사할 수 있었는데, 이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위원회 임원 등에 남녀 양성이 각각 40% 이상 대표되도록 하는 등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전후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활발해진 점, 도시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서비스 영역이 만들어지면서 전통적 성별 구분이 도전받은 사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과 국제인권협약 비준 등이 끼친 국내법적 영향, 모성 개념 변화와 여성운동 성장 등이 모두 맞물린 결과였다.

북유럽의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도 국제사회로부터의 외부 영향과 후기근대적 신사회운동의 성장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앞서 노동시장의 구별된 특징을 언급한 것처럼 기실 기회의 평등과 불합리한 사유에 따른 차별 금지 원칙을 강조하는 평등법이나 차별금지법은 주로 영미권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발달한 법제로, 사민주의 등 정치적 기획과 적극적 사회정책을 통해 집합적 수준의 평등한 자유와 사회적 시민권을 보장해온 북유럽 국가들의 법제와 잘 들어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국제인권의 지평이 더욱 심화·확대되고 장애, 이민·난민, 성소수자 등의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성장하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유럽연합(EU) 출범과 확대 과정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해 북유럽 국가들도 별도의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법 제정은 덴마크(1996년), 노르웨이(1998년), 스웨덴(1999년), 핀란드(2001년) 순서로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 법률을 개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유럽 국가들의 차별금지법은 우선 불법적 차별 근거를 폭넓게 규정하고, 직접 차별과 간접 차별을 구분하며, 괴롭힘(harassment)을 차별 범주에 포함한다. 나아가 차별의 실제적 범위와 관련해 고용, 채용, 직업훈련, 단체 가입, 사회보장과 의료 서비스, 사회수당, 교육,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 주거 등의 영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울러 차별 시정 기구로서 별도의 옴부즈맨과 법원 절차를 도입·운영한다. 예컨대 핀란드의 차별옴부즈맨은 국가적인 차별 실태를 조사하고, 관련 진정을 접수해 조사·구제하며, 관련 법제와 정책 개선에 관한 의견 표명과 더불어 3년마다 의회에 활동 성과와 차별 개선 과제가 망라된 종합보고서를 제출한다.

2019년 차별옴부즈맨 의회 보고서를 살펴보니, 언어·숙박·교육에서의 차별 시정, 상점과 은행 서비스 등 사적 분야의 차별 시정, 사회복지·의료·주거 관련 차별 시정, 혐오표현과 괴롭힘 금지, 장애 관련 다양한 유형의 차별 시정, 고용 관련 차별에 대한 강력한 조치, 핀란드 내 외국 국적자들의 지위와 권리 보호, 인신매매 피해자 인권 보호 등이 주요 이슈이자 과제로 다뤄지는 것이 확인된다. 옴부즈맨에 따르면, 2010년대 핀란드가 장기 경기침체를 겪는 과정에 정부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조치를 도입했고, 이는 불평등 심화 등 사회적 긴장을 고조했다. 이를 활용한 극우 또는 민족주의 포퓰리즘이 성장하면서 혐오표현과 인종차별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현 산나 마린 정부는 이러한 경향을 제어하기 위해 적극적인 사회정책과 평등 증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옴부즈맨이 3년마다 의회에 개선 과제 보고

차별금지법제를 둘러싼 북유럽 사회의 대응 경험은 우리에게 체계적인 평등 및 차별금지법의 제정,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정치 참여 확대와 역량 증진(empowerment), 고용·주거·교육·사회보장 등 핵심 분야에서 평등을 증진하는 효과적 사회정책 시행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다중적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민주주의, 인권, 법치국가의 원칙을 더욱 견고히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적 구상과 실천이 요청된다.

서현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제1332호 표지 이야기 차별금지법을 이땅에
http://h21.hani.co.kr/arti/SERIES/2439/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